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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현대자동차 제1공장을 점거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농성이 장기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지난 7월 "2년 이상 사내 하청업체에서 근무한 비정규직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봐야 한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정규직 전환을 주장하고 있다. 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400~500여 명(울산 현대차 공장에서 근무하는 정규직 노동자는 3만여 명, 비정규직은 8300여 명이다). 이들은 대부분 2000년대 초반부터 현대차에서 일한 경력 7~8년의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왜 비정규직 노동자가 됐고, 어떻게 살아왔을까. 두 노동자와 한 인터뷰를 1인칭으로 정리했다. <기자의 말>

고교시절부터 친구로 지낸 현대차 비정규직 박호승(가명)씨와 김세현(가명)씨는 정규직 전환을 위해 울산 현대차 1공장에서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다.
 고교시절부터 친구로 지낸 현대차 비정규직 박호승(가명)씨와 김세현(가명)씨는 정규직 전환을 위해 울산 현대차 1공장에서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다.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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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승(가명, 34) 이야기 - "내 딸이 왜 '아빠 비정규직이니?' 질문 받아야 하나" 

무척이나 더웠던 2002년 8월 어느 날이었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를 뽑는다는 광고전단지가 내가 나고 자란 울산시내 곳곳에 뿌려졌다. 나도 현대맨이 될 수 있을까? 얼마간의 기대를 갖고 광고지에 적힌 곳으로 찾아갔다.

대한민국에서 차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울산 현대차 공장이 아닌가. 면접이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반대였다. 작은 사무실에서 만난 한 관리자는 "주·야간으로 일할 수 있느냐" 등등 간단한 것만 물어봤다. 자동차 만드는데 체력 검사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그런 것도 없었다. 

나는 곧바로 현장에 투입됐다. 자동차 '실내 계기판'을 붙이는 일이었다. 일을 하면서 면접 과정이 왜 그리 짧았는지 알았다. 나는 채용이 쉽고, 해고가 간단하며, 부려먹기 용이한 비정규직이었다.

내가 무식해 그런 것도 모르고 현대맨이 된 건 아니다. 군에서 막 제대한 스물여섯 살이었고, 비정규직에 대한 인식 수준이 높지 않던 시절이었다. 비정규직이 지금처럼 많지도 않았고, 그 팍팍하고 힘겨운 삶이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돌아보면 그때 2000년대 초반은 현대자동차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빨대처럼 쭉쭉 빨아들이던 시절이었다. 현대차는 1998년 정리해고를 실시해 노동자를 대량 해고한 뒤 그 빈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채웠다.

참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현대차를 들락거렸다. 3~4일 일하다가 "못해 먹겠다"고 짐을 싸는 사람이 있었고, 1개월 뒤 월급 명세서를 확인하고 "내가 거지인가?"를 내뱉고 공장을 떠난 이들도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잔업과 특근을 해야 겨우 월급이 100만원을 넘었으니까. 떠난 비정규직의 자리는 새로운 비정규직들로 채워졌다.

나는 생산라인을 지켰다. 젊었고, 체력적으로 큰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결혼을 했고, 책임 져야 할 딸도 생겼다. 나는 자랑스런 아빠가 되고 싶었다. 2003년 여름에는 고교 시절 친구도 한 명 소개해 이곳 현대차로 데려왔다. 같은 비정규직이었지만 우린 함께 열심히 일했다. 곧 정규직이 될 수 있을 것이라 꿈꾸면서 말이다. 

그렇게 8년이 지났다. 매년 고용 계약서를 새로 쓰는 불안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고통은 일상적인 사회적 차별과 괜히 위축되는 내 마음이었다.

남들은 월급날이 기쁘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고통스럽다. 그날은 비정규직 차별을 뼛속 깊이 새기는 날이기 때문이다. 생산라인 내 자리 앞뒤 형님들은 정규직이다. 나와 똑같은 일을 한다. 아니, 솔직히 험한 일은 비정규직인 내가 도맡아 한다. 그런데 형님들의 월급은 내 월급의 약 두 배에 이른다.

우연히 형님들 월급명세서를 보게 되는 날이면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생산라인 구석에서 내 월급명세서를 펼쳐본다. 정규직의 그것과 모든 게 다르다. 저쪽에서 사람이 오면 나는 재빨리 명세서를 구겨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쪽팔리기' 때문이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가 왜 이렇게 위축되고 부끄러워해야 하나.

울산 현대차 제1공장 점거 농성을 벌인 지 벌써 9일이 지났다. 그동안 먹은 것이라고는 라면과 김밥뿐이다. 무엇보다 힘든 건 추위다. 이불 없이 맨바닥에서 자고 있다. 수도까지 끊은 회사는 당연히 히터도 끊었다. 뜨거운 밥과 따뜻한 방, 그리고 아내와 딸이 그립다.

딸은 날마다 전화해 "아빠 언제 와?"라고 묻는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딸로 태어난 딸은 초등학교 2학년 나이에 벌써 '파업'이란 말을 알고 있다. 나는 늘 "금방 간다"고 답한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이 싸움이 쉽게 끝날 리 없다는 것을. 어쩌면 아홉 살 나이에 이미 '파업'이란 말을 알고 있는 딸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아빠가 쉽게 돌아올 리 없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그냥 내려가지 않을 생각이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고용 불안이 싫다. 사회에서 "현대차에 다닙니다"라고 말하면 "비정규직인가?"라고 되물어오는 그 차별이 지긋지긋하고, 그런 질문 하나에 위축되는 내 자신이 싫다. 월급날마다 되풀이되는 고통의 사슬도 이젠 끊고 싶다.

그래, 나 비정규직 노동자다. 그런데 왜 내 딸이 친구들과 주변 어른들에게 "너네 아빠 정규직이야, 비정규직이야?"라는 질문을 받으며 살아야 하나. 이 모든 차별과 고통을 끊어내기 위해 나는 점거 농성을 시작했다.

나는 공장에서 그냥 안 나간다. 아니, 못 나간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울산 현대차 제1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고 있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울산 현대차 제1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고 있다.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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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현(가명, 34) 이야기 - 신차 소식만 들어도 우린 '목숨'을 걱정해야 한다 

2003년 무더운 어느 여름날이었다. 고교시절 친구 박호승이 전화를 해 왔다. 호승이는 현대차에서 함께 일해보자고 했다. 

그때 나는 대구의 섬유 생산업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당시 대구의 섬유 산업은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임금은 무척 낮았고, 많은 공장은 중국으로 건너갔다. 어차피 힘겨운 일상, 내가 나고 자란 울산에서 일하자는 마음으로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처음엔 아르바이트로 1개월만 일해보자는 마음이었다. 울산 현대차 생산라인에서 자동차 핸들 장착하는 일을 시작했다. 호승이와 마찬가지로 비정규직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젊었고, 미래에는 기회가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무모했던 것일까, 아니면 순진했던 것일까. 비정규직의 삶은 차별의 연속이었다. 생산라인에서는 정규직 형님들과 월급만 차이 나는 게 아니다. 험한 일, 정규직이 꺼리는 일은 모두 나 같은 비정규직이 해치워야 하는 '미션'이었다.

우린 같은 생산라인이지만 회식도 따로 해왔다. 회식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다른 방향으로 이동할 때의 그 묘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사실 지금 공장 점거 기간에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알게 모르게 많이 도와주고 있다. 하지만 평소에는 같은 공장 안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공장 밖에서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당당히 말하지 못하는 내 상황이 마음 아프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사회에서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야 하나.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울산 현대차 제1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고 있다. 제1공장 내부에 붙어 있는 종이들.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울산 현대차 제1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고 있다. 제1공장 내부에 붙어 있는 종이들.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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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서는 신차가 나오면 환호를 한다. '차 스펙'을 비교하는 글과 시승기가 올라오는 등 인터넷 공간은 그야말로 설렘으로 출렁인다. 하지만 우리 비정규직들은 신차가 나온다는 소식만 들어도 '목숨'을 걱정해야 한다.

신차가 나오면 생산이 중단되는 차가 나오기 마련이다. 가령 내가 생산하는 '액센트'가 단종됐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되면 나는 해고다. 정규직들은 다른 생산라인으로 이동하지만 비정규직은 거의 대부분 공장을 나간다.

그래서 나는 신차가 안 나왔으면 좋겠다. 신차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받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현대차 직원들은 현대차를 싸게 살 수 있지 않냐고? 그래 맞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최대 30%까지 할인된 가격으로 차를 살 수 있다. 하지만 비정규직들은 단 1%의 혜택도 없다.

그래도 현대차 비정규직이 월급은 많은 편 아니냐고? 그래 말 나온 김에 해보자. 강호돈 현대차 대표이사 부사장이 22일 전 직원에게 보낸 가정통신문에서 "사내하청 업체 근로자 4~5년차 평균 연봉은 4000만원 수준으로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올해 전국 근로자 평균 임금의 1.4배나 되는 금액"이라고 밝혔다.

요즘 유행어로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점거 농성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월급 명세서를 인증샷으로 인터넷에 올리겠다. 난 현대차에서 일한 지 7년이 넘었지만 최근 내 월급은 130만원 정도다. 보너스가 나오는 달은 100만원 정도 더 받는다. 평일 잔업과 주말 특근을 '빡시게' 뛰어 한 달에 약 300시간 노동을 해야 연봉 3000만원 조금 넘게 받을 수 있다. 

현대차 임원들, 당신들은 도대체 얼마를 받기에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이 높다고 하나. 시민단체 '함께하는시민행동'이 작년에 분석한 자료를 바탕으로 최근 <참세상>이 당신들의 연봉을 공개했다.

그에 따르면 2008년 기준, 현대차 사내 이사의 평균 연봉은 17억 300만원이다. 이는 임금노동자(정규직)의 62.3배, 비정규직의 102.9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비정규직 연봉을 102년 동안 차곡차곡 모아야 당신들의 1년 연봉이 된다. 복잡한 계산 따위 집어치우자. 그냥 당신들, 작업복 입고 월 300시간 동안 자동차 조립해 보라. 비정규직 노동의 쓴맛을 봐야 우리 처지를 알겠다면 내 작업복을 기꺼이 당신들에게 벗어주겠다.

아내는 지금 임신 7개월째다. 아내에게 돌아가고 싶다. 내가 점거하고 있는 1공장은 너무나 춥다. 친구 박호승이 내 옆에 있지만, 나는 아내에게 돌아가고 싶다. 태어날 아기를 위해 태교를 해주고 싶다. 그리고 내 아이에게 괜히 위축되는 비정규직이 아닌 당당한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나는 공장에서 그냥 안 나간다. 아니, 못 나간다.

친구 박호승과 김세현 이야기 - "꼭 함께 정규직 돼서 나간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울산 현대차 제1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고 있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울산 현대차 제1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고 있다.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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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승과 김세현은 똑같이 "그냥 안 나간다, 아니 못 나간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둘 다 "배고프고, 춥고, 가족이 그립다"고 했다. 그럼에도 둘은 "이번이 마지막 싸움"이라며 "대법원 판결이 나온 이번에 바꾸지 못하면 서러운 비정규직으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고 배수진을 쳤다.

둘은 울산에서 나고 자랐고, 고교시절부터 친구로 지냈다. 20대 중반의 나이인 2000년대 초반 현대차에 들어와 비정규직 노동자로 함께 기름밥을 먹었다. 비정규직으로 비슷한 설움과 차별을 겪었다. 결혼을 했고 아이가 생겼다. 어느덧 30대 중반의 나이가 됐다.

처음 현대차에 들어왔을 때, 둘은 비슷한 꿈을 꿨다. 30대 중반이 되면 행복한 가정을 꾸려 가족들과 따뜻하게 살 수 있으리라고. '고용 불안', '파업', '투쟁가', '공장 점거' 등은 자신들과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런 '무서운' 말들은 자신들의 삶에 끼어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비정규직의 삶이 모든 걸 바꿔 놨다. 박호승과 김세현은 최근 똑같은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귀하는 불법쟁의로 연속 무단결근 중이며 사규에 의거 징계 및 해고에 해당되며 업무 복귀가 안 될 경우 부득이 징계 절차에 착수함을 통지하오니 조속 복귀 바랍니다."

친구 박호승과 김세현은 다시 같은 꿈을 꾸고 있다. 이 점거 농성에서 승리해 꼭 정규직이 되어 밖으로 나가는 것. 자식들에게 비정규직의 굴레와 부당한 차별을 물려주지 않는 것. 인터뷰 중간, 둘은 이런 대화를 나눴다.

박호승 "2003년에 괜히 같이 일하자고 너한테 전화했다. 나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고..."
김세현 "지금은 더하지만 그 시절에 딱히 좋은 일자리가 뭐 있었나. 정규직 돼서 그동안 고생했던 거 같이 보상받자."

같은 꿈을 간직한 둘은 그날을 위해 오늘도 좁은 울산 현대차 1공장 안에서 찬 김밥을 씹고 찬바닥에 누워 쉽게 오지 않는 잠을 청하고 있다.


태그:#비정규직, #현대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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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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