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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시민공원 삼패지구. 다산길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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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한강시민공원 삼패지구부터 시작되어 한강을 따라 이어지다가 운길산역에서 끝난다. 끝난다고 해서 길이 끊긴다는 건 아니고, 한 구간이 그만큼이라는 얘기다. 그 길, 이름 하여 다산길 1코스인 한강나루길이다.

제주 올레의 환상적인 성공 이후, 대한민국 방방곡곡에서 다양한 도보길이 만들어지고 있다. 걷기 마니아들은 귀가 밝은지 새 길이 만들어졌다는 소식은 귀신 같이 알아내고 도보여행에 나선다. 그만큼 걷기 좋은 길에 목말라고 하고 있었다는 말일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서 경기도 남양주에 '다산길'이 만들어졌다는 소식은 반가웠다. 꼭 걸어보리라, 작정하다가 지난 11일 길을 나섰다. 겨울은 확실히 겨울이었다. 날씨가 며칠 동안 포근하더니 하필이면 걷겠다고 나선 날, 수은주가 영하로 뚝 떨어진 것이다. 중무장을 하고 길을 나선 것은 당연지사. 다산길 1코스 한강나루길은 길이 한강을 끼고 오래도록 계속되기에 한 겨울의 매서운 강바람을 고스란히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산길은 전부 13코스로 조성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중에서 지금 걸을 수 있게 열린 길은 1~7코스와 13코스. 8코스부터 11코스는 내년 상반기에 완성될 예정이라고 남양주시 관계자가 밝혔다. 이 길의 이름을 '다산길'로 붙인 것은 2코스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적지가 있기 때문이란다.

이 날 오랜만에 남편과 함께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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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나루길의 시작점은 한강공원삼패지구지만 걷기 시작한 곳은 덕소역. 그러므로 한강나루길의 출발지는 덕소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한강나루길의 구간 거리는 16.7km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것보다 더 많이 걸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그 점을 감안해서 걷는 거리와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야 한다.

한강나루길이라는 명칭은 한강과 한강을 따라 들어섰던 팔당나루터와 소내나루를 보면서 걷는다고 해서 붙인 것이라고 했다.

한강시민공원 삼패지구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건 고래상이다. 머리와 꼬리만 지상으로 튀어나온 고래가 한강을 배경으로 펄떡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째 뜬금없다. 동해바다에 빨간 고래를 잡으러 간다는 노래는 들어봤어도 한강에 고래가 출현한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으므로. 아무튼 한강에서 마주친 고래는 상상력을 자극하기는 했다.

그곳부터 강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추운 날씨지만 두꺼운 파카를 껴입은 사람들이 여럿 나와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강 가까이에 산다면 가끔 이렇게 산책을 나와도 좋겠다, 싶어진다.

흐린 날인데도 햇볕은 강물 위로 쏟아져 내려 싱싱한 생선비늘처럼 반짝거리면서 반사되고 있었다. 그 위를 청둥오리 떼가 한가롭게 노닐고 있다가 이따금 수면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른곤 했다.

밋밋한 다산길... 그래도 길은 잃을 수 있더군

멀리 팔당댐이 보인다.
 멀리 팔당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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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밋밋하게 이어졌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이 지루하도록 길게 강을 따라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이런 길은 뭐랄까, 기계적으로 걸음을 옮기게 한다. 하늘은 잿빛으로 음울하게 펼쳐지고, 겨울의 음산한 기운이 강물을 내리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길을 잃을 염려가 없는 구간이라서 그런지 이정표는 다산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만할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 기억을 깨우쳐 준다.

중앙선 팔당역 바로 옆에 남양주역사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그냥 눈으로만 대충 박물관을 훑고 지났는데,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예봉산 등산로 입구 표지석은 있는데 다산길을 알려주는 이정표를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이십여 분쯤 이정표를 찾아 이리저리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몇 걸음만 더 앞으로 갔으면 이정표가 있는데 거기까지 가지 못하고 여기가 아닌가베, 하면서 다른 길을 기웃거리다가 그리 된 것이다. 하긴 그런 짓 한두 번 해보는 거 아니니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여러 갈래로 나뉘는 길에서는 이정표의 간격이 짧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다산길을 걷기 전에 전화로 길을 물은 게 남양주시 관계자는 표지판이 잘 되어 있어 절대로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정표는 길을 잃을 우려가 전혀 없는 곳에서는 아주 잘 세워져 있고, 헷갈려 헤매기 딱 좋은 길에서는 숨바꼭질을 하듯이 꽁꽁 숨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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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나루길의 가장 큰 특색은 철길이다. 예전에 중앙선 철도가 달리던 길은 중앙선 복선전철이 개통되면서 자연스럽게 효용가치를 잃어 폐철길이 되었다. 열차가 달리지 않는 철길은 쓸쓸하게 비어 지나가는 바람만 이따금 쉬어갈 뿐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는데, 다산길이 그 길을 끌어안았다. 산길이나 숲길만 걷지 말고 철길도 기분전환 삼아 걸어보라고.

그 길, 운치 하나는 끝내준다. 한강이 그림자처럼 길게 따라오는 길이다. 길옆에 강이 오래 묵은 이무기보다 굵고 길게 몸을 뒤채이면서 이어지니 더더욱 그렇다. 끝없이 이어진 철길 위에 올라서니 내가 열차가 되어 철길을 달리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한강나루길은 이런 철길이 10km쯤 이어진다.

오오, 이런 길이라면 언제까지나 걸을 수 있어.

이런 생각, 아마도 이 길 위에 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것 같다. 내가 그랬으니까. 기찻길은 어디론가 무작정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의 숨겨진 열망을 흔들어 깨우는 존재가 아니던가. 가만히 서서 철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배낭 하나 짊어지고 바람이 되어 여행을 떠나고 싶다, 는 생각이 저절로 들지 않나. 나, 언젠가는 철길을 따라 오래 걸어보리라, 작정을 한 적이 있다.

드디어 그런 기회가 왔구나. 오늘은 철길을 걸으면서 도보여행을 떠난 기분을 만끽하리라, 마음을 다졌다. 평행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철길 위에 올라서서 양팔을 펼치고 위태롭게  걸으면서 영화 <타이타닉>의 한 장면을 흉내내다가 철길 사이에 놓인 침목으로 내려왔다. 침목과 침목 사이에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돌들이 들어차 있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길에 차인다.

<타이타닉>의 주인공처럼~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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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분을 채 걷지 않아 깨달았다. 현실과 이상은 하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라는 것을. 철길을 오래 걸어본 사람은 이 길이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기차만 기운차게 달리게 하려고 만들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얘기다. 침목과 침목 사이가 내 보폭보다 아주 미묘하게 좁아서 걷다보니 간격을 조절하면서 걷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다리가 짧은 내가 그러니 다리가 긴 사람들은 오죽할까.

보폭을 침목에 맞추려니 종종걸음을 걷는 형국이고, 그렇다고 침목을 한 개를 건너뛰자니 가랑이가 터무니없이 벌어져서 힘들고. 침목 사이에 깔린 돌을 그냥 밟으면 되지만 그것도 여러 번 밟다 보니 걷기가 마냥 쉽지 않았다.

낭만은 역시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건가 보다. 그리고 꿈은 이루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깨지라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철길 사이를 걷다 지쳐 철길을 벗어나 철길 옆에 돌이 깔린 길을 걸으니 발밑에서 돌들이 부딪히면서 비명을 질러대는데, 그 길 또한 오래 걷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길을 걸으러 온 것이 아니라 길이 걷기 나쁘다고 투덜거리려고 온 것 같다. 그렇다고 걷기를 중단할 만큼은 아니다. 그저 그렇더라는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

철길 옆에는 간간이 쉼터를 조성해 놓아서 걷다가 지치면 잠시 쉬어갈 수 있게 해놓았다. 그곳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시를 적은 나무판을 설치해놓아 쉬면서 시를 읽은 여유를 부릴 수 있다.

철길 옆이나 아래로는 한강이 흐르고, 멀리 팔당댐이 보인다. 바람은 제법 쌀쌀하게 불었다. 철길은 속도를 붙여 빠르게 걷기 힘든 길이라 어쩔 수 없이 쉬엄쉬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강아지 두 마리가 나타났다.
 강아지 두 마리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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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도보여행을 나서면 꼭 만나는 게 있다. 개.

"나는 전생에 개였나 봐. 개가 너무 좋아."

이건 남편이 툭하면 하는 말. 한데 그 말이 아무래도 맞는 것 같다. 남편은 같이 도보여행을 가면 만나는 개마다 죄다 아는 체를 한다. 그럴 때마다 개들도 반갑다고 난리도 아니다. 아주 험상궂게 생긴 녀석도 남편을 향해 꼬랑지를 흔들어대면서 살랑거리는 걸 보면 남편의 말마따나 전생에 개였는지도 모르겠다.

사람 사는 동네에서야 개가 드물지 않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사람의 흔적이 드문 철길 위에 느닷없이 하얀 강아지 두 마리가 두둥, 하면서 나타난 것은 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 건지, 원. 집 나간 강아지와 상봉이라도 하는 듯이 남편은 강아지를 반겼고, 녀석들은 꼬랑지를 흔들어대면서 쥔이라도 되는 양 남편에게 달려든다. 보고 있노라니 얼씨구,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그렇게 철길 위에서 강아지와 노는 사이 이번에는 덩치가 큰 하얀 개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폼을 보아 하니 강아지의 어미인 것 같았다. 그 녀석 역시 남편과 아는 체를 하고, 같이 논다. 강아지들은 한동안 우리를 따라 오다가 어미를 따라 가버리고, 우리는 내처 철길을 걷고 또 걸었다.

철길 걷기, 도보여행 고수에게도 만만치 않네

터널도 있다. 조명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므로 조심해서 걸어야한다.
 터널도 있다. 조명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므로 조심해서 걸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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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내 역사
 능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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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커다란 입을 벌리고 느닷없이 나타난 터널은 음흉한 고래뱃속처럼 어두웠다. 철길은 그 안으로 미로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터널 안으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을 껌벅이면서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몇 초쯤 지났을까, 갑자기 터널 벽 아래를 따라 빛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조명 시설을 해놓은 것인데, 이게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다가 하필이면 내가 들어갔을 때 모조리 꺼진 것이다. 가늘고 긴 형광등처럼 생긴 조명은 조도가 낮아 터널 안을 환하게 밝혀주지 못해 발밑을 조심하면서 걸음을 옮겨야 했다.

터널 안을 걷고 있자니 기차가 뒤에서 긴 기적소리를 남기면서 달려올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래서 자꾸 뒤를 돌아보며 혹시나 기차가 오는 게 아닐까 살폈다. 폐철길을 달릴 기차는 없을 텐데 말이다.

오래 전에 문을 닫아 건 능내 역사를 지나고도 철길은 이어진다. 철길을 두 시간 이상 걸으려니 고역이다. 철길이 이렇게 길지 않아도 되는데, 싶어진다. 맛보기로 한 시간쯤 걸으면 좋았을 것 같다.

언제까지나 끝없이 지루하게 이어질 것 같았던 철길이 예고없이 갑자기 뚝 끊어져 깜짝 놀랐다. 시작이 있으면 당연히 끝이 있는 법이지만 누군가 일부러 끊어놓은 철길은 쓸쓸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그 너머로 양수대교가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에 운길산 역이 있었다.

길이 뚝 끊겼다. 멀리 보이는 다리는 양수대교.
 길이 뚝 끊겼다. 멀리 보이는 다리는 양수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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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간 반쯤 걸었다. 겨울이라 쉼터가 있다지만 오래 쉬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기 때문에 빨리 걸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걸었던 길 가운데 이곳 철길이 가장 걸음을 내딛기 어려운 길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도 한 번쯤은 걸어볼 만하다.

다산길 안내지도. 이 지도만 갖고는 길을 찾기 쉽지 않다. 더 상세한 지도가 필요하다.
 다산길 안내지도. 이 지도만 갖고는 길을 찾기 쉽지 않다. 더 상세한 지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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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도보여행, #다산길, #폐철길, #한강나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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