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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기간 내내 한 달이 넘는 동안 이 하나의 의자를 안방 겸 거실 겸 침대 겸 쉼터로 삼아야 했던 어머니
 공사기간 내내 한 달이 넘는 동안 이 하나의 의자를 안방 겸 거실 겸 침대 겸 쉼터로 삼아야 했던 어머니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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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해도 내가 참 많이 미련하다. 사람이 미련해도 이런 식으로 미련하면 동지를 규합하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하다. 높은 곳과 낮은 곳의 차이를 없애고 수평으로 하자면 높은 곳과 낮은 곳이 만나는 지점에서 높은 곳을 깎아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 이 얼마나 미련한가.

돌아보면 정말로 그렇다. 문턱 하나만 없애면 낮은 부엌과 높은 안방이 수평으로 나란하게 될 거라는 지극히 단순한 발상으로 공사를 시작했었다. 그 기간은 길어야 보름 정도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뭐냐. 하나를 뜯어내고 나니 저것을 뜯어야 하고, 저것을 뜯고 나서 보면 또 그 뒤에 있는 것을 뜯어내야 하는 상황이 잇달아 반복되면서 뜯어내는 작업으로만 보름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그 바람에 어머니는 날마다 긴 의자 하나를 소파 겸 침대 겸 거실 겸 안방으로 삼아야 하는 감옥 아닌 감옥을 살게 되었다. 그 기간이 무려 한 달을 넘어 두 달째다. 애당초 어머니의 편의를 위한다고 시작한 일이었다. 거동이 몹시 불편해진 어머니의 거동을 편안하게 하자고 시작한 일이 지금은 거꾸로 어머니의 불편을 가중시키고 있는 형국이니 이게 뭐냐.

뜬금없이 베토벤이 생각난다. 베토벤의 교향곡 가운데서도 저 유명한 제5번 '운명'. 하나의 주제가 하나로는 마땅찮다는 듯 이렇게 저렇게 자꾸 반복 변주되면서 길어지고 넓어지고 무거워지고 마침내는 지구 전체를, 아니 우주 전체를 부둥켜안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그 음악적 장치를 내가 평소에 좋아하기는 했지만, 이 판국에 그것이 생각나는 까닭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높이가 80센티밖에 안 되는 부엌문
 높이가 80센티밖에 안 되는 부엌문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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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둥에 작은 문짝이 희귀해서 뜯어내지 못했던 집

처음 이 집을 사서 왔을 때 눈길을 끄는 게 둘 있었다. 옆에서 사람들은 천석꾼네 집을 사서 왔으니 너도 곧 천석꾼 부자가 될 거라는 둥 덕담을 건네고 있었지만, 천석꾼이나마 내 귀에 그런 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고 눈만 번쩍번쩍 빛을 내고 있었다. 세상에 살다 살다 이런 집은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더러 보기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어쨌든 처음 보는 집이었다.

대들보가 거의 한 아름이나 되는 집, 이런 집을 내가 언제 보았던가? 없었다. 적어도 일반 가옥에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연륜이 깊은 사찰이나 서원 혹은 사당 같은 데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일반 주택에서는 매우 희귀한 일이었다. 대들보가 그렇게 크다 보니 서까래는 내가 어린 시절에 살던 집의 기둥을 연상케 했다. 마룻장 또한 일일이 홈을 파서 정교하게 집어넣는 공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너무도 아까워서 도저히 뜯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두기로 했다. 처음에는 모두 뜯어내는 방식의 대대적인 수리를 생각하고 집을 샀었지만 아주 간단하게 화장실과 보일러 시설만 추가하는 선에서 그치고 만 것이었다. 보일러도 방을 뜯어내고 공사를 한 것이 아니라 애초의 방바닥 위에 그냥 깔기만 했다.

또 하나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부엌문이었다. 집의 모든 문들이 큼직큼직하고 쌍으로 되어 있는데 오직 하나 부엌문만은 예외였다. 외짝문에 높이는 겨우 '에게~'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의 80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찌들어지게 가난했던 내 어린 시절의 우리 집도 부엌문이 그렇게 작지는 않았다. 도대체 아름드리 대들보를 사용할 정도의 스케일을 가진 집에 이토록 작은 부엌문을 달아놓은 까닭은 무엇인가. 이것이 말해주는 이야기는 뭐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보았지만 답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오는 사람마다 의견을 물어보았다. 어떤 사람은 전형적인 남존여비 사상에 기초한 것 아니겠느냐고, 뻔한 질문을 왜 하느냐는 투로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여자가 밥상을 들고 들어올 때마다 허리를 90도로 구부릴 수 있게끔 구조적으로 장치를 한 것이라는데 글쎄, 아주 엉터리는 아니라 해도 썩 그렇게 와 닿는 추리는 아니었다. 다른 또 한 사람은 부엌에서 찬바람이 많이 들어오니까 그런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더 말이 안 되었다. 부엌은 마루 쪽에 비하면 오히려 온기가 더 많은 곳이었다. 찬바람을 피할 목적이라면 부엌문이 아니라 마루 쪽의 문이 작아야 말이 되는 것이다.

"야, 이것은 중요한 민속자료다. 보존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그 작은 문짝은 온전한 형태로 보존되게 되었다. 문짝은 물론 문틀도 털끝 하나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집수리를 하다 보니 부엌과 방의 높이 차이가 무려 40센티나 되었다. 이 차이가 훗날 어머니를 와당탕 소리로 요란하게 굴러떨어지게 하는 등 심한 고통의 씨앗이 될 줄이야, 그때는 정말이지 꿈에서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민속자료를 폐기처분한 뒤에야 그 뜻을 알았다

그 작은 문짝을 온전한 형태로 보존한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시의 큰 문을 오랫동안 드나들었던 탓인지 작은 문에는 도대체가 적응이 안 되었다. 들어가면서도 쿵, 나오면서도 쿵, 하루에도 십수 번씩 쿵, 쿵 하다 보니 이마가 성할 틈이 없었고, 잠에서 막 깬 뒤에는 부엌으로 나오다가 그만 허당을 딛고 굴러떨어지기 일쑤였다. 찾아오는 손님들의 원성 또한 대단했다. "먼놈의 집구석이 허우대는 멀쩡한데 속내는 이 모양"이냐는 둥, "다시는 이놈의 집구석에 발걸음을 안 한다"는 둥 저주와 악담이 끊이질 않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아직 마음에 여유가 넉넉했다. 손님들이야 불평을 하건 말건, 악담을 퍼부어대건 말건 내 나름의 커다란 공부를 하고 있다는 내심의 여유가 있었기에 하루에도 몇 번씩 이마를 부딪치면서도 문짝을 뜯어내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치매 진단을 받은 어머니를 모셔오면서부터 '야, 이거 문짝이 문제로구나' 하는 생각이 가끔 한 번씩 들기 시작하더니, 서너 달 전부터 어머니의 거동이 매우 불편해지면서부터는 '야, 이거 문짝이 정말 큰 문제로구나' 하는 소리가 내 입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나오고 있었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 자신이 민속자료로 지정한 문짝을 없애기로 안타까운 결심을 하고 추석 다음 날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뭐냐. 너무나도 뜻밖의, 생각지도 않았던 문제의 열쇠가 방바닥 속에 숨겨져 있었다. 구들장이 어지간한 멍석만하고, 그것을 받치는 굄돌은 성곽을 쌓을 때나 씀직할 정도로 높고 길어서 혼자서는 들어내기도 버거웠다. 어린 시절에 구들 놓는 장면을 몇 차례 보았지만 이렇게도 연기의 통로가 높고 넓은 것은 처음이었다.

가마솥을 걸었음직한 과거의 아궁이 자리
 가마솥을 걸었음직한 과거의 아궁이 자리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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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에 타서 하얗게 변색이 된 흙이 나오는데 아궁이 자리라는 것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아궁이가 오래전에 파손되었음에도 직경이 얼추 1미터에 달할 정도로 거대했다. 하나에서 열까지 손으로 농사를 짓던 시절에 천석꾼 집안이었다면 아마 일꾼들도 꽤 많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거대한 가마솥을 부엌에 걸어놓고 일꾼들 밥을 해 대었다는 얘기였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거대한 아궁이만큼이나 부엌 바닥과 방바닥의 사이가 멀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수치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1미터에 육박하는 높이였으리라. 내가 이 집을 사서 이사 오기 전에 살던 사람이 아궁이를 없애고 연탄보일러를 들일 때 부엌 바닥을 그만큼 높였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이 그렇게 작은 이유도 금방 해결이 된다.

부엌에서 방으로 밥상을 들일 때 문이 구태여 높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높으면 높을수록 오히려 불편만 가중된다. 문이란 손잡이가 중앙에 있어야 여닫기에 불편함이 없는데 높으면 손잡이가 하단에 있게 되어 중심이 흔들리는 것이다. 방에서 부엌으로 나올 때도 마찬가지다.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나올 때는 등산이나 일반 계단이 아닌 한 앉은 자세로 나와야 한다. 그래서 문 높이가 겨우 80센티밖에 안 되었던 것이다. 커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크면 오히려 불편하니까.

해도 해도 끝나지 않던 작업이 결국 끝나는 날도 있었다
 해도 해도 끝나지 않던 작업이 결국 끝나는 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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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의 재미 혹은 도미노 게임에 빠지다

이렇게 해서 부엌문이 그토록 작아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오랜 수수께끼가 풀리기는 했지만, 미련한 나는 그때부터 무엇인가에 취해 들어가고 있었다. 어머니의 거동이 편할 수 있게 방을 낮춘다는 애초의 계획에 변함은 없었지만, 엉뚱하게도 무슨 고고학이나 하는 듯이 자꾸 이상한 의욕이 발동하면서 이것저것 마구 뜯어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또 따지고 보면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일단 방 높이를 부엌에 맞추는 형태로 뜯어내고 보니 마루가 문제였다. 마루가 방보다 높아서야 그것을 무엇에 쓸 것인가. 해서 한쪽 마루를 뜯어내고 보니 그 옆의 마루가 중뿔난 강아지처럼 엉뚱해서 그 또한 뜯어내야만 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방바닥을 걷어내고 나니 구들장 밑이 쥐들의 소굴이었다. 그동안 그토록 나를 괴롭히던 쥐들이 어디서 오나 했더니 다른 곳도 아닌 방바닥 밑에 아지트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구들장이 크고 굄돌 또한 크다 보니 쥐들은 아주 궁전처럼 살아갈 수 있었을 터이다. 기분이 나빴다. 아주 나빴다. 집을 지은 지 백 년이 넘었다고 했다. 백 년이 넘었으니 연기가 뭉쳐 형성된 검뎅 또한 백 년이 넘었을 것이다. 사람은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먼지를 폴폴 날리는 검뎅 속을 쥐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살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작년에 씨앗 하려고 말리던 중인 옥수수가 자루채로 없어져서 속이 상했는데 그것이 방구들 속의 검뎅과 뒤섞여 있었다. 고구마 꼬투리가 있는가 하면 밤 껍질이 있고, 무엇에 쓰려고 물어다 놓았는지 양말짝도 여럿이 나왔다. 그런데 그것이 한 곳에 몰려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고 파면 팔수록 계속 나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파 들어가다 보니 종당에는 집의 절반 이상을 뜯어내기에 이르렀다. 정말이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날짜 가는 줄도 몰랐다. 어떤 날은 한밤중 새벽 2시에 일어나서 곡괭이질을 하기도 했다. 날마다 그렇게 쿵, 쿵 하고 있으니 어머니는 또 날마다 "아이고 옆집에서 싸우는가 보네, 싸우는가 보네... 얼른 가서 좀 말리제" 하시는 거였다.

그런데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났다. 이걸 어떻게 하나? 가동 가능한 난방설비는 연탄난로 하나뿐이었다. 다행히도 날씨는 이틀 만에 평상으로 돌아와 주었다. 어쨌든 공사를 빨리 끝내자 하고 업자를 불러 공사비 견적을 내보라고 했더니 놀라워라, 간덩이가 작은 나로서는 도저히 타협의 여지가 없는 금액이 나왔다.

뜯어낸 마룻장, 두께가 10센티에 육박하는 이런 것들이 백여 장 나왔다
 뜯어낸 마룻장, 두께가 10센티에 육박하는 이런 것들이 백여 장 나왔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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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한 바에야 끝까지 철저하게 미련해 버리자

처음 생각으로는 마루 뜯어낸 자리에 벽을 치고 이중창으로 구성된 섀시를 넣고 그렇게 방에 가만히 앉아서도 밖을 볼 수 있도록 하자는 아주 근사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업자에게 맡기는 것을 포기하고 내 손으로 자재를 사다가 그렇게 만들면 돈이야 뭐 얼마가 들겠는가 하는 제법 야무진 생각으로 건축자제상을 찾아갔다. 그러나 결과는, 하이고 어이가 없어서 말도 못 꺼내고 그냥 돌아왔다. 원 세상에 무슨 놈의 섀시문 값이 그렇게도 비싼지, 창호 한 틀이 예정 공사비 전체를 넘어서고 있었다.

"야, 이거 진짜로 큰일 났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돈 때문에 머리털을 쥐어뜯어 보기는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돈이 없이는 하루도 살아가기 어려운 도시에 살 때도 이런 궁핍한 경험은 없었다. 돈을 멀리하자는 생각으로 도시를 버리고 내려온 시골에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이야, "이것은 정말이지 경험이다, 경험이야~" 어쩌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걱정이 한 말인 채로 돌아와서 소주 한 잔을 마시고 어머니에게 투정을 부렸다.

"엄마, 엄마, 이 사건을 어떻게 해야 해 이거? 응?"

영문을 모르는 어머니는 눈만 깜빡, 깜빡하시다가 문득 "아따 시방 본 게 우리 오빠랑 꼭 닮았어라 잉?"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잠시 뒤에 "우리 오빠 등에 업혀서 황룡강 건너다가 꽃신 한 짝을 내가 잃어버렸는디. 아따 그놈의 꽃신 때문에 오빠가 어머니한테 을매나 지청구를 들었는지…" 하시는 거였다.

그때 문득,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오르더니 잇달아 꼬리를 물었다.

쉽게 생각하자.
편하게 생각하자.
처음으로 돌아가자.

그렇게 밤을 새우고 아침 해가 떠오를 즈음쯤 내 머릿속으로 그림이 속속 지나가고 있었다. 그동안 뜯어낸 모든 목재들을 토막토막 토막을 내자. 그것으로 마루 뜯어낸 자리에 담을 치고, 그리고 역시 뜯어낸 문짝으로 창을 만들자. 그렇게 하면 따로 자재를 사야 할 일이 없는 것 아닌가.

그리하여 그날부터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자재값이 아주 안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애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적게 들었다. 게다가 해놓고 보니 제법 그림도 괜찮았다. 섀시를 넣은 것보다 좋으면 좋았지 하나도 나빠 보이지 않았다. 한옥 구조의 집에 섀시를 넣었다면 그게 오히려 부조화스럽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뭐냐. 전화위복인가? 아니면 궁하면 통한다는 궁즉통?

"아따 아저씨는 뭔 카페 만드요?"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지나다가 한 마디 하고 있었다. 듣고 보니 그런 쪽에 가까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나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외벽이 끝났을 뿐이기는 하지만, 찬바람을 직접 맞지 않을 수 있게 된 것만도 어디인가 말이다.

이렇게 일단 외벽은 마무리를 했다. 자재값은 거의 들지 않고서
 이렇게 일단 외벽은 마무리를 했다. 자재값은 거의 들지 않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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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치매, #어머니, #집수리, #민속자료, #궁즉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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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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