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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친구의 우스갯소리

 

많은 작가들은 어린 시절이나 고향이야기를 평생 우려먹고 산다. 헤르만 헤세는 독일의 칼프란 곳에서 태어났는데, 그 일대가 온통 전나무 숲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고장이었다. 그의 작품 가운데 칼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데미안><수레바퀴 밑에서><청춘은 아름다워라> 등 무려 23편이나 된다고 한다. 비단 헤세뿐이랴.

 

알퐁스 도데도 고향인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풍경과 마을 사람들 생활을<풍찻집 소식><월요 이야기> 등을 통해 정감있게 그렸다. 우리나라 작가들도 그런 이가 많다. 내가 만난 현기영 선생은 유년 시절의 4·3 악몽을 평생 간직한 채 작품화하고 있었고, 김원일 선생도, 박완서 선생도 어린 시절에 보고 겪은 한국전쟁의 상흔을 평생 작품 제재로 삼고 있었다. 작가만 그런 게 아니다. 화가도, 음악가도 대부분 그러하다. 예술가에게 고향과 어린 시절은 마르지 않는 창작의 샘물이다.

 

나는 늦깎이 작가로서 등단한지 20여 년이 조금 넘었다. 그동안 30권 가까이 이런저런 작품집을 펴냈는데, 그 가운데 고향이야기를 본격으로 다룬 책은 여태 한 권도 없다.

 

몇 해 전 고향에 갔더니, 한 친구가 내가 고향 이야기를 쓴 게 없는 걸 알고서 "황금어장을 고향에 두고 백지(괜히) 고기도 없는 타관을 맴돌며 헛고생한다"고 우스갯소리처럼 충고했다.

 

그 친구 충고는 새길수록 나에게 적확한 비수같은 말이었다. 우리나라 어디인들 구슬픈 이야기가 많지 않으랴만 내 고향 구미 금오산 낙동강변에는 이야기가 엄청 많았다.

 

고려말 야은 길재 선생부터 현대사 10·1 항쟁 이야기, 한국전쟁 이야기, 장택상 박정희 집안 간 인생역전드라마 이야기, 왕산 집안 망명 이야기, 그 후손이 전 세계에 유랑민으로 떠도는 이야기 등 흥미진진하고 아픈 이야기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날마다 금오산을 바라보며 이야기꾼이 되겠다고 작심을 했고, 지금도 그 길을 걷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중국으로, 러시아로, 일본, 미국으로 마구 이야기를 좇아 쏘다녔다. 

 

한 대통령 형님의 당부

 

10여 년 전, 중국 하얼빈에서 고향 출신의 한 파르티잔을 만났다.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이듬해 여름방학 때 혼자 월급의 반을 털어 북만주를 헤매며 그의 순국지에 들꽃을 바치기도 했고, 또 다른 한 고향사람의 젊은날 행적을 뒤쫓아 창춘 교외 라라툰[拉拉屯]에 있는 옛 만주군관학교까지 애써 찾아갔다.
 

내 컴퓨터 하드디스크에는 '허형식' '박정희'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글이 대여섯 편 여태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10여 년이 넘게 두 인물을 긁적거렸지만, 완성된 작품은 아직 단 한편도 없다. 아마도 내가 완성치 못하고 세상을 떠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2004년 초 일천여 누리꾼의 도움으로 "화장실이 어디입니까?"라는 영어도 지껄이지 못하는 내가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 가서 한국전쟁 사진을 원없이 보고 스캔해 왔다. 그 뒤 다시 사진들이 가물거려 2005년, 2007년에는 간도 크게 내 돈으로 비행기 타고 가서 못다 본 한국전쟁 관련 사진을 들춰 그간 총 1700여 매를 스캔해 왔다.

 

그 사진 하나하나가 다 이야기 감들이다. NARA(문서기록보관청) 조사실에서 하루 종일 수십 년 묵은 먼지를 목이 괄괄하도록 마시면서도 좋은 사진을 입수하는 날은 그 감동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 사진들이 지금 인터넷에 맴돌고,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그 사진집이 국립도서관, 대학도서관에 비치된 것을 보고,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가 아닐까 자위하기도 한다.

 

사실 나는 작품 소재 면에서는 매우 축복받은 작가로 풍성하다. 다만 내 능력이 부족하여 여태 완성된 작품을 세상에 토해내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고향에 갔더니 한 친구가 저녁을 사겠다고 하면서 가까운 밥집으로 데리고 갔다. 친구는 먼저 밥집에 온 손님 가운데 한 노인에게 인사를 하면서 나를 소개했다.

 

 "어르신, 이 친구는 구미초등학교, 구미중학교 출신으로, 옛날 해방 직후 구미초등학교 박00 선생 아들입니다. 장터 오거리에서 살았지요."

 

그 어른은 나의 아버지를 매우 잘 안다고 했다. 친구는 그 어른이 박정희 대통령 생가를 18년간 지키다가 정년퇴직한 전 구미경찰서 정보과 장영택(84) 형사라고 소개했다. 사람 좋아하고, 이야기 좋아하는 내 친구는 굳이 그 어른을 우리 자리로 모셔 마침내 장 형사의 무거운 입을 열게 했다.

 

장 형사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부터 박 의장의 구미생가를 지키며, 큰 형 박동희 옹에게 끈질기게 찾아오는 청탁자를  쫓았다. 때로는 청와대 부름이 있으면 친인척을 데리고 서울 다녀왔다. 그렇게 생가를 24시간 지키며 친인척 관리를 했다는 얘기를 아주 진지하게 들려주었다.

 

만일 후임 대통령들이 이 어른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귀담아 듣고 친인척 관리를 제대로 했더라면,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이 번갈아 가며 대국민사과를 하는 불행도 막았을 것이라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은 거의 책도 읽지도, 공부도 하지 않았고, 남의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는 독선가들이 많았다.

 

앞선 대통령의 비극을 보고 후보시절에는 실컷 비판하고도, 당신 재임 때는 전임자와 똑같이 답습했다. 역사의식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불나방이나 파리처럼 불에 뛰어들거나 파리통에 빠져 허우적거린 대통령도 있었다.

 

"70년대 초 박 대통령이 귀경길에 잠시 고향에 들렸는데 그때까지 자동차가 생가에 들어갈 수 없는 좁은 농로라 대통령 일행이 큰 길에다 차를 두고 걸어 오셨습니다.
 

당시 구자춘 경북지사가 그 현장을 보고서는 대통령 일행 귀경 후 농로를 넓히려고 공사를 벌이자 박동희 옹이 다른 동네에 길을 다 내준 뒤 우리 집 길을 넓히라고 하여 공사를 못했습니다. 전깃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박동희 옹은 동생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아주 평범한 농사꾼으로 살았다. 지금도 자료사진에는 대통령 형이 지게에 퇴비용 풀을 지고 다 쓰러져가는 초가로 들어오는 사진을 볼 수 있다.

 

박동희 옹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극히 평범한 농사꾼으로 살았기에 언론의 조명도 받지 못했고, 이 집안 연구가가 아니면 이름도 잘 모를 것이다. '박동희'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비운의 프로야구 선수를 연상할 테다.

 

소탐대실하는 대통령의 형님

 

지난 8일에 국회에서 있었던 2011년 예산안 날치기 통과에 '과메기 예산'이니, '형님 예산'이니, 나로서는 평생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낱말들이 지상에 오르내렸다. 좀 더 그 내용을 자세히 알고자 신문을 들췄다. 그랬더니 서민복지 예산은 무차별 삭감하면서도 대통령 친형 이상득 의원 지역구의 선심성 예산은 그대로 통과 되었기에 그런 '신조어'가 생기고, 국회에서 법석이 난 모양이었다.

 

솔직히 나는 이제까지 이상득 의원을 잘 몰랐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이상득'을  쳐 보았다. 위키 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되었다.

 

이상득(李相得 1935년 11월 29일 영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며, 기업인이다. 한나라당 제18대 현역국회의원이며, 대통령 이명박의 형이다. 코오롱의 대표이사를 지낸 뒤, 정치에 뛰어들어 영일군과 포항 남구선거구에서 6번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상득 의원의 영향력을 비꼰 '만사형통, 상왕정치, 형님예산' 등의 별명도 있다.

 

다음은 이상득 의원 홈페이지 프로필 요약이다.

 

이상득 의원은 13대 국회의원으로 시작하여 6선 의원으로, 신한국당 제2정책조정위원장, 신한국당 정책위원장(한나라당 정책위원장 역임), 국회재정경제위원장, 국회운영위원장, 한나라당 원내총무, 국회공직자 윤리위원회 위원, 한나라당 경제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 … 한나라당 최고위원, 한나라당 사무총장, 국회부의장, 대통령 특사 ….

 

처음은 호기심으로 옮겨 적었는데, 곧 마음속으로부터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나중에는 너무 열받아 중간에 빼먹었다. 근데 정말 이건 아니다. 그래도 동생이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봐 줄 수 있으나, 그 이후는 노욕의 극치였다.

 

사람에게는 염치라는 게 있는데 이상득 의원에게는 그게 보이지 않는다. 곧 '의(義)'에서 우러나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대통령 집안이 이렇게 시시한가. 이러고도 대통령 집안이라고 족보에 올릴 것인가.  

 

외환위기 후 젊은이들이 백수로 전국 방방곡곡에 넘쳐나고 있다. 교사자격증을 가지고도 교단에 서지 못했다. "나이 많은 교사 한 사람이 퇴직하면 세 사람의 젊은 교사를 뽑을 수 있다"고 언론에서 연일 보도했다. 아내는 그 보도를 보고 나에게 젊은 후배를 위해 그만 용퇴하라고 권유했다.

 

나는 아내 말을 듣고 풍랑을 만난 난파선에서는 그래도 나이 든 사람이 먼저 뛰어내리는 것이 바른 순서라 생각하고 정년을 5년 남긴 채 퇴직했다. 동료직원들이 베풀어준 송별회 때 나는 한 젊은 교사가 "선생님 때문에 교단에 서게 되었습니다"라고 인사받은 것을 내 일생에 큰 보람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내외는 생활비를 아끼고자 강원도 산골로 내려왔다. 

 

이상득 의원은 더 이상 소탐대실(小貪大失)치 말고 당장 의원직을 사퇴해야 한다. '과메기 예산' '형님 예산' 도대체 이게 뭔 말인가? 젊은 사람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는가? 정말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 한때 전 아무개 고스톱이 있었는데, 앞으로 '이상득 고스톱'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이 의원은 이제라도 훌훌 털고 떠나는 게 옳다. 누가 대통령 형의 목에 방울을 달겠는가? 이는 대통령도 하지 못할 것이다. 강원도 한 서생이 감히 앞으로 닥칠 모든 수난을 각오하며 쓴소리를 드린다.

 

"이제 그만 물러나십시오."

 

세밑에 대통령 형님의 현명한 '처신'을 기다려 봅니다. 대한민국 백성들에게 우리 겨레는 그래도 한 가닥 염치가 있다는 희망을 새해 선물로 주십시오.


태그:#이상득, #박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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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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