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바알~길... "

방랑시인 '김삿갓'은 아니지만, 오늘도 정한 곳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스산한 가을바람의 전횡에 '버티다 버티다'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버린, 빛 바랜 낙엽들이 나그네의 발바닥을 간지럽히며 처연한 목소리로 속닥거린다.

"세상만사, 한여름 밤의 꿈이야. 아래를 보면서 살아야 해!"

나그네는 가던 길 멈추고 살포시 주저앉아 벌레 먹은 낙엽들을 들어 올리고는 삶의 경지를 터득한 살가운 녀석들에게 뜨거운 입맞춤을 한다. 나그네와 낙엽들의 무언의 대화는 이심전심으로 한동안 이어진다. 낙엽들의 조언에 쓸쓸함이 어느 정도 가신 국제나그네, 다시 추적추적 걸으며 흥얼거린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어디서 왔다아가, 어~디로 흘러 가는가..."

독일의 거리에서 체를 만나고...

1929년 건축가인 아빠와 함께
▲ 오잉! 베이비 혁명가, 앙증 맞기도 해라. 1929년 건축가인 아빠와 함께
ⓒ Kiepenheuer & Witsch

관련사진보기


아이 게바라가 형제들과 함께 아빠의 그네 위에서 신나게 놀고 있다.
▲ 야! 신난다. 아빠, 더 세게 밀어봐. 힘들어? 아이 게바라가 형제들과 함께 아빠의 그네 위에서 신나게 놀고 있다.
ⓒ Kiepenheuer & Witsch

관련사진보기


얼마나 걸었을까. 바스락 거리며 깔깔거리던 포도 위의 낙엽들도 엄혹한 현실을 대변하는 듯한 냉기를 동반한 가을비에 젖어 땅바닥에 바짝 업드려 버리고, 대지 위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침묵모드'로 들어가며 어둑어둑한 땅거미가 질 무렵, 국제나그네의 눈은 갑자기 생기 어린 정기를 받은 듯 광채를 띄었다.

길 모퉁이 자그마한 책방 앞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먼지 먹은 '고물 책'들 중의 하나가 나그네의 정처 없는 걸음을 붙잡았던 것이다. <Selbstportrait Cheguevara> 이름 하야, '체게바라의 자화상'!

부리나케 내용을 훑어보던 나그네, 경이와 환희와 오랜 지기를 만난 반가움과 주체할 수 없는 어떤 감동으로 인해 잠시 잠깐 몸을 떨어야만 했다. '고물 책' 안에는 그동안 나그네가 보지 못했던, 체게바라의 아기적 사진부터 39세의 짧지만 굵은 생을 마감한 볼리비아 시절까지, 그의 전 생애가 수백 장 사진의 파노라마로 전개되며 나그네의 눈을 황홀하게 했던 것이다.

1950년 아르헨티나의 코르도바에서 첫사랑 치키나 페레이라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체.
▲ 첫사랑과 다정한 한 때 1950년 아르헨티나의 코르도바에서 첫사랑 치키나 페레이라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체.
ⓒ Kiepenheuer & Witsch

관련사진보기


혁명에 뛰어들기 전에 삼촌과 엘 팔로마르 공항에서 제비족(?)의 폼을 잡고 있는 체. 혁명가 체게바라가 맞아?
▲ 아르헨티나의 7공자, 체게바라? 혁명에 뛰어들기 전에 삼촌과 엘 팔로마르 공항에서 제비족(?)의 폼을 잡고 있는 체. 혁명가 체게바라가 맞아?
ⓒ Kiepenheuer & Witsch

관련사진보기


에르네스토 체게바라! 세계적 거장 장폴 사르트르가 우리시대의 가장 완벽한 사람이라고 찬사를 하지 않았더라도 체게바라는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아래를 보며 헌신적으로 살아온 생애만으로도 이 국제나그네의 정신적 지주로 오랜 방랑생황을 지탱해주는 버팀목 중의 하나였을 것이리라.

나그네는 살까 말까 망설일 겨를도 없이 행여 누군가가 뺏어갈까 두려워 조건반사적으로 책방 안으로 들어가 책 값을 지불하고 체의 체취가 묻어 있는 듯한 '고물 책'을 가슴에 안고 횡재한 기분으로 어둠이 깔린 거리를 거침없이 걸었다. 체게바라가 나그네의 가슴 깊이 들어와 있는 충만함이 가득한 채로…

나그네는 오랜 장고 끝에 아르헨티나 생활을 포기하고 이인모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에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체게바라의 체취가 묻어있는 남미 땅을 밟을 수 있겠는가 하는 기약 없는 미래 때문에 체게바라의 발자국을 거슬러 밟아보자는 생각으로 안데스산맥을 종주했었다.

체게바라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출발하여 체의 마지막 체취가 남아있는 볼리비아 산악을 통과하고, 체가 산악지대로 들어가기 전에 최종 집결했던 볼리비아의 행정수도 산타크루스 골목골목을 방랑하며 체를 그리워 했었다.

처박아 두었던 수기를 다시 꺼내서...

체가 자전거와 오토마이로 남미를 여행하면서 아마존 원주민들의 병 치료를 해 줄 때, 페루 맘보 탕고의 아마존강에서 뗏목을 젓고 있는 체.
▲ 1952년 아마존강 위에서, 아마존 강바람에 노젓는 뱃사공. 체가 자전거와 오토마이로 남미를 여행하면서 아마존 원주민들의 병 치료를 해 줄 때, 페루 맘보 탕고의 아마존강에서 뗏목을 젓고 있는 체.
ⓒ Kiepenheuer & Witsch

관련사진보기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악지대로 가기 전 멕시코의 감옥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체도 한 때 나그네와 같은 국제빵잽이였다.
▲ 1956년 멕시코 감옥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악지대로 가기 전 멕시코의 감옥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체도 한 때 나그네와 같은 국제빵잽이였다.
ⓒ Kiepenheuer & Witsch

관련사진보기


나그네가 오랜 전 망명수용소에서 작성했던 수기 '기차타고 신의주 찍고 자갈치까지 그리고 한라산...'에는 나그네가 안데스산맥 산골에서 인디언들과 고락을 하면서 체를 그리워하는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 일부를 오랜 세월의 편린 속에서 꺼내 '쬐끔만'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우리시대 진정한 혁명가였던 체게바라의 마지막 체취가 남아있는 볼리비아의 깊은 산골 동네, 나는 인디오 아이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아깝게 생을 마감한 체게바라를 그리워 했다.

체게바라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게바라. 체는 '진정한 친구'라는 뜻으로 동료들이 지어준 애칭이다. 1928년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부유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난 체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 재학시, 남미대륙 구석구석을 도보와 자전거 등으로 여행했다. 그의 혁명의지는 가난에 찌들고 병들어 허덕이는 비참한 사람들과 직접 부데끼며 생활하면서 싹트기 시작했다.

결국 체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 보장된 생활을 포기하고, 초인적인 인내와 수난이 예정되어 있는 혁명의 길에 들어선다. 과테말라 시절의 어설픈 혁명전사 초기 단계를 거쳐...맥시코, 그리고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 속에서 겨우 18명의 요원으로 불가사의의 쿠바혁명을 성공시킨다...

체는 쿠바 국립은행 총재, 산업부흥상, 수상인 카스트로의 전권대사 등으로 활동하면서 자주외교를 펼친다. 쿠바가 어느정도 안정을 찾기 시작하자 체는 다시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혁명가의 길로 돌아간다.

아프리카 콩고를 거쳐 볼리비아의 산 속으로 들어가 활동하다가 볼리비아 정부군에 체포된 지 하루 만에 39살의 젊은 나이로 위대한 혁명가의 생을 마감한다....

인간의 생명을 도박에 걸어서는 안된다고 했던 체, 인간의 생명은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다고 했던 체, 그는 혁명 중에도 대원들과 즐겨 노동하기를 좋아했다. 대원들과 무거운 짐을 운반하기도 하고, 대원들이 기거할 집을 직접 지어 주기도 했다. 나는 체의 훈훈한 인간사랑의 체취가 남아있는 안데스 산자락의 인디오 마을 아이들에게서 체의 슬픈 모습을 보았다....

...비포장의 진창길은 더 이상 '털털버스'의 진로를 허락하지 않았다. 오르막에 이르러서는 한 발자욱도 나아갈 수 없었다. 바퀴는 다람쥐 쳇바퀴처럼 제자리를 헛돌며 끈적한 토사들을 뱉어 내었다. 안데스산맥 한복판에서 우리는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모든 차량의 손발이 묶여 버린 것이다. 산타크루스로 향하는 유일한 산간도로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차량들로 마치 토막난 지네처럼 흉칙했다....

체게바라의 간고하고 고통스러웠던 때에 비하면 지금의 나는 얼마나 편한가. 비록 낭떠러지에 떨어져 비명 횡사할 위험이야 도사리고 있지만, 그래도 까불거리는 인디오 아이들이 옆에 있고, 비를 맞으며 한데 잠을 자지 않아도 되지 않은가.

날이 밝자 우리는 모두 내려 진흙 구덩이에 한 자나 빠진 버스를 밀어 부치며 미끄러운 언덕길을 조금씩 나아갔다. 인디오들 사이에 끼어 진흙 투성이의 발을 힘겹게 떼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영차, 영차.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험난한 계곡을 정복하며 우리는 나아간다. 영차, 영차...'

...나는 안데스 산자락 언덕배기 나무에 걸터앉아 인디오 청년이 권하는 마떼를 마시며 체게바라를 그리워 했다. 지겹게 내리던 비는 어느 틈엔가 그쳐 있었다. 눈 아래로 보이는 하얀 구름조각들이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스라히 마주 보이는 봉우리에서는 찬란한 무지개 다리가 뻗어 올랐다. 쌍무지개였다.

'안데스산맥의 쌍무지개라!'

장관이었다. 비 온 뒤의 산 공기는 상쾌하기 그지 없었다. 신비스런 쌍무지개 사이를 비집고 체게바라의 음성이 들리는 듯 했다.

"모든 압제에 저항하라! 모든 압제에 저항하라!
사람에 의한 사람의 착취는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라."

황홀한 안데스의 장관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음에도 나의 눈에는 어느덧 이슬 같은 물기가 반짝거렸다...

...산타크루스. 체게바라가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함께 투쟁했던 대원들을 이끌고 볼리비아 혁명을 위해 안데스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기 전 집결했던 도시, 나는 체의 발차취를 거꾸로 거스르는 행군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적당한 삼류호텔에 짐을 풀어놓고 산타크루스 구석구석을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 보았다.

산타크루스는 볼리비아의 수도라 하지만,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이곳은 행정 기능만 담당하는 수도라 했다. 볼리비아의 진짜 중심지는 페루와 인접해 있는 라파스라는 도시이다. 나는 산타크루스의 거리를 걸으면서 당시 체의 아지트가 어디쯤 일까를 나름대로 가늠해 보았다. 골목 어디선가에서 금방 체가 달려나와

"반갑소. 친구!"

하면서 뜨겁게 포옹할 것만 같았다. 그러면 나는 그의 포옹을 온 몸으로 받으며 뜨거운 열기를 담아 이렇게 이야기 할 것이다.

녹두장군과 체가 만나다

1959년 11월 3일, 미국기자들과 인터뷰하는 체게바라
▲ 혁명가 체게바라 1959년 11월 3일, 미국기자들과 인터뷰하는 체게바라
ⓒ Kiepenheuer & Witsch

관련사진보기


국제나그네가 망명수용소 시절 수용소 난민들을 대상으로 전시회를 열 목적으로 그렸던 그림 중 하나.조각을 해서 그 위에 채색을 했다.
▲ 시공을 초월한 혁명가들의 만남 국제나그네가 망명수용소 시절 수용소 난민들을 대상으로 전시회를 열 목적으로 그렸던 그림 중 하나.조각을 해서 그 위에 채색을 했다.
ⓒ 조영삼

관련사진보기


"체, 나는 우리 녹두장군의 전령입니다. 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모든 압제에 항거하다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녹두장군이 나를 지금 체에게로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체게바라에게 인간해방투쟁의 선각자 녹두장군의 활약상을 신나게 설명할 것이다.

"존경하는 체, 지금부터 100여년 전, 동방의 해뜨는 나라 꼬레아에 뛰어난 혁명가가 있었지요. 그의 이름은 전봉준, 사람들은 그를 '녹두장군'이라 불렀답니다. 그는..."

...당시 꼬레아는 일본, 러시아 등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신음하고 있었다. 전봉준은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세상을 타파하고 타도 제국주의를 외치며 착취 받는 백성의 선봉에 서서 낫을 잡고 칼을 잡고 총을 잡았다.

그리하여 한동안 해방구를 만들어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의 정치를 펼쳤으나 제국주의자들과 착취자들의 농간에 의하여 완전한 참세상을 완성하지 못하고 의연히 죽어갔다. 그는 죽음에 이르러 회유하는 적 앞에서 일갈을 토했다.

"우리 농민군은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고자 하는 자이니, 탐학하는 관리를 없애고 그릇된 정치를 바로 잡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조상의 뼈다귀를 우려 악을 행하여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자들을 없애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람으로서 사람을 매매하는 것과 국토를 농락하여 사복을 채우는 자를 징치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너희는 외적을 이용하여 자국을 해하는 무리들이다. 그 죄 가장 중대하거늘 도리어 나를 죄인이라 이르느냐. 너희는 나의 적이요, 나는 너희의 적이다. 내 너희를 쳐 없애고 나라를 바로 잡으려다가 도리어 너희 손에 잡혔으니 너희는 나를 죽일 것 뿐이요 다른 말은 묻지 말라. 내 적의 손에 죽기는 할지언정 적의 법을 받지는 아니하리라."

녹두장군은 피를 토하는 짧은 시 한 토막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힘을 합하더니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랴.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체,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던 녹두장군은 가난하고 핍박 받는 백성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하다 아까운 최후를 마쳤습니다. 그가 죽고 나서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그의 민중사랑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피울음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의 없음을 애달파 한답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녹두장군은 갔지만 그의 숭고한 뜻은 후세의 꼬레아들에게 면면히 이어지고 있지요. 체, 당신이 세상의 핍박 받는 민중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것처럼..."

남미 대륙의 완전한 혁명을 꿈꾸었던 체게바라, 산타크루스라는 이름처럼 온누리에 골고루 축복을 주고자 했던 우리시대의 완전한 전사, 체게바라의 체취가 남아 있는 산타크루스의 하늘은 오랜만에 티없이 맑고 푸르렀다...'

오래전에 이 국제나그네가 험준한 안데스 산맥을 넘으면서 체를 그리워하며 적어 본 잔재영상의 일부이다.

이역의 창 밖은 지금,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을씨년스럽게 내리고 있다. 그리고 며칠 후면 시월의 마지막 밤이다. 이런 날엔 독자들이여. 마음이 통하는 이들과 함께 술 잔을 부딪치며 그리운 이들을 맘껏 그리워 하며 깊어가는 가을을 호흡해 보자.  혼자라도 좋다.

당시 체는 말했다."나의 꿈은 굼주림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 1965년 아프리카 콩고에서 당시 체는 말했다."나의 꿈은 굼주림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 Kiepenheuer & Witsch

관련사진보기



1957년 쿠바의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의 아지트에서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고 있는 체
▲ 독서삼매경은 나의 취미 1957년 쿠바의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의 아지트에서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고 있는 체
ⓒ Kiepenheuer & Witsch

관련사진보기



태그:#꼬만단떼 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