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1월 10일(수)


어제 저녁 드디어 거제도를 벗어났다. 이번 여행 최대 난코스 중에 하나를 지나 왔다. 그런 까닭에 오늘 아침 마음이 한결 가볍다. 이후로 그 이상의 난코스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지도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멀미를 할 것 같이 복잡한 해안선을 가진 지역은 거제도가 끝이다. 부산에 '가덕도'라는 섬이 하나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 섬이 아무리 험하다 해도 거제도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제도에 비하면 가덕도는 아주 작은 '새끼섬'에 불과하다.

오래간만에 화창한 날이다. 맑고 따뜻하다. 바람은 잔잔하다. 지난 며칠간 통영시와 거제도를 돌아 나오느라 누적된 피로만 아니라면, 다른 것에 구애받는 일 없이 마음껏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날이다. 숙소를 떠나면서 바로 바다와 바투 붙어 있는 해안도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한동안 오가는 차량도 드물고, 언덕이 거의 없는 평지를 달린다. 속이 다 후련하다. 이런 길을 달려보는 게 얼마만인가? 자전거가 마치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이 지나가고 있다. 이런 상태라면 오늘 안으로 통영과 고성을 지나, 부산을 눈앞에 둔 마산까지도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다. 도무지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던 남해안 여행이 끝나가고 있다.

통영시 해안도로
 통영시 해안도로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울긋불긋 홍조를 띠기 시작하는 산줄기들

틈틈이 자전거에서 내려 바다를 바라다본다. 하늘은 밝고 따뜻하고, 바다는 맑고 고요하다.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이다. 파란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이 검은 빛으로 반짝인다. 내 눈에는 오늘 이 섬들이 모두 바다 위를 수놓은 보석처럼 아름다워 보인다. 이곳의 바다는 고성반도와 거제도로 둘러싸여, 호수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덕포리를 지나면서 77번 국도와 만난다. 근처에 안정산업단지가 있고, 조선소 같은 크고 작은 공장들이 있어 대형 차량들이 비교적 많이 지나다닌다. 그렇지만, 이미 거제도의 14번 국도를 지나온 사람이라면 이 국도가 그렇게 큰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일단 안정산업단지를 지나고 나면, 지방도로만큼이나 한적한 도로로 바뀌기 때문에 자동차들 때문에 너무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없을 것 같다. 77번 국도는 통영시와 고성군 동해면을 지나 마산 율티리까지 이어진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이 시작되는 곳, 동진대교가 있는 해안도로.
 '한국의 아름다운 길'이 시작되는 곳, 동진대교가 있는 해안도로.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동해면으로 접어들어서는 줄곧 해안도로를 달린다. 이 도로는 바닷가 산비탈을 가로지르기 때문에 조금 힘이 든다. 하지만 이 비탈길 역시 거제도의 절벽 길에 비하면 꽤 유순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 동해면의 해안도로에서 바라다보는 경치가 무척 아름답다. 중간에 '한국의 아름다운 길' 표지판이 서 있다. 이 길 위에서 가조도와 칠천도, 그리고 마산의 저도와 같은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다는 물론이고, 바다로 내뻗은 산줄기 역시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곳 한반도 남쪽의 산등성이에도 비로소 단풍이 들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녹색이 짙었던 산들이 빨갛고 노란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북쪽에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시점에 비하면,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울긋불긋 홍조를 띠기 시작한 산줄기들이 불붙은 몸을 식히려는 듯 파란 바다에 은근슬쩍 몸을 담그고 있는 광경은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색다른 풍경이다. 동해면 해안도로를 돌아 동진교를 건너면, 그때부터는 마산이다.

해안도로 풍경
 해안도로 풍경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단풍이 짙게 물든 산줄기.
 단풍이 짙게 물든 산줄기.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도로'는 없고 '개떼'만 기다리고 있는 좁은 오솔길

마산으로 들어서 율티리를 지나가는 바닷가길이 조금 복잡하다. 공장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간 아스팔트 길이 갑자기 숲 속 언덕을 만나 좁은 시멘트 길로 이어지는 바람에, 이대로 계속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게 만든다. 그러더니 그 길을 얼마 못 가, 길가 전봇대에 '도로 없음'이라고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글귀가 보인다. 점입가경이다.

전봇대에 '도로 없음' 표시가 써 있는 길.
 전봇대에 '도로 없음' 표시가 써 있는 길.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거 참 난감한 노릇이다. '도로 없음' 표시가 자동차 통행을 막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막다른 길이라 더 이상 갈 길이 없다는 뜻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여기서 돌아 나간다고 해도 또 다른 길을 찾는다는 보장이 없다. 길이 있어도 찾기가 쉽지 않다. 할 수 없이 그대로 앞으로 나아간다. 다행히 막힌 길은 아니다. 밭 사이로 마을로 들어서는 길이 가느다랗게 이어져 있다. 좁은 오솔길이다.

그 길을 빠져나가면 바로 개 사육장이다. 처음에 그 사실을 모르고 무심코 그 길을 가다가 깜짝 놀란다. 갑자기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자전거여행자를 발견한 개들이 미친 듯이 짖어댄다. 가슴이 철렁한다. 너무 놀라 자전거에서 떨어질 뻔하다가 한쪽 다리를 겨우 땅에 딛고 멈춰 선다. 주위를 둘러보니, 길가 양쪽이 모두 철망을 둘러친 개 사육장이다.

양쪽 우리 안에 갇힌 개들이 사냥감이라도 발견한양 누런 이빨을 드러낸 채 사납게 짖어대고 있다. 개들이 참 여러 가지로 애를 먹인다. 그렇다고 갇혀 사는 개들을 탓할 수도 없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가에서까지 개들을 사육해야 하는 사람들이 문제다. 이 길에는 도로가 없다는 표시 외에 '개조심' 표지를 함께 붙여 놓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여하튼 그나마 길이라도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해안도로에서 바라다보는 풍경. 바닷물이 맑고 투명하다.
 해안도로에서 바라다보는 풍경. 바닷물이 맑고 투명하다.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의욕은 물론, 호기심마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내포리의 해안도로를 달려 신촌삼거리에서 머뭇거린다. 이대로 해안을 따라가면 '저도'라는 작은 섬을 돌아 마산의 남쪽 끝에 있는 '원전항'까지 들어갔다 나와야 한다. 들쭉날쭉한 해안 길을 구석구석 들어갔다 되돌아 나와야 하는 길이라, 시간이 꽤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그곳을 모두 거쳐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신촌삼거리'가 갈림길이다. 신촌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면 남쪽에 있는 저도와 원전항으로 들어가는 길이고, 좌회전하면 다른 곳을 거치지 않고 바로 마산항으로 가는 길이다. 현재 시간 오후 3시경, 이 시간에 저도로 길을 잡을 경우에는 인적이 드문 해안도로나 산길에서 밤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곳에서 저녁 식사와 잠자리를 해결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이제 입이 아파서 더 떠들어대고 싶지도 않다.

이것저것 대충 따져본 끝에 결국 마산항으로 방향을 잡는다. 현실적인 선택이지만 비겁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저도 방향으로 길을 잡기에는, 그동안 내 의지와 용기가 많이 약해진 탓이다. 의욕은 물론이고, 호기심마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낯선 곳,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는 곳에 선뜻 발을 들여놓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여행이 점차 의무방어전을 치르는 격으로 변질되고 있다. 이러다 대충 해치우고 보자는 식으로까지 변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지금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여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떠나온 일상으로 다시 되돌아가기 위해 여행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마산항으로 가는 길에, '안녕로'라는 이름의 독특한 해안도로 위를 지나간다. 바닷가 산 아래로, 좁은 길이 구불구불 산비탈을 넘어간다. 인적이 드문 길에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다. 마침 왼쪽 산 너머로 살짝 해가 넘어간 뒤라서 산그늘이 짙다. 지금은 날이 추워서 다소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하지만 햇볕이 뜨거운 날에는 나무 그늘 짙은 산 속을 달리는 것만큼이나 시원하고 상쾌한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오가는 차량마저도 드물다. 아스팔트만 걷어내면 바로 자연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길이다. 욕심 같아선 이 길을, 자동차 통행을 막고 자전거만 다닐 수 있는 길로 만들고 싶다.

세상의 모든 길들이 안녕로만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되면, 자전거여행 중에 내가 얼마나 안녕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시간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그만큼 여행 중에 의욕을 잃고 시름에 잠겨야 하는 일 같은 것도 대부분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꿈 같은 길, 꿈 같은 일이다.

해안도로에서 바라본 바다와 섬
 해안도로에서 바라본 바다와 섬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코끝을 자극하는 매연, 그런데 그 느낌이 싫지 않다

가포동에서 산자락을 하나 넘어가면 마산 시내다. 예전의 마산시는 지난 7월 진해시와 함께 창원시로 통합이 되면서 지금은 행정구역상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 등으로 이름이 바뀐 상태다. '시'가 '구'가 됐다고 도시 자체가 축소된 것은 아니다. 널찍하고 반듯한 도로가 시내를 가로지른다. 번잡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도로 왼쪽으로 높이 올려다 보이는 산은 대산이다. 어찌된 일인지 바닷가에 접해 있는 거대 도시에 들어설 때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 대규모 아파트단지다. 장흥이 그렇고, 여수와 통영이 그랬다. 마산 역시 같은 양상이다. 대산의 산자락을 아파트들이 뒤덮고 있다. 아마도 도시가 확장되면서 새로 도시로 탈바꿈하는 지역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한 까닭일 것이다.

마산 시내 인도 겸 자전거도로. 울창한 숲길을 연상시킨다.
 마산 시내 인도 겸 자전거도로. 울창한 숲길을 연상시킨다.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마산 시내로 들어서서는 마산항까지 자전거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간다. 마산항이 가까워질수록 거리가 점점 더 복잡해진다. 도로 위에서 자동차들이 내뿜는 매연이 코끝을 자극한다. 입안에 쓴맛이 감돈다. 그런데 묘한 일이다. 그 느낌이 싫지 않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낄 수 있다. 좋다는 뜻은 아니다. 여수나 통영에서 느꼈던 것보다는 훨씬 거부감이 덜하다는 뜻이다.

통영에서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마산에서는 이 복잡하고 어수선한 거리마저 친숙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서울을 떠나면서는 한동안 길 위에서 야성을 되찾아가는 듯하더니, 오히려 여행 기간이 길어지면서 다시 도시인의 습성이 되살아나고 있다. 하긴 40년 넘게 몸에 밴 습성 아닌가? 몇 십일 도시를 떠나 있었다고 해서 말끔히 사라질 습성이 아니다.

오늘 마산에서 이 여행이 더 이상 의심할 여지없이, '떠나는 여행'에서 '되돌아가는 여행'으로 급속히 전환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90㎞, 총 누적거리는 3860㎞다. 그동안 자전거로 달려온 거리가 4000㎞에 육박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이틀 후 부산 지역에서 1만리를 넘어설 가능성이 높다. 4000㎞를 '리'로 환산하면 1만리가 된다.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이라는 제목대로라면, 이 여행은 사실상 부산에서 막을 내려야 한다.

마산 가고파 국화축제 조형물. 국화로 장신한 용. 축제가 끝나 철거를 앞두고 있다.
 마산 가고파 국화축제 조형물. 국화로 장신한 용. 축제가 끝나 철거를 앞두고 있다.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태그:#마산, #통영, #안녕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