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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안면도 반핵항쟁 1990년 11월 8일 안면도 핵폐기물처리장 설치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안면읍 터미널에 모여 반대운동을 펼쳤다.
▲ 11.8 안면도 반핵항쟁 1990년 11월 8일 안면도 핵폐기물처리장 설치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안면읍 터미널에 모여 반대운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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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를 대표하는 '광주민주화운동'은 대중에게 잘 알려졌지만, 1990년 충남 태안군 안면도 지역에서 일어난 '반핵운동'은 환경운동과 민주항쟁 등의 역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에도 기억하는 이들이 적다.

반핵운동사에 굵은 획을 그은 '11·8 안면도 반핵항쟁'은 노태우 정권 치하의 군사독재시절에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 추진에 반발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들고 일어나 펼친 반대운동으로 '제2의 광주항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당시 정부는 주민들의 의견 수렴과정도 거치지 않고 비민주적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핵폐기물처리장 부지선정도 밀실에서 암묵적으로 진행해 주민들의 원성을 샀다. 불투명한 불투명한 행정으로 주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한 정부 때문에, 결국 유혈사태로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안면도 반핵운동이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때문에 안면도 반핵운동을 '사태'와 '사건', '투쟁', '시위' 등과 같이 일반적이고 다소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표현보다는 '항쟁'이라고 부르는 게 어울린다는 것이 주민들의 주장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1990년 11월 3일 <한겨례신문>을 포함해 국내 신문 4곳에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에 관한 기사가 일제히 실렸다. 내용인 즉, 정부가 원전 등에서 발생하는 방사성폐기물을 영구 보존하기 위한 처분장을 충남 안면도 일대에 건설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충남도와 최종 협의 중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당시 과학기술처는 1995년 12월까지 짓기로 한 중·저준위 핵폐기물 영구처분장의 건설 장소를 안면도로 결정하고, 충남도와 협의를 거쳐 현지에서 150만 평의 부지 매입을 거의 끝냈다고도 덧붙였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금까지 핵폐기물의 영구처분장으로 타당성 조사를 해오던 경북 영덕, 영일, 운진군의 경우 주민들의 반대가 극심해 처분장 건설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 안면도 고남면 일대에 핵폐기물처분장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반핵항쟁, '전쟁터 방불' 5일간의 드라마

안면도 반핵항쟁 일지 1990년 11월 3일 국내 조간신문에서 안면도 핵폐기물처리장 건설에 대한 보도가 이어져 5일동안 전쟁터를 방불케 할정도의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 안면도 반핵항쟁 일지 1990년 11월 3일 국내 조간신문에서 안면도 핵폐기물처리장 건설에 대한 보도가 이어져 5일동안 전쟁터를 방불케 할정도의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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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1월 3일 오전. 이 같은 소식이 안면도 일대에 삽시간에 퍼지자 주민들은 비교적 믿을 만한 출향인을 대상으로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에 나섰고 '안면도=핵기물처리장 설치'의 기정사실화를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충남도는 "당국과 협의 사실 없다"고 부인한다.

이튿날 재차 핵폐기물처리장이 안면도에 건설될 것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자 주민들은 앞서 언론발표에 성명서를 내고 반대운동에 들어간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과 함께 안면도 핵폐기장반대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반핵항쟁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후 11월 5일 대다수의 주민들이 참여한 핵폐기물처분장 결사반대 투쟁위원회로 조직을 확대한다.

이처럼 첫 반핵모임이 열린 후 불과 이틀 만에 제법 몸집이 큰 조직이 결성된 배경에는 1990년 11월 9일 열리는 원자력위원회에서 안면도 핵폐기물처리장 건설이 공식적으로 결정되게끔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핵항쟁이 펼쳐진 3일째 되는 5일. 주민 1000여 명은 주민동의 없는 핵폐기처리장 건설계획을 즉각 취소하라고 정부에 요구하며 안면읍 터미널에서 자연휴양림 조성공사 현장인 조개산까지 약 3km의 가두시위를 벌였다.

또 안면읍 이장단 28명과 고남면 이장단 14명, 새마을지도자 등이 집단으로 사표를 제출했다. 뿐만 아니라, 안면읍사무소와 고남면사무소 등 공공기관 직원들도 가슴에 '웬말이냐 핵폐기장'이란 문구가 적힌 검은색 리본을 달고 반핵항쟁에 동참해, 인구주택총조사 등 일반 업무가 마비됐다.

4일째인 6일에는 안면도내 17개 초·중·고교생의 45%에 해당하는 1500여 명이 등교를 거부한 채 반대운동에 동참했는데 이중 안면고의 경우 전체 670명의 학생이 모두 시위에 참여했다.

사실상 첫 집회이기도 했던 이날 '안면도 핵폐기물처리장 결사 저지대회'에 참여한 주민은 5000여 명. 이들은 안면읍 터미널에서 집회시위를 열고 연륙교까지 약 10km 구간에 걸쳐 가두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연륙교에서 전투경찰 5개 중대 1000여 명이 방패를 들고 최루탄을 발사해 시위대는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주민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이날 집회는 투쟁위원장이 정근모 과기처장관과의 전화통화 끝에 당일 KBS <뉴스9>에 핵폐기물처리장 백지화를 언급하는 것을 약속하면서 해산되었다. 허나 당일 정근모 장관이 "안면도의 서해과학산업연구단지에 들어설 원자력 제2연구소는 핵폐기물처분장이 아니"라고 해명하면서 주민들의 반감은 더욱 커졌다.

특히 앞서 열린 시위현장에서 지역 국회의원인 박태권 의원(민자당)이 연설을 통해 핵폐기물처리장 설치가 아닌 과기처가 발표한 '서해과학연구단지'라고 주장하며 주민들을 설득하려 하다가 격분한 주민들에 의해 쫓겨나기도 했다.

5일째인 11월 7일. 투쟁위 지도부가 정근모 과기처 장관과 심대평 충남지사 면담을 떠나 서해연구단지 조성계획 발표는 핵폐기장 건설을 위한 은폐행위라고 지적하고 반대의사를 밝혔다.

이에 과기처는 투쟁위 지도부에 끝내 핵폐기물처리장 건설 사실을 시인하였으나 그 책임을 충남도에 떠넘긴다. 그러나 충남도는 여전히 종전과 같은 대덕단지와 비슷한 연구시설을 유치하는 것이라고 투쟁위 지도부를 설득했다.

격분한 시위대 안면도 핵폐기물처리장 설치 반대운동 중 격분한 시위대는 자연휴양림 공사 현장 사무소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 격분한 시위대 안면도 핵폐기물처리장 설치 반대운동 중 격분한 시위대는 자연휴양림 공사 현장 사무소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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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결과 의구심만 커진 투쟁위 지도부는 안면도 핵폐기장처리장 설치에 확신을 갖고 안면읍 버스터미널 광장에서 반대시위를 하고 있는 주민들에게 이 같은 내용을 통보한다. 이후 대대적인 반대집회가 진행돼 읍면사무소가 주민들에게 점거되고 마을별 질서반도 편성해 조직을 더욱 견고하게 다졌다.

마침내 11월 8일. 안면읍 버스터미널 광장에 모인 1만5000여 명의 주민들은 '핵폐기물처분장 설치 결사반대 궐기대회'를 열었다. 안면도 소재 초중고교 3000여 명이 등교를 거부하고 집회에 참여했으며, 주민 2000여 명은 전경의 저지선을 뚫고 집회시위 장소인 안면읍 터미널로 모여들었다.

뜻하지 않게 과격시위로 확대된 것은 시위대가 상여를 메고 조개산 자연휴양림 공사장 현장사무소에 도착하면서부터다. 시위대는 현장사무소를 불태우고 중장비를 빼앗았다. 앞서, 또 다른 현장에서는 당시 안면지서장으로 부인한 안아무개 경위의 승용차가 방화로 전소되는가 하면, 집회 동향을 감시하던 서산경찰서 정보과 형사 등 공무원 6명이 주민들에게 발각되면서 격앙된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러나 전경 23개 중대 3500여 명이 투입돼 진압작전이 펼쳐지면서 시위행렬이 뿔뿔이 흩어진다. 이후 시위대는 안면읍 한전 앞에서 미리 준비했던 드럼통과 가스통, 폐타이어 등으로 방어벽을 설치하고 앞서 붙잡은 공무원 6명의 옷을 속옷만 남긴 채 벗긴 뒤 휘발유를 뿌린 바리케이드의 드럼통 위에 묶에 세워놓는 것으로 더 이상의 경찰 진압을 막는다.

경찰 진압과정에서 격분한 시위대는 안면지서를 불태우는 것으로 앙갚음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경찰은 바리케이드 위 공무원들이 헬기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진 뒤에는 최루탄을 발사하고 다시 진압에 나선다. 이에 시위대는 화염병으로 맞섰고, 안면도 일대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아비규환에 빠진다.

제2의 반핵운동 핵폐기물처리장 설치사업 총괄을 해오던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설 원자력환경관리센터가 안면도 지역 주민들 중 유치찬성자를 확대 꾀하기 위해 은밀히 유치작업을 벌여온 사실이 1992년 5월 16일 현대장 여관 사건으로 공개됐다.
▲ 제2의 반핵운동 핵폐기물처리장 설치사업 총괄을 해오던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설 원자력환경관리센터가 안면도 지역 주민들 중 유치찬성자를 확대 꾀하기 위해 은밀히 유치작업을 벌여온 사실이 1992년 5월 16일 현대장 여관 사건으로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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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장 여관 사건, '제2 반핵항쟁'으로 이어져

이처럼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자 정부는 이날 저녁 안면도 핵폐기처리장 설치에 대해 전면 백지화를 선언한다. 하지만 의구심을 떨쳐 벌릴 수 없었던 주민들은 계속해서 반대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던 중 1992년 5월 16일 '현대장 여관 사건'이 발생하면서 안면도 지역에 다시 대규모 반핵항쟁의 불씨가 지펴진다.

현대장 여관 사건은 당시 핵폐기물처리장 설치사업을 총괄하고 있던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설 원자력환경관리센터가 안면도 지역의 주민들 중 유치찬성자 확대를 꾀하기 위해 마을별로 은밀히 유치작업을 벌여온 사실이 드러난 사건.

당시 투쟁위는 주민제보로 원자력환경관리센터 직원이 묵고 있던 서산지역의 현대장 여관을 급습해 이들이 갖고 있던 서류를 빼앗아 공개했다. 이 서류에는 주민접대에 사용한 대전·유성 지역의 술집 명단, 안면도지역 홍보팀 명단, 유치찬성 서명 연명부 및 반핵대책지원반 활동 등이 담겨져 있었다.

서류가 공개되자 앞서 안면도 핵폐기물처리장 설치 백지화를 선언했던 정부에 대한 불신은 제2차 반핵항쟁으로 번졌고, 이듬해 1월 유치찬성활동을 벌이던 주민이 양심선언을 통해 핵폐기물처리장을 안면도에 유치해달라는 신청서를 조작했다고 양심선언하기도 했다.

이에 과기처가 기자회견을 통해 안면도 지역을 핵폐기물처리장 건설 검토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하면서 반대운동은 시나브로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이후 1994년 12월 정부가 옹진군 굴업도에 핵폐기물처리장을 건설할 것을 최종 확정·발표하면서 안면도 반핵항쟁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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