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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일회 생일 날
 팔십일회 생일 날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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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아배야 밤새 고민해 봤는디 아무래도 안디것다.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여기서 살어야 것어. 아버지도 아직은 그리 심허지 않고......"

어머니 전화를 받고 한 번 더 설득할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어머니 황소고집을 익히 아는 터, 그 어떤 말로 설득해도 통하지 않을 성 싶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고민에 빠졌다. 이를 어찌 해야 하나!

그날은 부모님이 살고 있는 고향집 임대 계약을 하는 날이었다. 오전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으니 고민할 시간도 그리 많지 않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날 계약하기로 약속한 사람한테 전화해서 없던 일로 하자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무래도 어머니가 고향을 떠날 준비가 되지 않았나 봅니다. 갑자기 마음이 바뀌셨네요. 그냥 살겠답니다. 이거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계약금이 오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약속을 한 것인데..."

"그거 참, 어쩔 수 없지요. 마침 약속 장소로 출발하려던 참인데...평생 살던 고향을 떠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요. 혹시 어머니 마음이 바뀌면 연락 주세요."

화를 내면 어쩌나 하고 내심 걱정 했는데 다행이었다. 돈이 오가지 않았을 뿐 이미 임대 계약을 한 것과 진배없는 상황이어서 통화를 끝내고 나서도 미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팔순이 훌쩍 넘은 부모님을 도시로 모셔와 함께 살려던 야심찬 계획이 또 다시 물 건너가게 됐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거대한 양로원 같은 고향 마을(충남 예산)에 살고 계시다. 아주 오래 전 애기 울음소리가 끊겼고 지금은 노인들만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늙은 동네다. 아버지는 몇 년 전부터 치매 일종인 '진행성핵산마비' 라는 병에 시달리고 있고 어머니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병원에 들러야 할 정도로 골골하신다.

부모님을 도시로 모시려는 계획을 세운 것은 바로 이런 이유다.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가 혼자 돌아다니다가 혹시 사고를 당하는 건 아닌지, 골골하던 어머니가 갑자기 크게 아픈 것은 아닌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까이서 보살필 수 있고 병원도 가까이 있는 도시로 옮겨서 함께 살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거대한 양로원 같은 고향 마을

아버지는 이미 오래 전에 찬성했다. 문제는 어머니다. 어머니는 벌써 몇 년 째 이랬다 저랬다 하신다.

어딘가 많이 편찮으시면 "그래 이제 더 이상 농사일은 못 할 것 같아, 어디 아프지 않은 데가 있어야지" 하면서 내 결정에 따른다고 하신다. 하지만 그때뿐, 아픈 몸을 좀 추스르고 나면 어디서 들었는지 '며느리 괴담(며느리에게 학대받는 시어머니 이야기)'을 늘어놓으며 고향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신다.

올해는 더 이상 물러 설 수는 없었다. 아버지 병세가 심해져 어머니 혼자서는 병수발을 할 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때론 저러다가 두 노인네가 한꺼번에 돌아가시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올 추석 날 즈음에는 작심을 하고 어머니를 설득, 가까스로 성공해서 확답을 받았다. 그 다음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했다.

부모님이 살고 있는 집을 정리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도시는 집 없는 서민들이 많아서 '전세대란' 이 일어나지만 농촌은 그냥 와서 살면서 집만 관리해 달라고 해도 맡아 줄 사람이 없다.  

다행히 이 문제는 고향마을 마당발로 통하는 친구 녀석이 있어서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 친구는 집도 맡아서 관리해 주고 적은 금액이지만 월세도 준다는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받은 날이 바로 소개받은 사람과 임대 계약을 하는 날 아침이었다. 밤새워 고민을 하던 끝에 어머니는 마음을 굳히고 아침 댓바람에 내게 전화한 것이다. 그냥 눌러 살기로 했으니 임대 계약하지 말라고. 

도시는 전세대란, 농촌은 집을 거저 빌려줘도...

어머니를 다시 설득할 엄두를 내지 못한 이유는, 앞에서 밝힌 대로 황소 같은 고집을 꺾을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난 확신이 없었다. 내가 내린 결정이 최선이라는 확신이.

아버지는 그 동네에서 나서 자랐고 거의 평생을 그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어머니도 마찬가지. 고향마을과 약 5키로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고, 스물다섯에 아버지와 결혼해서 몇 년 후부터 그 마을에서 살았으니, 지금 살고 있는 마을이 고향인 셈이다.

그렇게 팔십 평생을 고향에서만 살아온 노인들이 과연 물 설고 낯선 타향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인지, 다행히 적응하더라도 고향 마을에서 사는 것보다 행복 할 수 있을 것인지 확신이 없었다.

이 고민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난 하루에도 몇 번씩 갈등한다. 다시 어머니를 설득해 볼까, 아니야 불안하더라도 그냥 고향집에 사시는 게 나을 것 같아 하고.

부모님이 지금 살고 계신 곳이 내 고향이다. 그 곳에서 태어났고 중학교 때까지 그 곳을 벗어난 본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난 고향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사춘기 때부터 시작된 오랜 타향살이 탓이다.

고향은 흔히들 따뜻하다고 한다. 하지만 난 그 느낌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고향을 떠난 이후, 모처럼 고향집에 가면 따뜻한 느낌은 없고 심심하기만 했다. 농촌은 도시에 비해 느리고 변화가 없다. 또 볼거리도 놀거리도 없다. 그래서 단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도시로 내 빼고는 했다.

그래서 난 더 갈등한다. 고향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팔십 평생을 고향에서만 살아온 부모님에게 고향땅이 어떤 의미인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덧붙이는 글 | 안양뉴스



태그:#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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