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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제주도 유일의 남자가이드'라는 윤영국 시민기자가 말했다.

"황사도 쓸모 있는 데가 있다지요. 태풍도 마찬가집니다. 태풍이 없던 지난 3년간 고기가 잡히지 않았어요. 그런데 올해 태풍이 오니 고기가 잡힌다고 하네요."

바다도 그러할진데, 작은 저수지만도 못한 인간세상이야 어떨까. 박노해 시인은 쓴다.

"아니 아니 갯벌이 오염돼서만이 아니고/긍께 그 머시냐 태풍 때문이 아니것냐/요 몇 년 동안 우리 여자만에 말이시/ 태풍이 안 오셨다는 거 아니여..... 이 놈의 시대가 말이여, 너무 오래 태풍이 읍써어/정권 왔다니 갔다니 깔짝대는 거 말고 말여/썩은 것들 한번 깨끗이 갈아엎는 태풍이 읍써어"('꼬막' 중에서)

시인이 자린 고흥과 보성, 여수를 안은 여자만(汝自灣)의 고막들도 태풍이 오지 않으면 새 생명을 돋지 못하는 게 세상의 이치다. 그렇다. 박노해 시인은 이렇게 당당히 태풍을 말할 때 그 답다. 수많은 이들의 폐부를 찌르던 '노동의 새벽' 정도의 투쟁 열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시대의 변화에 굴하지 않고 당당한 그가 될 때 진짜 그는 존재한다.

시집을 읽으면서 조금은 실망했다. 너무 많은 시가 기록된 탓도 있지만 이전과 같은 절절함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얼마나 이기심 많은 말인가. 다시 시인이 그 고통의 현장으로 가서 시를 쓰라는 말인가. 그런데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이 있었다. 그 이유는 자신감의 결여다.

박노해 시인의 신작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표지
▲ 박노해 신작시집 표지 박노해 시인의 신작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표지
ⓒ 느린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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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출간된 박노해의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느린걸음 간)를 읽으면 그에게는 무의식적인 패배주의가 있다.

"온몸을 던져/혁명의 깃발을 들고 살아온 나는/슬프게도, 길을 잃어버렸다"('사람의 깃발' 중에서)

"봄이 와도 대지에 맨발을 내리지 못한/시멘트 바닥을 달리는 내 삶 때문이다"('모내기 밥'중에서)

"날자 우울이여/찬란한 추락의 날개로/우울을 뚫고 시대의 우울로"('우울' 중에서)

시집은 노골적인 좌절의 냄새가 있다. 심지어는 그 용어조차도 너무 할 정도다. "나는 늘 언저리에 머물고 있지만/중심에서 흘러나온 지류처럼 굽이 돌며/내 인생은 늘 언저리를 돌아왔지만"('언저리의 슬픔' 중에서)

"나는 그들에게 밀려나고 추방당해/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길로 떨어져 나온/뜨내기 슬픔의 생"('뜨내기' 중에서)

"내 한손에는 잘고 비툴한 못난이 감들/품 안에는 절름발이 못난 강아지/어둑한 고갯길을 걸어가는 못난 시인"('나의 못난 걸들아'중에서)

누가 그에게 언저리, 뜨내기, 못난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을까. 만약 그가 실패했다면 우리 민주화 역사는 실패의 역사가 될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그는 성공한 삶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그리고 그의 세상에 대한 시각도 그르지 않았다. 그를 키운 노동판과는 거리가 있지만, 세상을 보는 그의 시선은 정확하다. 이라크 파병에 대한 비판이나 죽어가는 지구에 대한 따듯한 시선 등은 그가 봐야할 대상이 맞다. 4대강이나 조중동을 구체화하는 것이 무슨 문제일까.

이제 세상의 평화를 이야기하는 게 맞다. "이제 우리는 홍익인간이 아니다/이제 우리는 자주민족도 아니다/자유도, 정의도, 인권도 아니다"('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중에서)라는 박노해기에 이라크 파병안 통과를 분노하는 게 옳다. 그뿐일까.

"선진화의 이름으로 양극화가 벌어질 때/녹색성장의 이름으로 대지가 죽어갈 때/경제성장의 이름으로 농사마을이 파괴될 때/ 4대강 살리기로 4대강이 살해될 때/약자들이 생의 벼랑 끝에서 몸을 던질 때"('거짓 희망' 중에서) 

"이제 착하고 의로운 이들을 조중동씨가 죽이는구먼/난 인자 도시락 싸들고 조중동 잡으러 다녀야겠구먼"(''조중동'씨가 누구요?'중에서)

지구화된 노동의 세계도 비판하는 게 맞다. "우리 시대의 영웅이자 구루인/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의 뒷면에서/보이지 않는 살인자들의 세계화를 본다"('아이폰의 뒷면'중에서)

그리고 그 결과를 말하는 것도 시인의 염려가 옳다. "그날이 오면/어린이들은 어른들을 저주하리라/농부와 토종 종자와 우애의 공동체를 다 망치고/깨끗한 물과 공기와 토양을 이토록 고갈시키고/막대한 빚더미만 떠넘긴 어른들을"('그날이 오면'중에서)

이상기후나 해수면 상승, 질병의 증가 등 뚜렷한 징후에도 우리는 사실을 왜곡한 채 화려한 것에만 눈을 돌린다. 사람들은 피델 카스트로에 열광하지 않지만 '체 게바라'에 열광한다. 게바라처럼 희생하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처럼 혁명의 현장을 지키는 게 시인의 참 모습니다. 그리기 위해서는 당차야 한다.

"오른쪽이건 왼쪽이건 방향을 바꿀 때/그 포용의 각도가 넓어야 하리리/힘찬 강물이 굽이쳐 방향을 바꿀 때는/강폭도 모래사장도 넓은 품이 되느니"('긴 호흡' 중에서)

때문에 강박마저도 그 답다. "나도, 내 책상 서랍 깊은 곳에/권총 한 자루를 숨겨두었지//만약 내가 첫마음을 배신한다면/나의 노동과 시와 혁명을 배신한다면/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배반한다면//어느 조용한 밤,나는 책상 서랍을 열고/총구를 이마에 대고 깨끗이 당기리라"('권총이 들어 있다'중에서)

그리고 또다시 투쟁을 이야기해야 옳다. "그들을 찾아가 먼저 웃으며 꽃을 주라고/내 교복과 대학자격증을 벗겨주어 고맙다고/그 다음 죽을 용기로 그 돌을 들어 치라고/내 노동과 삶의 시간을 강탈한 대가라고"('죽을 용기로' 중에서)

그리고 희망을 노래해야 한다. "지금 모든 것이 무너지는 정점의 시대에/더 높은 인간성으로 도약할 수 있는/신비한 기회의 길이 내재되어 있다고/나는 은빛 숭어의 길에 대한 믿음 하나/끝내 저버리지 않았네"('은빛 숭어의 길' 중에서)

"최후의 한 사람은 최후의 한사람이기에/희망은 단 한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삶은 기적이다/인간은 신비이다/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중에서)

시가 어려우면 산문으로 하면 된다. 총을 잡을 수 없지만 카메라나 펜이나 입도 있다. 박노해는 박노해다. 박노해가 절망한다면 절망할 많은 당신의 지지자들을 봐야 한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박노해 시집

박노해 지음, 느린걸음(2010)


태그:#박노해,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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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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