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늘(22일)은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소설(小雪)입니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입동(立冬)과 눈이 많이 내린다는 대설(大雪) 사이에 드는 소설은 24절기 가운데 스무 번째 해당하는 절기이지요.

앞마당 옷걸이의 무말랭이. 무말랭이는 무슨 요리를 해도 맛있고, 다이어트에도 으뜸이라고 합니다.
 앞마당 옷걸이의 무말랭이. 무말랭이는 무슨 요리를 해도 맛있고, 다이어트에도 으뜸이라고 합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안집 아저씨가 호박된장을 담그려고 한다며 호박을 가늘게 썰어 엮고 있습니다.
 안집 아저씨가 호박된장을 담그려고 한다며 호박을 가늘게 썰어 엮고 있습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농촌에서는 말린 벼를 곳간에 쌓아 두는가 하면, 멍석에 무말랭이를 널고, 호박을 가늘고 길게 썰어 호박된장을 담그거나 오가리를 만들고, 어린 호박은 납작하게 썰어 말렸다가 정월 대보름에 호박 나물을 해먹었습니다. 

이때쯤이면 만산홍엽으로 불타오르던 단풍도 자연의 이치에 따라 색깔이 가시기 시작합니다. 머리에 흰 수건을 쓴 아주머니들과 힘차게 돌아가던 '호롱기'(탈곡기) 소리가 사라진 들녘은 을씨년스럽기만 하고, 할 일이 없어진 허수아비 아저씨들은 깊은 상념에 잠기지요. 

소설은 태양의 황경이 240°에 이르는 때로, 땅이 얼기 시작하고 살얼음이 얼고, 가끔은 햇볕이 따뜻해 소춘(小春)이라고 했고, 바람이 몹시 불어서 외출을 삼가고 특히 어촌에서는 출어를 금했다고 합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아침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기 시작하고 얼음이 어는 소설에서 대설까지 15일을 5일씩 삼 후(三候)로 구분하고, 초후(初候)에는 무지개가 걷혀서 나타나지 않고, 중후(中候)에는 천기가 올라가고 지기가 내리며, 말후(末候)에는 양기가 쇠하고 음기가 세상을 덮으면서 하늘과 땅이 막혀 겨울이 시작된다고 믿었답니다.  

옛어른들은 소설이 들어 있는 음력 10월을 '시월 상달'이라고 했습니다. 추수를 끝내고 아무 걱정 없이 지내는 달이라고 해서 '공달'로도 불렸는데요. 예로부터 수확한 햇곡식을 방아 찧어 하늘에 감사하는 풍습이 내려왔으며, 마을에서는 동제나 시제를 지내면서 1년 중에 가장 신성한 달로 여겼다고 합니다.

초가의 지붕도 새로 올리고, 겨우내 쓸 땔감과 쌀도 넉넉하게 마련해두었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을 것입니다. 밖에서는 나뭇가지 사이로 매서운 바람이 불더라도 뜨뜻한 아랫목에 둘러앉아, 화로에 고구마를 구워먹으면 신선이 따로 없지요.

겨우살이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겉절이, 그냥 먹기보다 통깨를 조금 뿌리면 고소한 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겉절이, 그냥 먹기보다 통깨를 조금 뿌리면 고소한 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소설은 본격적인 김장철로 접어드는 때이기도 합니다. 이때가 되면 사람들은 겨울에 대비해서 김장을 서두르고, 속이 꽉 들어찬 배추는 동해를 입지 않도록 하나하나 짚으로 묶어두며 서리에 약한 무는 일찍 캐어 땅에 묻어둡니다.

24절기에서는 '입동-소설-대설-동지-소한-대한'까지 3개월을 겨울로 치는데요. 음력 시월 스무날 무렵에는 강하고 매서운 바람이 일면서 날씨가 추워집니다. 농가월령가 10월령은 이때의 겨우살이 준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월은 초겨울이니 입동 소설 절기로다./ 나뭇잎 떨어지고 고니 소리 높이 난다./ 듣거라 아이들아 농사일 끝났구나./ 남의 일 생각하여 집안 일 먼저 하세./ 무 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오리라./ 앞 냇물에 깨끗이 씻어 소금 간 맞게 하소./ 고추 마늘 생강 파에 조기 김치 장아찌라/ 독 옆에 중두리요, 바탱이 항아리라/ 양지에 움막 짓고 짚에 싸 깊이 묻고/ 장다리 무 아람 한 말 수월찮게 간수하소./ 방고래 청소하고 바람벽 매흙 바르기 창호도 발라 놓고, 쥐구멍도 막으리라/ 수숫대로 울타리 치고/ 외양간에 거적 치고/ 깍짓동 묶어세우고/ 땔나무 쌓아 두소./ 우리 집 부녀들아 겨울옷 지었느냐 술 빚고 떡 하여라. (생략)

김장 배추가 들어오던 날. 거드는 꼬마를 보니까 동네 친구들과 배추를 나르며 웃고 떠들던 개구쟁이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김장 배추가 들어오던 날. 거드는 꼬마를 보니까 동네 친구들과 배추를 나르며 웃고 떠들던 개구쟁이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김장은 겨울채비의 가장 큰일이지요. 오죽하면 "김장하니 삼 동 걱정 덜었다"라고 했겠습니까? 우리 마을도 김장 품앗이를 하느라 아주머니들 발길이 바쁜데요. 소금에 절인 하얀 배추와 무가 붉은 양념으로 단장하고 맛난 젓갈과 어우러지면서 민족을 대표하는 음식, 김치로 태어납니다.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이고 신나는 일이지요.

뱃사람들을 상대했던 어머니는 김장을 다른 집에 비해 김장을 두 배 이상 했고, 겨울에 먹을 김치와 이른 봄에 먹을 김치를 나눠 담갔습니다. 절여서 평상 위에 쌓은 배추가 얼마나 높은지 까치발을 해도 뒤가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어머니는 김치를 여러 개의 독에 담아놓고, 생선을 선물로 보내오는 선주들에게 답례도 하고, 묵은 김치가 없는 집과 나눠 먹기도 했습니다. 겨울에 친구들과 놀다가 허기지면 눈 덮인 땅속의 배추 꼬리를 캐 먹으러 다니던 추억도 새롭습니다.

김장이 끝난 시골집 양지바른 담벼락이나 처마 밑에는 따사한 햇살에 말라가는 시래기들이 초겨울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적당히 말린 시래기를 넣고 끓인 된장국이나 찌개는 은근하고 개운해 함께 먹는 사람들의 정을 더욱 돈독하게 해주지요.

여름엔 보리밥에 된장, 겨울엔 쌀밥에 김치가 보약

배춧속쌈장, 노란 배춧속에 뜨거운 밥과 갈치속젓을 얹어 먹으면 초겨울의 보약이자 밥도둑이 됩니다.
 배춧속쌈장, 노란 배춧속에 뜨거운 밥과 갈치속젓을 얹어 먹으면 초겨울의 보약이자 밥도둑이 됩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김장철에는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쌀밥에 황석어 젓국에 버무린 겉절이를 얹어 먹으면 보약이 따로 없었습니다. 눈 내리는 겨울에는 잘 익은 배추김치나, 파김치, 나박김치 등이 대신해주었지요.

양기가 사방에 가득한 여름에는 엄동의 눈밭에서 자란 보리의 냉기를 취하여 모자라는 음기를 보강했습니다. 여름에 대나무 소쿠리에 담아 놓았던 보리밥을 시원한 물에 말아 된장 바른 고추를 아삭 씹으면 무더위도 어디론가 도망갔습니다. 

음기가 천지에 가득한 겨울에는 따가운 양기가 듬뿍 들어간 쌀에서 영양을 취해 음양의 조화를 이루었으니 최고의 보약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밥이 최고의 보약'이라는 말도 생겨난 모양입니다. 그러나 보리밥도 먹기 어려웠던 보릿고개 시절에는 희망사항으로 그쳐야 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보리는 음기를 지닌 곡식입니다. 해서 겨울에는 보리차 대신 옥수수 차가 더 좋고, 여름에는 보리차를 시원하게 하여 마시면 더위를 덜어줍니다. 속이 냉한 소음인들이 맥주를 마시면 장에 탈이 나서 설사를 하는 이유도 다 이런 음양의 조화가 깨어지는 탓이라고 합니다.

저도 요즘은 며칠째 집에서 쌈장과 갈치속젓을 얹은 '배춧속쌈밥'을 먹고 있는데요. 고소하고 쌈빡한 맛에 취하다보면 밥 한 공기쯤은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웁니다. 밥도둑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과학의 발달로 물자는 풍요해졌지만, 마음의 풍요는 오히려 사라져가는 것 같습니다. 24절기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수천 년 동안 날씨의 변화를 멋과 여유를 곁들여 표현하던 문화가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김장철, #소설, #밥도둑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