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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월)

화창하고 포근한 날씨다. 어떻게 된 일인지 바람도 잠잠한 편이다. 요 며칠 바람에 시달린 걸 생각하면 뜻밖이다. 기분 좋게 출발한다. 광양시에서는 해안을 따라 죽 자전거도로를 달린다. 하동군으로 들어서기 전까지, 자전거를 타면서 맛볼 수 있는 쾌적한 기분을 만끽한다.

하지만 하동군으로 들어서서는 지도를 보고도 찾아가기 힘든 길들이 계속 나타난다. 지방도로가 산과 산 사이 고개를 수시로 넘나드는데 이 길이 그 길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결국 이전처럼 지방도로를 벗어나 국도로 올라서서야 비로소 제 길을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럴 땐 지도고 뭐고, 그냥 도로에 서 있는 이정표만 보고 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은 생각마저 든다.

하동군에서 남해대교를 넘어 남해군 남해도로 들어가는 길이 꽤 힘들고 복잡하다. 자전거를 타고 찾아가는 사람의 방문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도 남해대교만 넘어서면 그때부터는 일사천리로 달려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남해대교로 들어서면서부터 잠잠하던 바람이 다시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남해도를 방문하는 첫인상이 꽤 험악해질 것 같은 예감이다.

광양시 해안 자전거도로
 광양시 해안 자전거도로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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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대교 가는 길의 해안도로
 남해대교 가는 길의 해안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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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대교
 남해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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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을 따라 19번 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이락사가 나온다. '이순신 장군 유허비'가 있는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숨을 거둔 뒤, 사람들이 이곳에 사당을 세우고 장군을 추모했다. 이락사 뒤쪽 동산을 걸어 들어가 첨망대에 올라서면 이순신 장군이 숨을 거둔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날의 격렬했던 전투는 낡은 안내판에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흔적만 남겨 놓고, 지금 그 바다는 이미 예전의 역사 같은 건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일부가 화학산업단지로 변했고 또 계속 변해가고 있는 중이다. 첨망대에 올라 그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 선조들이 유허비 세운 뜻을 알겠다. 이곳에 유허비마저 없다면, 역사학자가 아닌 이상 누가 이곳에 관심을 가질까?

나 같은 사람은 그저 노량해전이 있었다는 사실만 알고 그 해전이 벌어졌던 바다가 어디에 있는 건지는 평생 모르고 살았을 게 아닌가? 이번 여행에서 보고 듣는 게 참 많다. 책에서 보는 것만 공부가 아니다. 길 위에서도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사실 너무 많아서 다 머리에 주워 담기 어려울 정도다.

첨망대
 첨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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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도는 유독 산비탈에 일군 밭과 논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돌산도에서 본 것과 비슷한 밭과 논이다. 모두 좁은 땅 안에 산이 너무 많은 탓이다. 내 보기엔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인데, 그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농사를 지어야 하는 사람들 처지에서는 그처럼 힘들고 괴로운 삶도 없었을 것이다. 피땀으로 일군 밭과 논임에 틀림이 없다.

산비탈을 내려가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 문양이 예술이다. 일상적인 노동이 예술로 승화하는 데 수십 년,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다. 남해도의 논과 밭은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집단 창작물이다. 좀 더 세월이 지나고 나면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기념비적인 작품이 될 게 분명하다.

오후로 접어들면서 바람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그러면서 체감 온도도 급격히 떨어진다. 해가 지기 전에 일찌감치 숙소를 찾아 들어가야 한다. 다행히 남해스포츠파크를 지나서 바닷가에 여러 채의 숙박시설이 들어서 있는 것이 보인다. 오늘은 그 바닷가에 내려선다. 숙소로 들어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사이에 금방 해가 진다. 다시 싸늘한 밤이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71km, 총 누적 거리는 3252km다.

남해도의 바닷가 계단 논 1
 남해도의 바닷가 계단 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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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일(화)

바닷가라 해풍이 부는지 밤새 어디선가 문짝이 들썩이는 소리 때문에 잠을 설친다. 게다가 웃풍이 심한 탓인지 밤새 어깨가 시려서 혼난다. 이름은 '모텔'인데, 방 안 설비는 여관과 다를 게 없고, 방 안의 온도는 합판으로 벽면을 한 민박 수준도 따라가지 못한다. 방 안이라고는 하지만 한데서 자는 것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아침이 돼서 몸을 일으키는데 온몸이 찌뿌듯하다. 컨디션이 말이 아니다. 햇살이 공기를 충분히 덥힐 때를 기다렸다가 바로 짐을 싸들고 다시 길 위로 올라선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남해도로 들어서면서 고난의 연속이다. 힘이 들더라도 페달을 좀 더 세게 밟아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오늘 반짝 추위가 온다더니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자전거를 타는 내내 추위에 시달린다. 언덕을 오를 땐 어느 정도 견딜 만하다가, 언덕을 내려갈 때는 그 사이 흐른 땀이 급속히 식으면서 온몸에 한기가 스며든다. 그렇다고 속도를 늦춰 천천히 가고 싶은 기분도 아니다.

남해도 역시 돌산도 못지않게 산이 많다. 해안이 거의 대부분 산비탈이다. 그 언덕길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부는 가운데 사촌해수욕장으로 들어선다. 꽤 넓고 쾌적한 조건을 갖춘 해수욕장이다. 하지만 날이 춥고 바람이 불어서 그런지 해수욕장에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

휑한 해변을 벗어나 바닷가 한쪽에서 고구마를 썰어 말리고 있는 할머니들을 만난다. 그렇지 않아도 여기까지 오면서 길가에 죽 뿌려 놓은 고구마 절편들이 뭐에 쓰려고 그런 건지 궁금했던 차, 잘됐다. 할머니 한 분이 기계를 손으로 돌려가며 고구마를 썰고 다른 두 분은 썰어놓은 고구마들을 일일이 펴서 바닥에 늘어놓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할머니들 곁에서 고구마를 대신 썰어드리면서 이것저것 묻는다. 처음에는 '놉을 산다'는 말을 잘 못 알아들어 엉뚱한 얘기를 했다. 들어보니, 이렇게 고구마를 썰어 말리면 조합에서 거둬들여 과자 공장이나 술 공장으로 보내는 데 '놉'은 이런 일을 하는 일꾼이라는 뜻이란다. 그러면서 할머니들은 이 추위에 웬 자전거냐며 어디서 왔냐고 되묻는다. 서울에서 왔다니까 다들 놀란다.

며칠이나 걸렸냐고 묻기에 이번에는 솔직히 말씀드리지 않았다. 걱정을 살까 우려해서다. 어촌에서 물고기도 아닌 고구마를 널어 말리는 풍경이 이채롭다. 추위에 거센 바람을 맞아가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고 있는 할머니들을 남겨두고 떠나는 마음이 짠하다.

고구마를 썰어 말리는 할머니들
 고구마를 썰어 말리는 할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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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해수욕장을 나오면 다시 언덕이다. 언덕 위에서 사촌해수욕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할머니 세 분이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는 모습이 멀찍이 내려다보인다. 그 위로 내 어머니가 일하던 모습이 겹친다. 오늘 저녁엔 꼭 문자메시지 한 통이라도 넣어 드려야겠다. 우리 어머니, 요즘 집 나간 아들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다.

사촌해수욕장을 떠나 또 갈 길을 서두른다. 언덕이고 뭐고 있는 힘껏 페달을 밟는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는 새 가천마을 입구다. 마을 입구가 절벽 위에 올라서 있는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이곳에서 모진 맘 먹고 멈춰 선다. 아무리 바쁘고 경황이 없다고 해도, 가천 다랭이마을까지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다랭이마을이야말로 남해도 사람들이 산비탈에 만들어놓은 작품들 중에 최대·최고의 걸작 아닌가?

걸어 다니기도 힘든 산비탈에 집을 짓고, 산 위로 층층이 논과 밭을 쌓아올린 사람들의 힘과 의지가 놀랍다. 다랭이마을 중간 지점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마을 곳곳을 천천히 돌아다닌다. 담 너머로 집안이 들여다보이는 것은 예사고, 마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사람들이 뭘 하고 있는지 한눈에 다 들어온다.

이 마을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서 지금은 마을 전체가 관광지로 변했다. 마을에 관광객들을 위한 시설이 빼곡하다. 그렇다 보니, 마을에 마을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이 더 많이 눈에 띈다. 다랭이마을에서 내려다보는 바다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보는 사람마다 감탄사를 터트린다.

다랭이마을이 계단식 논으로만 유명해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할 수만 있었다면 어제 저녁 이곳에서 하루를 묵었어야 했다. 친근한 이미지를 주는 민박집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시골 고향집 정경이 그대로 살아 있다. 집집마다 분위기도 다 다르다. 한 마을에 이렇게 다른 특색을 갖춘 집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도 신기하다.

가천 다랭이마을
 가천 다랭이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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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도 바닷가 계단 논 2
 남해도 바닷가 계단 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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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랭이마을을 떠나 이동면으로 향해 가는 길에 월포두곡해수욕장이 나오는데 이 해수욕장이 또 이전에 보지 못했던 풍경을 보여준다. 해변의 절반이 모래사장이고, 절반은 몽돌밭인데, 그게 여수에서 보았던 만성리해수욕장과는 달리 바다 쪽 절반이 모래사장이고, 육지 쪽 절반이 몽돌밭이다. 자연의 조화가 참 다채롭다. 해변이 상당히 긴 편이다. 월포와 두곡, 두 마을에 걸쳐 있어 월포두곡해수욕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월포두곡해수욕장을 지나 용소리의 해안에서 우연히 '남해 바래지기' 한 분을 만났다. 남해도로 들어서 '남해 바래길'이라는 글자가 적힌 노란색 깃발이 휘날리는 걸 더러 봤는데, 그 길을 찾고 잇고 하면서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게 만든 사람이 바로 본인이라고 소개를 한다. 그곳에서 한동안 그가 길을 만들기 시작한 이유와 포부를 듣는다.

남해에, 가장 자연에 가까운 길을 만들고 싶다는 게 그의 희망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남해 바래길은 바닷길과 산길을 넘나들며 갯내와 더덕향이 물씬 풍기는 길, 자연이 살아 숨쉬며 사람의 머리를 맑게 해주는 길이다. 남해에 가서, 노란 깃발이 보이거든 잠시 차를 세워두고 바닷길과 산길을 걸어볼 일이다. 10여 년 넘게 남해 곳곳을 걷고 있다는 사람이 자신 있게 권하는 길이니 후회할 일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앞으로 6년여 동안에 남해 바래길을 완성해 놓을 계획이라는 그와 헤어져, 나는 다시 자전거로 열심히 산길을 오른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이럴 땐 나는 왜 그처럼 걷는 취미에 빠지지 못한 건지 살짝 후회가 된다. 오늘은 도대체 몇 개나 되는 산비탈을 오르내린 건지 모르겠다. 오후 5시 무렵, 남해도 남단에 위치한 상주해수욕장에 발을 내린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45km, 총 누적거리는 3297km다. 하루 종일 달리고 달린 거리가 평소 달리는 거리의 절반 정도다. 남해도도 참 만만치 않은 지역이다. 남해는 크게 남해도와 창선도, 두 개의 섬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창선도 북쪽 끝에 삼천포대교가 있어 섬 전체를 일주하지 않고 바로 사천시로 빠질 생각인데, 그 거리만도 족히 3일이 걸린다. 만약에 삼천포대교가 없었다면, 남해에서만 5일 이상을 머물러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월포두곡해수욕장
 월포두곡해수욕장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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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남해도, #다랭이마을, #월포두곡해수욕장, #가천마을, #계단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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