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985년과 86년 농활때 이곳에서 묵었다. 자리는 그곳인데, 이 건물이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 연풍면 유상리 마을회관 1985년과 86년 농활때 이곳에서 묵었다. 자리는 그곳인데, 이 건물이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대학생이었던 1985년과 86년 두 해를 충북 괴산군 연풍면 유상리라는 곳으로 농촌봉사활동(이하 '농활)을 갔었다. 시대적인 상황은 농활조차도 감시대상이었으며, 학생들은 농활을 통해서 농촌에 대한 현실인식을 하기도 했기에 군사독재정권이 볼 때에는 '의식화교육의 장'이었을 터이다.

끝날 것 같지 않은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달려 도착한 연풍면 유상리에서 첫해 농활을 마치고, 이듬해 농활단장이 되어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 학생들에게 마을분 모두 학생들을 잘 대해주셨지만, 내 기억엔 '어씨 성을 가진 아저씨'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사복경찰이 농할을 못하게 하려고 공작을 펴곤 했는데, 그곳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때 동내분들 입장에서 농활학생들을 받아들이는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농활을 못하게 하면 괴산 시내에 나가서 시위를 하겠다"는 말이 겁나서 허락을 한 줄 알았는데, 마을분들이 형사들을 설득해서 농활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고, 그 과정에서 나는 어씨 아저씨를 기억에 담아두게 된 것이다.

길을 잘못들어 막다른 길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만난 아주머니들, 사진을 찍어 드린다고 하니 "예쁘게 입고 올걸" 하신다.
▲ 마늘 심는 아주머니들 길을 잘못들어 막다른 길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만난 아주머니들, 사진을 찍어 드린다고 하니 "예쁘게 입고 올걸" 하신다.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대학을 졸업한 후, 언젠가는 한번 가야지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고 또 세상사에 시달리다 보니 오늘(11월 3일)에서야 그곳을 찾았다. 출장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 중부내륙고속도로 덕분에 이전보다 쉽게 그곳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몇 차례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다닐 때마다, '연풍IC'을 지날 때마다 나는 유상리를 떠올렸고, 오늘은 해가 많이 남아있어 그곳을 찾아갔던 것이다.

26년 만이다.
여러가지가 궁금했다.
그 아저씨, 동네풍경, 그리고 당시 중학생이었던 그 아저씨의 딸내미는, 그 집은, 마을 위에 있던 저수지는…….

너무 오랜만에 간 길이라 길을 잘못들었다.
유상리 마을회관을 지나 골목길로 접어들었는데 도무지 낯설다. 기어이 길을 잘못 들어 막다른 길을 마딱뜨렸다. 내려오는 길, 마늘을 심는 아주머니들을 만났다.

"아주머니, 마늘 심으시는가 봐요?"
"그래유. 어디서 왔시유."
"유상리에 어씨 아저씨라고 아세요? 어쩌다 보니 26년 만에 왔네요."
"아, 그 어씨, 참 좋은 사람이었지. 병에 걸려 돌아가셨어. 식구들도 서울로 이사갔고."
"너무 늦었네요. 조그만 일찍 올 걸."
"동네 저수지가 있었는데, 동네가 달라진 거 같아요."
"아, 그 동네는 저그 밑으로 조금 더 내려가야 해유."

이사인 할머니, "못생긴 우리를 담아서 뭐하노" 하시더니만 "일하시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니 마음껏 찍으라고 하신다.
▲ 마늘밭에서 만난 할머니 이사인 할머니, "못생긴 우리를 담아서 뭐하노" 하시더니만 "일하시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니 마음껏 찍으라고 하신다.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일하시다 말고 나그네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을 해주시고, 사진을 찍어도 되는가 물었더니만 흔쾌하게 허락을 하신다.

"못 생긴 걸 뭐하러 찍어유. 이럴 줄 알았으면 이쁘게 입고 올 걸."
"고우신데요, 그리고 일하시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지요."
"시골 사람들이 다 그래유."

사진을 현상해서 보내주기로 하고, 농활을 했던 그곳을 찾아 내려갔다.
천천히 마을길을 내려가보니 '소값 개값!' 하며 묶여있는 소에게 소리를 치며 건너던 다리가 있다. 당시, 소값이 폭락해서 많은 농민들이 피해를 봤다. 농민들에게 소값이 개값보다도 더 내려간 것은 당신들 잘못이 아니라, 정부의 잘못된 정책 때문이라고 위로도 안 될 말들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유상리 김영호 할아버지댁 뜰에서
▲ 감 유상리 김영호 할아버지댁 뜰에서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가을 햇살에 마르고 있는 찐고구마, 한 겨울에는 별식이 될 것이다.
▲ 고구마 가을 햇살에 마르고 있는 찐고구마, 한 겨울에는 별식이 될 것이다.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농활을 하며 묵었던 마을회관이 보이고, 마을회관 앞에 있는 집을 들여다 보니 가을햇살에 감과 찐고구마를 말리는 어르신이 눈에 들어온다.

"어르신, 말씀 좀 물을 게요. 어 ** 어르신 댁이 어딘지 아세요?"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오래전에 죽었어. 가족들은 이사갔고, 동생이 저기 교회 뒤에 사는디."
"아, 그래요. 제가 26년 전에 이곳에 농활을 왔었거든요. 그런데 온다온다하다가 이제야 왔어요. 너무 늦었네요."

단양이 고향인 김영호 어르신은 13살 때 유상리로 이사온 뒤 지금껏 그곳에서 살고 있다. 26년 전에 만났던 어르신일 것이다.
▲ 김영호(74세)어르신 단양이 고향인 김영호 어르신은 13살 때 유상리로 이사온 뒤 지금껏 그곳에서 살고 있다. 26년 전에 만났던 어르신일 것이다.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어르신은 요즘도 대학생들이 농활을 온다면서, 그러면 나도 만났을 것이라고 반가워하신다. 그리고 못 찾아갈까 봐 어씨 아저씨네 집을 알려주고, 저수지 위치도 알려주신다.

할머니는 일하러 나가셨고, 자식들은 도회지에서 산다며 잘 알지도 못하는 객에게 뭔가 먹을 것을 주려고 하신다. 손사래를 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옛날 일이 하나 둘 떠오른다.

"저기 도로도 이번 추석에 깔았어."
"맞아요, 그때는 비포장도로였는데 괴산에서도 한참을 들어왔어요. 세상에 이런 곳에도 마을이 있구나 놀랬었지요."
"세상 많이 좋아졌지."
"그런데 저기 중부내륙고속도로 때문에 동네가 옛날 같지가 않네요."
"그렇지 뭐…."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동네 윗쪽으로 거대한 콘크리트 다리를 하고 길게 누워있다. 시골사람들이라고, 동네를 거의 관통하다시피 도로를 이고 살게 만들다니 누가 설계를 했는지 무식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서리맞아 시든 꽃처럼 무너진 담벼락 사이로 사람이 떠난 황량한 집이 보인다.
▲ 연풍면 유상리 골목 서리맞아 시든 꽃처럼 무너진 담벼락 사이로 사람이 떠난 황량한 집이 보인다.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골목길로 들어서니 서리 맞아 시든 꽃과 무너진 담장, 사람이 떠난 빈 집이 보인다.
농촌의 현실이라는 것이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웃음소리가 사라진 농촌,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농촌에서 살 수 없게 만드는 자본이라는 거대한 우상이며, 그것을 신봉하는 이들의 장난질이다.

26년 전에만 해도 아이들이 많았다.
대학생들이 왔다고 마을회관에는 아이들이 북적거렸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아이들과 활동하는 것도 농활 일과 중 하나였다.

'너희의 부모님들은 못 나서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지키는 대단한 분들이시라고,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그때 어씨 아저씨의 딸내미 중에서 중학생이 있었다. 지금은 이미 불혹의 나이를 넘어선 대한민국의 당당한 아줌마일 것이다. 그 아이도 보고 싶었는데, 그만 그렇게 26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가버린 것이다.

한적한 시골풍경 속에 배어있는 쓸쓸함
▲ 유상리 한적한 시골풍경 속에 배어있는 쓸쓸함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추억을 더듬어가며 유상리 골목길을 걷는데 눈물이 나려고 한다. 고향도 아닌데, 고향같은 느낌이든다. 진작에 올 것을, 너무 늦게 왔구나. 그냥, 호호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상상하며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믿음이 어디서 온 것일까?

가족들이 서울로 떠난지 오래고, 내가 찾던 아저씨는 이미 고인이 되었단다. 허물어진 담 사이로, 사람 사는 흔적이 없는 마당이 쓸쓸해 보였다.
▲ 내가 찾던 그 집 가족들이 서울로 떠난지 오래고, 내가 찾던 아저씨는 이미 고인이 되었단다. 허물어진 담 사이로, 사람 사는 흔적이 없는 마당이 쓸쓸해 보였다.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기억을 더듬어 어씨 아저씨의 집을 찾았다.
돌담은 언제부턴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낡아있었고, 대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대문틈 마당에는 풀이 우거져 사람이 오래전부터 살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도, 사람이 살 때의 흔적들이 하나 둘 남아있다. 그것이 몇 년 전의 흔적일까?

인연이라는 것이 살다보면 한 번쯤 만날 수도 있는 것인데, 그냥 만나지 못하고 헤어지는 경우도 많구나 싶었다. 늘 마음에 담아두고 있으면서도, 왜 이제서야 왔을까 싶지만 부질없는 후회가 아닌가 싶어 동네를 휘 둘러보고 나왔다.

낯선 이의 출현에 짖어대는 개, 논으로 일하러 가며 "소값 개값!"이라고 외치던 그때 기억이 난다. 그냥, 아쉬움과 슬픔 마음에 담고 떠나야지. 이젠, 유상리를 오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그 속에는 아련한 아픔이 들어있다.
▲ 곶감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그 속에는 아련한 아픔이 들어있다.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여름방학 때 왔기에 유상리의 가을을 상상해 본 적은 없다.
어느 집 봉당에서 아주머니 두 분이 감을 깎고 있다. 내 나이 또래는 되었을까 싶기도 하고 어릴 것 같기도 하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서 감이 얼어버렸다고 한다. 함주박에는 한낮의 가을햇살이 따가운데도 얼음이 채 녹질 않았다.

곶감, 그처럼 달콤한 추억을 늘 가슴에 담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너무 늦은 발걸음.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어르신과 함께 떠나보낼 추억은 덜 익어 떫은 감을 먹은 듯 떫다. 26년, 강산이 변해도 몇 번은 변했을 세월, 유상리 그곳은 시골 여느 마을처럼 쓸쓸하고 적막해 보였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들이 너무도 많아 내 마음에 빈구멍이 생기고, 찬 가을 바람이 휭하니 빈구멍으로 지나간다.

만나고 싶은 사람 있으며, 머뭇거리지 말고 만나야겠다.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일을 대할 때 세월은 마냥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평범한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겠다.


태그:#연풍면, #유상리, #농촌봉사활동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