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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산에서 바라본 나포 십자들녘. 들녘 왼쪽은 금강이고 넘어가 충청도입니다.
 오성산에서 바라본 나포 십자들녘. 들녘 왼쪽은 금강이고 넘어가 충청도입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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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가을이구나! 했는데, 10월하고도 중순이고, 찬이슬이 맺힌다는 한로(寒露)가 지난지도 일주일이 되었습니다. 일찍 심은 벼들은 수확이 시작되었는데요. 황금 들녘을 지키는 허수아비 아저씨들이 더욱 바빠지는 때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창밖에서는 새를 쫓느라 쏘아대는 대포 소리가 여기에서도 '뻥', 저기에서도 '뻥' 요란합니다. 전쟁 때만 쏘아대는 것으로 알았던 대포가 이제는 농촌의 풍요를 알리는 소리가 되었습니다.

반세기가 넘도록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휴전선에서 들려오는 듯한 대포 소리도 하루빨리 농촌에서 새를 쫓는 데 사용하는 기구가 되어 가을이면 7000만 민족이 손을 맞잡고 부르는 풍년가로 거듭나기를 기원해봅니다.

도로에 벼를 널어놓고 말리는 김씨 아저씨. 쭉정이도 많을 거라며 걱정하더군요.
 도로에 벼를 널어놓고 말리는 김씨 아저씨. 쭉정이도 많을 거라며 걱정하더군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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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이슬 머금은 국화꽃 향기가 그윽해지면서 기온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집니다. 기온이 더욱 내려가 늦가을 서리 내리기 전에 추수를 끝내려고 농촌은 바쁘기 그지없습니다. 어제 수확한 나락을 도로에서 말리는 김씨 아저씨는 짧은 해가 밉기만 합니다.

올해는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진 폭우로 농민들은 여름 내내 가슴을 졸이며 보냈습니다만, 수확의 기쁨이 있으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지요. 그러나 김씨는 그게 아닙니다. 한 필지 소출이 작년보다 10가마가 줄었다니, 한숨이 나올 수밖에요. 

그래도 김씨는 나락이 고루 햇볕을 받을 수 있도록 쉴 사이 없이 당그레질을 해댑니다. 짧아지는 해를 원망하면서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쬐어주기를 소원합니다. 날이 좋아야 3~4일 그렇잖으면 닷새는 말려야 하기 때문이지요.

 파밭에 물주는 정씨 아저씨. 파밭 옆에서는 방울토마토들이 붉게 익어가고 있더군요.  채소들도 이상해졌나봅니다.
 파밭에 물주는 정씨 아저씨. 파밭 옆에서는 방울토마토들이 붉게 익어가고 있더군요. 채소들도 이상해졌나봅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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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 아저씨는 밥만 먹으면 밭으로 나가는 아주머니에게 미안했던지, 물통을 지고 파밭으로 나왔습니다. 처음엔 쪽파와 대파를 심은 밭에 농약을 치는 줄 알았지요. 그런데 며칠 가물어서 파 이파리가 마를 것 같아 물을 준다고 했습니다.

정씨 아저씨는 저를 만날 때마다 게이트볼 치러 나오라고 성화입니다. 좋은 친구들이 많으니 함께 게임도 하면서 즐기라고 하는데 걱정입니다. 시간도 없지만, 아직은 게이트볼 치러 다닐 나이가 아니거든요. 

 불안하게 매달려 있는 호박들. 불안함 속에서도 풍요를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불안하게 매달려 있는 호박들. 불안함 속에서도 풍요를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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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농촌은 잘 익은 호박 따랴, 벼 수확하랴, 서리 오기 전에 고추 따랴, 깻잎 따랴, 고구마 캐랴 정신이 없는데요. 우리 마을 농민들도 고단한 몸을 추스를 사이 없이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논밭에서 지냅니다.

면사무소 방향 골목 집 담벼락에는 잘 익은 호박 세 덩이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매달려 있습니다. 물기가 다 빠져버린 줄기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위태위태한데요. 하잘 것 없는 호박도 생명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옛날에는 여름철에 나오는 호박을 '애호박',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늦가을에 따는 호박은 '늙은 호박'이라고 했습니다. 검은콩이 줄줄이 박힌 호박떡과 어머니가 몸에 좋다며 끓여주시던 달착지근한 늙은 호박국이 생각납니다. 호박 얘기하니까 군침이 도네요.

늙은 호박 껍질을 수저로 벗겨 국을 끓이면 시원하고 담백한 맛이 그만입니다. 당뇨에도 좋고, 다이어트 식품으로 따라올 음식이 없으니까요. 국을 끓이는 방법도 쉽고 간단합니다. 호박을 얇게 썰어 물을 적당히 부어 끓을 때, 천일염으로 간을 맞추고 양념으로 깨소금을 조금 넣으면 되니까요.

방울이 할머니네 집 앞마당. 해마다 자식들과 나눠먹는다고 합니다.
 방울이 할머니네 집 앞마당. 해마다 자식들과 나눠먹는다고 합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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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에 널어놓은 고구마순. 내년 대보름날 먹을 거라고 했습니다.
 햇볕에 널어놓은 고구마순. 내년 대보름날 먹을 거라고 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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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방울이 할머니가 김장 때 쓰려고 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들은 풍성한 가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고추들이 신부화장을 끝낸 신부 입술처럼 도톰하고 예쁘더군요. 방울이 할머니는 고추도 작년보다 수확이 감소했다며 울상을 지었습니다.

방울이 할머니는 요즘 무척 바쁩니다. 올해 일흔인데도 일당받고 고구마 캐러 다니고 배도 따러 다닙니다. 그뿐 아닙니다.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할아버지 돌봐야 하고, 짧아지는 가을 햇볕에 고구마순, 가지, 호박 등을 말리느라 정신없거든요.

방울이 할머니는 나눠 먹기를 참 좋아합니다. 올해도 상추와 고구마순 등 집에서 기른 채소를 몇 차례 가져오셨습니다. 먹고 싶은 채소가 있으면 따먹으라며 밭을 알려줄 정도로 잘해주십니다. 그렇게 넉넉한 인심에 취해서 그런지, 모두가 내 것 같고, 먹지 않아도 항상 배가 부릅니다.

바구니의 대추. 한 그루에서 세 바구니나 수확했는데요. 대추는 가을을 상징하는 과일이라고 합니다.
 바구니의 대추. 한 그루에서 세 바구니나 수확했는데요. 대추는 가을을 상징하는 과일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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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는 집 앞마당에는 대추나무가 한 그루 서 있습니다. 해마다 대추가 주렁주렁 열리는데요. 올해도 파란 풋대추가 붉게 물드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가을이 무르익어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대추는 절기 따라서 정상적으로 변하는 것 같은데 날짜는 왜그리 빨리 가는지, 멀미가 날 정도입니다. 

사진은 며칠 전 수확한 대추인데요. 예는 정에서 나오고 정은 가까이서 나온다고, 이웃들과 나눠 먹었지요. 올해는 작년보다 더 많이 열린 것 같더군요. 보기만 해도 푸짐하고 먹음직스러운데요. 당도가 높고 살강살강 씹히는 느낌이 그만이어서 손이 자꾸 가더군요.

조율이시(棗栗梨柿)가 말해주듯 조상들은 대추를 제사의 으뜸 과일로 여기고 제사상 첫째 자리에 놓았는데요. 아무리 비바람이 쳐도 꽃이 피면 반드시 열매 하나를 맺고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손의 번창을 상징하고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집을 지으려고 준비하는 긴 호랑거미. 벼멸구 등을 잡아먹는 거미는 ‘살아 있는 농약’ 소리를 듣지요.
 집을 지으려고 준비하는 긴 호랑거미. 벼멸구 등을 잡아먹는 거미는 ‘살아 있는 농약’ 소리를 듣지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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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테라스에서 푸른 하늘을 지붕 삼아 거미줄을 치기 시작하는 예쁜 거미 한 마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긴 호랑거미 같았는데요. 겨울을 앞두고 먹이를 갈무리하려고 준비하는 것 같았습니다. 흉물스럽게 생겼지만, 거미처럼 희생정신과 인내심이 강하고, 침착한 동물도 없다고 합니다.

거미를 보면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는데요. 제가 말을 듣지 않거나 속상한 일이 있으면 "거미 같은 인생"이라며 탄식했습니다. 거미는 알주머니를 만든 후 새끼의 먹잇감이 된다는 통설 때문에 그런 말씀을 했던 모양인데요. 맞든 틀리든 깊어가는 가을에 음미해볼 만한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가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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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종안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우리마을, #가을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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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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