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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 동상
▲ 전태일 열사 동상 전태일 열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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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貧)한 자는 부(富)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 전태일의 1970년 초 작품 초고에서

22살의 청년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 일하고 있는 3만 명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 현실을 알리기 위해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 현장에서 분신했다. 전태일 40주기를 맞아 지난 8~9일 평화시장과 창신동 일대를 방문하였다.

서울 중구 을지로 6가 평화시장의 하루는 오전 6시에 시작한다. 청소노동자와 짐꾼들은 새벽녘 아침 이슬을 맞으며 오전 6시에 출근을 하고 커피 장수의 장사도 같은 시간에 시작된다. 오전 8시가 되면 상인들은 셔터를 올리고 개점준비를 하고, 오전 9시가 지나면 서울 지역 곳곳에 물건을 나르는 퀵서비스 노동자들이 평화시장으로 모여든다.  

하루 12시간, 지게로 짐 날라 받는 돈 7만 원

평화시장 앞에서
▲ 평화시장 앞 평화시장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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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게에 물건을 실어 평화시장 일대에 나르는 김씨는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을 한다. 하루 12시간 동안 물건을 날라 그가 손에 쥐는 일당은 7만 원 정도. 곧 있으면 환갑을 맞을 김씨이지만 점심시간을 제외하고는 그의 몸보다 큰 짐을 지게에 싣고 쉴 새 없이 계단을 오르내린다. 하지만 이 일 마저도 물량이 많은 10월과 11월이 지나면 일감이 없어 그만둬야 한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구두닦이를 시작한 박씨는 올해로 경력 20년째를 맞았다. 박씨가 평화시장에 들어온 1991년에만 해도 평화시장 2, 3층에 있던 봉제공장들이 언제부턴가 하나둘씩 자리를 옮겼다. 업주들이 봉제 작업을 하청 주는 까닭이었다. 3만 명이 되던 미싱사, 시다들은 하나 둘씩 평화시장을 떠났고 공장이 떠난 자리에는 가게들이 생겨났다.

박씨는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잘 되는 날에는 구두 50켤레 정도를 닦는다. 구두 한 켤레를 닦아 그가 손에 쥐는 돈은 2500원. 박씨는 10년 전부터 구두닦이를 그만 두고 조그마한 가게라도 얻어 장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배운 게 이거 밖에 없어서 쉽게 못 그만 둔다"며 "몸 쓰는 일이기 때문에 힘들지만, 여기라도 나오면 돈 몇 푼이라도 벌어가니까. 그만 둘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박씨의 손톱 사이에는 구두약이 잔뜩 껴 있었다.

평화시장 앞에서 19년 째 커피를 파시는 아주머니
▲ 평화시장 평화시장 앞에서 19년 째 커피를 파시는 아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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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시장에서 19년째 리어카 커피 장사를 하고 있는 한 아주머니는 오전 6시에 나와 오후 7시쯤 되면 장사를 접고 들어간다. 전에는 커피만 팔아도 한 달에 200만 원 정도는 벌 수 있었지만 평화시장의 상인들이 개인용 커피포트를 들여놓고, 커피전문점들이 속속 생기면서 매출은 반으로 줄어버렸다.

그녀는 "기술이 발달하면 뭘 해, 없는 사람들은 기술이 발달하면 먹고 살 게 없어진다"고 하소연 했다. 지금은 하루에 12시간 발품을 팔아도 월 100만원 벌기도 어렵다. 하나뿐인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시작한 일이 어느덧 19년째에 접어들었고 그 시간동안 아들은 혼자서 컸다. 아들은 우스갯소리로 엄마를 '계모'라고 부른다. 남편은 변변한 직장을 가져본 적이 없는 반 백수로 평생을 살았다. 그녀는 그렇게 600원짜리 커피를 한 잔, 두 잔 팔아 번 돈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아들은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 재임시절,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면 관광객이 늘어나 상인들 매출이 늘어날 것이라고 철썩같이 약속했다. 하지만 청계천이 복구된 이후 사람들은 오히려 청계천 밑으로 다녔다. "아들이 자리 잡고 직장도 다니는데, 커피 장사 관두지 않으시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요새 전셋값이 1억이야. 집 없으면 결혼도 못 해. 최소한 결혼자금 조금은 보태줘야 되지 않겠냐"고 답했다. 19년 간 커피장사를 한 그녀의 유일한 바람은 가족들의 건강이다.

1970년대 '시다' 역할하는 이주노동자들... 열악한 환경은 여전
 

창신동으로 옮겨간 봉제 공장들은 대부분 무허가이며, 건물이 낡고 좁아 작업환경이 열악하다
▲ 창신동 봉제 공장 창신동으로 옮겨간 봉제 공장들은 대부분 무허가이며, 건물이 낡고 좁아 작업환경이 열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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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평화시장을 떠난 봉제공장들 중 일부는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자리를 잡았다. 현재 창신동에는 5000개 이상의 봉제공장이 있으며, 그 중 절반 이상이 무허가이고,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약 500명 정도 된다고 김정호 서울의류노조 위원장이 설명했다. 창신동 봉제공장 대부분이 무허가 가내수공업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환풍기가 하나 밖에 없는 좁은 반지하 방에서 봉제작업을 하고 있었다.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은 평균적으로 오전 8시에 나와 오후 9시까지 일을 한다. 미싱을 좀 할 줄 아는 숙련공 이주노동자의 경우 월 140만 원 정도를 받지만, 재단보조를 하는 이주노동자는 90만 원에서 100만 원 정도를 받는다. 재단사일은 소규모업체 공장사장들이 주로 하고 있으며, 이주노동자들은 재단을 잡아주는 보조 역할을 주로 한다. 1970년 대 여공들로 채워졌던 '시다' 자리를 이제는 이주노동자들이 맡고 있는 것이다.

창신동 봉제 공장 중 일부는 반지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쓰레기봉지 뒤에 보이는 환풍기가 반지하 봉제공장의 열악한 작업환경을 말해주고 있다.
▲ 창신동 반지하 공장 창신동 봉제 공장 중 일부는 반지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쓰레기봉지 뒤에 보이는 환풍기가 반지하 봉제공장의 열악한 작업환경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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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문 안에 보이는 낡은 공간이 봉제공장의 작업장이다.
▲ 창신동 봉제 공장 창문 안에 보이는 낡은 공간이 봉제공장의 작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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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주체는 바뀌었지만 '시다'의 처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창신동 봉제공장의 성수기는 2월에서 4월 사이, 추석 전후 그리고 겨울옷 주문이 늘어나는 시기인 10월 말부터 12월까지이다. 성수기에는 봉제작업이 이뤄지는 반지하 방 하나에 10명 가량이 일을 하지만 비성수기에는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이 임금이 깎이거나, 쫓겨난다.

김정호 위원장은 "창신동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은 일이 많을 때는 야근수당이 없고, 일이 없을 때는 휴업수당을 받지 못하는 불안정노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9일 불안정노동을 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 창신동을 찾았지만,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은 불이익을 받을까봐 대답을 회피했다. 창신동 무허가 봉제공장은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으며, 일부 공장은 작업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이 잠겨져 있었다.

퇴직금조차 받지 못하는 '겟꽁'... "하루 빨리 그만두고 싶다"

창신동에는 여기저기 시다구함이라는 구인 광고가 붙어있다.
▲ 창신동 구인광고 창신동에는 여기저기 시다구함이라는 구인 광고가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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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경력 27년의 강만원(48)씨는 서울시 관악구 A 봉제공장에서 기획생산업자(일명: 겟꽁) 일을 하고 있다. '겟꽁'이란 의류공장에서 일한 개수대로 공임을 받는 일을 말한다. 원칙대로라면 겟꽁 일을 하는 노동자가 물건을 더 많이 생산하면 할수록 공임은 높아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겟꽁 노동자가 많이 생산할수록 회사가 물건당 주는 공임이 싸지는 역설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겟꽁 일은 근로기준법상 특수고용직노동자로 분류된다.

강만원씨는 오전 8시 30분에 출근해 오후 9시에 일을 마친다. 평균 12시간 넘게 봉제 일을 하지만 강씨가 손에 쥐는 돈은 하루 8~9만 원 정도이다. 강씨는 A 공장에서 숙련공 막내다.

강만원씨는 "공장에 40년 경력의 비정규직 미싱사도 있다"고 말했다. 27년의 봉제공장 생활은 강씨에게 근골격증, 신경통, 목 디스크를 주었다. 50대를 바라보고 있는 강씨는 "하루라도 빨리 봉제공장 겟꽁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 강씨는 사측과 퇴직금 관련 소송을 준비 중이다. 겟꽁 일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특수고용노동자로 분류돼 퇴직금 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서울의류노조에서는 97년부터 의류업에 종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기술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전문적인 기술을 습득하여 해고 후 재취업이 가능하도록 돕고있다.
▲ 기술교육 중 서울의류노조에서는 97년부터 의류업에 종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기술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전문적인 기술을 습득하여 해고 후 재취업이 가능하도록 돕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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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가회당 앞에서 22살의 청년이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여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현실을 알렸다. 이후에도 40년간 150명의 노동자가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평화시장에는 더 이상 여공들이 존재하지 않지만 아직도 이 땅의 수많은 노동자들은 여전히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구두닦이 박씨는 "죽음으로서 평화시장의 열악한 노동 현실을 알린 전태일 열사에게 경외감을 느낀다"며 "더 이상 우리사회에 열악한 노동 현실을 알리기 위해 분신하는 일이 있지 않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밝혔다.

평화시장의 밤.
▲ 평화시장의 밤 평화시장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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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그 친구가 있었기에 많은 것을 배웠다"

전태일 열사의 친구이자, 바보회 동지였던 김영문(61)씨
▲ 김영문 전태일 열사의 친구이자, 바보회 동지였던 김영문(61)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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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61)씨는 전태일 열사와 평화시장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이자, 그와 함께 바보회를 이끌었던 멤버 중 한 명이다. 9일 오전 김영문씨의 사무실에서 전태일 열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영문씨가 기억하는 전태일 열사는 어떤 분이신가요?
"참 재미있고, 명랑했던 친구야. 항상 뭔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어. 친해지고 나서야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어린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 현실을 바꾸려 한다는 걸 알았어. 공장 사람이 근로기준법 책을 들고 다니니 신기했지. 초등학교도 못 나온 우리들이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걸 안 것도 태일이 덕분이었어."

-바보회 활동을 같이 하셨는데,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기 전에 특별한 점은 없었나요?
"11월 13일 전에 모임을 갖고, 종로에서 '수잔나'라는 영화를 봤어. 여주인공이 죽는 영환가 그랬는데, 영화를 다 보고 호프에서 맥주를 마실 때 태일이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자꾸 했어. "우리 현실을 알리려면 한 셋 정도는 죽어야하지 않겠느냐" 라는 말을 했었어. 후에 일기도 보고, 책도 보면서 이 친구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평화시장의 열악한 현실을) 알리려고 하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가 분신할 때도 함께 하셨나요?
"그 때가 바보회 3차 시위였는데, 근로자들이 점심시간 끝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일 무렵에 궤짝 위에 올라가서 근로기준법을 불에 태우려고 했어. 그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재밌는 일이 있다. 1시 30분까지 모여라"고 홍보를 했지. 13일날 오후 1시 경에 집회를 하려고 나왔는데, 경찰들이 플래카드를 빼앗았어.

그 때 태일이가 잠시 가회당(현재 평화시장 입구 엘리베이터) 앞으로 내려가 있어 보라 하더니 10분 후에 가회당 앞으로 내려오더라고. 그 때만 해도 몸에 휘발유를 뿌렸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도 못 했지. 그 때 태일이랑 나와의 거리가 1m 정도 였는데, 내가 말릴 새도 없이 불을 댕겼어. 가을이라 바람도 세고 하니까 금방 불이 붙었어. 친구들이 잠바를 벗어서 몸에 불을 끄려고 하는데 안 꺼지더라구. 결국 경비실에서 가져온 소화기로 껐는데. (몸에 붙은) 불이 꺼지니 갑자기 일어섰어. 머리는 다 끄슬리고, 눈도 뒤집히고 말도 못 했지. 그 때 라디오 기자가 와서 마이크를 (전태일에게) 갔다 댔는데… 말도 잘 못 했어. 그리고 병원에 데려갔지."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이후에 어땠나요?
"죄책감이 들었어. 나와 1m 밖에 안 되는 거리에서 불을 댕겼기 때문에 막을 수 있는 거리였어. 근데 막지 못했어. 괴로웠어. 그리고 바보회가 좀 더 단결됐고, 강했다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평화시장의 열악한 현실) 알리지 않을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어."
 
-이후에 김영문씨 삶은 어땠나요?
"태일이가 분신한 다음 해(1971년)에 군대에 갔어. 제대를 하고 노조활동을 하다 전두환 정권 전인 1979년에 노조활동을 그만두고 생업으로 돌아갔지. 남은 친구들인 최종인, 임현제, 이승제, 신진철이가 계속 노조활동을 하고, 정권으로부터 탄압 받으면서 고생을 많이 했지."

-전태일 정신은 선생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그 친구가 있었기에 살면서 많은 것을 배웠어. 우리가 사실 공부를 제대로 못했지. 초등학교도 졸업을 못 했으니까. 리영희 선생, 장기표 선생, 조영래 변호사도 태일이 덕분에 만날 수 있었지. 그 친구가 죽음으로서 알리려고 했던 것, 말했던 것을 봤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해도 강하게 살아 남았어."

김영문(61)씨는 1981년 평화시장에 작은 공장을 열었고, 현재 MK 패션산업발전협회 수석이사로 재직 중이다. 


태그:#전태일, #평화시장 , #봉제공장,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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