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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4일(일)


남해안에 호우주의보가 내려졌다. 밤새 창 밖에 비 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침이 되어도 그치지 않는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비가 내릴지 알 수 없다. 평일도 아닌 주말, 일요일에 비 맞으며 자전거를 타는 건 생각만 해도 처량하다. 남들이 보기엔 또 얼마나 애처로워 보일까?


오늘은 도양읍에서 머무르고, 내일 아침 다시 출발하기로 한다. 일단 달리기를 포기하고 나니까 마음은 편하다. 편히 쉬면서 그동안 못 다한 일들을 마저 다 해치울 생각이다. 이틀치 원고가 밀려 있다. 가능하면 오늘 작성을 끝내 놓아야 한다. 그동안 찍어 놓은 사진이 거의 포화 상태다. 컴퓨터 용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 꼭 필요한 사진이 아니면 모두 삭제를 해야 한다.


그런데 사진은 손도 못 대고 밀린 원고를 작성하는 데만 하루가 다 가버린다. 어느새 해가 지더니, 다시 어제 이곳에 도착했던 때와 똑같은 상황을 맞는다. 어떻게 된 게 자전거를 탈 때보다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 같다. 이런 상태로 편히 쉴 생각을 하다니 꿈도 야무지다. 편히 쉰 건지 빡세게 일한 건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상태로 하루를 보낸다. 쉬는 게, 쉬는 게 아니다.

 

자전거타기 좋은 날, 자전거 타기 좋은 길

 

 

10월 25일(월)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분다. 창 밖으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강풍이 불고 있는 게 틀림없다.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부느냐에 따라 오늘의 운이 결정된다. 긴장 반, 기대 반이다.


다행히 순풍이다. 오늘은 고흥반도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달려가야 하는데, 바람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쪽을 향해 불고 있다. 잘 하면 오늘 하루 종일 바람의 힘을 이용해 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살다 보니 이런 행운도 다 생긴다.


지난밤 일기예보에 비가 오고 나서는 기온이 많이 떨어져 날씨가 추워질 거라고 했는데, 날씨도 생각했던 것보다 따뜻하다. 행운이 겹친 셈이다. 이럴 땐 바람 방향이 바뀌기 전에 서둘러 떠나야 한다. 세상에 바람처럼 변덕이 심한 게 없다. 못 믿을 게 바람이다. 행운이 언제 불운으로 바뀔지 모른다.


고흥반도에서는 대부분의 해안을 77번 국도가 지나간다. 오래 전에 만들어진 국도라 갓길이 없는 구간이 많고, 도로 사정도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그렇지만, 방향 표시가 분명해 길을 잃을 염려가 없고 오가는 차량이 드물어 꽤 쾌적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연륙교로 연결이 되어 있는 지죽도에서부터 외나로도가 있는 구간까지는 모두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이 되어 있어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한 마디로 자전거타기 좋은 날, 자전거 타기 좋은 길을 만난 셈이다.


녹동항을 출발해 바로 국도로 올라선다. 한동안 단조로운 풍경이 이어진다. 해안을 조금만 벗어나도 어디나 똑같은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간척지를 이용해 만든 논이 끝없이 펼쳐진다. 방조제라고 다른 지역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이곳의 논과 방조제는 남다른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오마방조제에 숨은 나환자들의 아픔

 

오마방조제 제방 끝에서, 보기 드물게 커다란 안내판을 발견한다. 그 안내판에 초기 이 방조제를 만들 때의 아픈 역사가 기록이 되어 있다. 1962년, 군부가 정권을 잡은 직후다. 방조제를 건설하던 초기, 소록도에 수용 중이던 음성나환자들을 동원했다.


간척지가 만들어지면 그곳에 음성나환자들을 위한 정착촌을 만들어준다는 조건을 달았다. 나환자들에게 섬을 떠나 육지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것이다. 방조제를 쌓는 데 나환자들이 큰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간척지에 나환자들을 정착시킨다는 사실이 지역 주민들에게 알려지면서 심한 반발에 부딪혔다.


결국 작업은 중단됐고, 나환자들은 다시 소록도로 돌아갔다. 국가가 주도하는 건설 사업에 음성나환자들을 동원했던 역사도 그렇고, 나환자라는 이유로 평생 섬에 갇혀 살아야 했던 역사 역시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당시엔 그런 폭력이 일상적으로 자행되고 있었다.


오마방조제 위에 서서 간척지를 수놓고 있는 누런 논을 내려다본다. 간척지에 소록도의 한과 눈물이 배어 있다. 이곳의 간척지에서 생산된 쌀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소록도가 뿌린 차가운 눈물이 따뜻한 밥알이 되어 매일 누군가의 밥상 위로 올라갔다. 소록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까마득히 먼 곳에 있는 섬이 아니었다.


하동마을에서 지죽도 가는 길로 들어선다. 이곳에서부터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역이다. 이미 풍남항을 지나면서부터 해안 풍경이 남달라 보였다. 절벽 위 해안도로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절경이다. 그 풍경이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접어들고 나서는 지죽도에서 방점을 찍는다.

 

타이어 바람 빠지는 소리에...


지죽대교 위에서 지죽도와 죽도가 한꺼번에 내려다보인다. 그 풍경이 무척 아름답다. 그러다 지죽도의 끝, 지죽포구에서 건너다보는 죽도 풍경에 그만 마음을 빼앗긴다. 지죽포구 앞에 떠 있는 작은 섬 죽도에 붉은 지붕을 이고 선 집들이 마치 거대한 바위 위에 단단히 흡착한 따개비들 같이 정겹고 예쁘다.


바람은 거칠게 불고 파도는 높아, 죽도 발아래 넘실거리는 바닷물이 금방이라도 붉은 지붕 따개비들을 한꺼번에 휩쓸어버릴 것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하지만 그 따개비들을 한데 모아 감싸 안은 섬은 그런 걱정 말라는 듯 의연한 모습이다.

 

나로대교를 넘어 다시 내나로도로 들어가는 길의 바닷가 풍경 역시 끝없이 감탄사를 늘어놓게 만든다. 내나로도의 바닷가 풍경이 아기자기하고 우아한 멋을 가진 풍경이라면, 내나로도에서 바라다보는 먼 바다의 아스라한 풍경은 웅장하고 시원한 멋이 있다. 거의 모든 풍경이 카메라에 담으려 해도 한 컷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넓고 크다. 그런 장면이 수시로 나타나 갈 길 바쁜 내 발목을 붙잡는다.

 

 

나로대교를 넘기 직전에 다시 펑크가 난다. 나로대교를 앞두고는 '전망좋은곳 표지판을 보고 방향을 꺾는데 의외로 가파른 언덕이 나타난다. 바람이 또 어찌나 거세게 불던지, 언덕 위로 낙엽이 우루루 쓸려 올라간다. 그 광경을 보면서 괜히 올라가나 싶었다.


언덕을 거의 다 올라갔을 무렵에 뾰족한 가시들이 나 있는 나뭇가지들이 길바닥에 떨어져 여러 개 나뒹구는 걸 보았다. 다 피해 갔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하질 못했던 모양이다. 나무 가시 하나가 타이어를 뚫고 들어왔다. 가시를 뽑아내자 바람 빠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마치 가슴이 무너지는 소리 같다.

 

곱배기 돈가스 내온 아주머니 말에 코끝이 '찡'

참 난감하다. 해는 지려 하고 기온은 점점 더 떨어지는데 이런 낭패가 없다. 그 자리에서 펑크를 수리해야 하는데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일단 바퀴가 구를 수 있는 데까지 굴러가 보기로 하고 다시 출발한다. 하지만 앞바퀴가 탄력을 잃으면서 핸들 조정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자전거가 흔들리는 걸 느낄 수 있다. 가능하면 빨리 숙박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그 와중에도 눈앞에 나타나는 멋진 풍경을 놓치지 않는다.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앞바퀴 공기는 계속 빠져나가고 있고 사진은 찍어야겠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결국 숙박업소는 찾지도 못하고, 길가에 주저앉아 펑크를 수리한다. 죽을 맛이다. 흙먼지를 몰아오는 바람에, 자동차 소리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나무 가시를 그냥 뽑아버리는 바람에 튜브에 구멍 난 곳을 찾을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예비 튜브로 교체한다. 펑크만 벌써 네 번째다. 풍경에 넋을 놓고 있다가 마지막에 펑크에 발목이 잡혀, 오늘은 결국 내나로도에 주저앉는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74㎞, 총 누적거리는 2736㎞다.

 

이날 밤 내가 묵은 숙박업소의 아주머니께서 '추운데 혼자서 고생이 많다. 하루 종일 허기가 졌을 것 같다'며 돈가스 양을 곱으로 내왔다. 나를 보니,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 생각이 난단다. 그 말을 들으면서 왜 그렇게 코끝이 찡한지 모르겠다.


텔레비전에서 내일은 남해안 일대에 한파주의보가 내려졌다는 소식이 흘러나온다. 게다가 강풍이 불어 체감온도가 뚝 떨어질 거라는 예보다. 평년 기온에서 10도 가량 더 떨어질 거라는데 걱정이다. 겨울이 생각보다도 더 빨리 오고 있다. 겨울옷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밤새 바람이 하늘을 쓸고 지나가는 소리에 뒤척인다. 몸은 피곤한데 잠 속에 깊이 빠져들지 못하고 있다. 내나로도의 잠 못 드는 밤이다.


태그:#오마방조제, #내나로도, #소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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