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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박물관 앞에서 답사팀에게 설명을 하고 있는 신광섭 국립민속박물관장
 부여박물관 앞에서 답사팀에게 설명을 하고 있는 신광섭 국립민속박물관장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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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금동대향로, 그렇게 세상에 드러났다

"향로를 제 손으로 직접 발굴해내는데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손이 얼어서 움직이지를 않아요, 물속에서. 그래서 손 관절만 움직이고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았어요. 굴착기로 떠내는 것처럼 손으로 향로를 들어냈습니다."

신광섭 국립민속박물관장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신 관장은 능산리사지에서 백제금동대향로를 발굴하던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중이었다. "향로는 물속에 잠겨 있었다"고 신 관장은 말했다. 목곽 수조 안에 비단으로 싸인 채 들어 있던 향로를 꺼내기 위해서는 먼저 물을 퍼내야했단다. 그릇으로 물을 퍼내다가 혹시라도 유물에 손상이 갈까봐 종이컵으로 바꿨지만 그 역시 쉽지 않았다. 종이가 물을 먹으니 두어 번 이상 떠내면 컵이 흐느적거린 탓이었다.

신 관장은 방석 안에 들어 있는 스펀지를 뜯어오라고 해서 그걸로 물기를 빨아들이는 방법을 택했다.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러운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백제 시대의 찬란한 문화를 온몸에 새긴 백제금동대향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993년 12월 12일이었다"고 신 관장은 설명했다.

신광섭 국립민속박물관장
 신광섭 국립민속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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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관장이 백제금동대향로를 발굴한 것은 그가 부여박물관장으로 재직할 때였다. 부여박물관에서만 17년간 근무했다는 신 관장을 만난 것은 지난 10월 2일, 부여 정림사지에서였다.

이날 신광섭 국립민속박물관장은 부여와 공주 일원에서 열리고 있는 '2010 세계대백제전' 행사의 하나인 '명사 신광섭 관장과 함께 하는 부여답사'를 진행하기 위해 부여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이 행사는 부여문화원에서 주관했다.

부여는 잘 알려진 대로 백제의 옛 도읍지. 옛 이름은 사비다. 한 때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한 나라의 도읍지였으니, 문화유산이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역사는 승자를 중시하면서 많은 기록을 남기지만 패자는 잊거나 무시한다. 그렇기에 남아 있는 기록은 빈약할 수밖에 없고, 흔적 역시 쓸쓸함을 깊이 느끼게 하는 것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부여가 고향이며 부여박물관에서 17년이라는 적지 않은 세월동안 재직하면서 백제의 많은 유물과 유적을 발굴한 신광섭 관장과 함께 부여지역을 둘러보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나라 백제의 의미를 되새기는 답사는 뜻 깊었다.

기와에 새긴 글귀 참고로 이름 붙인 '정림사'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아무래도 부여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정림사지. 정림사가 있었던 절터에는 백제 때 건립된 5층 석탑이 세월의 풍파를 견딘 채 굳건히 서 있다. 탑 앞에는 연잎이 가득 들어찬 연못이 있다. 봉우리가 맺힌 연꽃이 딱 하나 연잎들 사이에 숨어 있고.

탑 뒤쪽에는 백제시대의 강당을 복원한 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그 안에 삐뚜름한 돌 모자를 쓴 석불좌상이 빙긋이 웃고 있다. 그 돌 모자는 맷돌로 만든 것이라는 게 신 관장의 설명이었다. 석불은 고려시대에 만든 비로자나불이라고 했다. 정림사는 백제시대의 절터로 고려 시대에 중건되었던 절이다. 백제 때의 절 이름은 전해지지 않아 모르고, 고려시대 중건 당시 사용된 기와에 새겨진 글귀를 참고로 '정림사'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림사지의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복원된 강당
 정림사지의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복원된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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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 5층 석탑
 정림사지 5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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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의 5층 석탑에는 백제의 아픈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이 탑신에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글로 새겨놓았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인다.

정림사지는 너른 터 가운데에 탑이 세워져 있고, 뒤쪽으로 강당이 들어서 있어 천천히 산책하듯이 걸으면서 둘러보기에 딱 알맞다.

나는 답사가 시작되기 한 시간 전쯤에 미리 도착해서 정림사지를 돌아다녔는데, 선선한 가을 아침의 분위기가 잘 어우러지는 산책이었다. 덕분에 매표소조차 문을 열지 않은 이른 시각에 한가롭게 정림사지를 둘러보는 관광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참으로 여유로운 관광객들이구나, 하면서 그들을 스쳐 지나는데 이국의 언어가 귓전을 때렸다. 일본인들이었다.

"왕의 향로 지키려고 땅 속에 묻을 수밖에 없었을 것"

다음에 들른 곳은 부여박물관. 지금의 부여박물관은 신 관장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부여박물관장으로 재직할 때 새로 지은 건물이기 때문이란다. 부여의 산 하나 자연 지형이 대규모가 아닌 조그마한 촌락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형상화해서 낮은 건물로 짓게 되었다는 것이 신 관장의 설명이었다.

부여박물관은 백제의 고토에 지어진 가장 대표적인 박물관으로 주로 백제시대의 유물이 전시되고 있는 중이다. 그 유물 중에서 국보 제287호로 지정된 백제금동대향로는 앞서 설명한 대로 신 관장이 직접 발굴한 것이고. 그래서 부여박물관 유물에 대한 설명은 백제금동대향로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뒤이어 찾은 능산리 절터에서도 이어졌다.

복원된 사비성에 세워진 백제금동대향로 모형
 복원된 사비성에 세워진 백제금동대향로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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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곳은 능산리사지의 공방 터. 능산리 일대에는 옛 절터와 백제 성왕과 위덕왕의 묘를 포함한 고분들이 흩어져 있고, 그 옆으로 의자왕의 가묘가 있어, 그곳에 가면 백제의 역사 일부를 돌이켜 볼 수 있다.

"향료가 여기서(능산리사지) 나온 이유에 대해 혹자는 향료를 수리하려고 여기다 갖다 놨다고 했는데, 수리를 할 데가 하나도 없는데 왜 수리를 합니까? 도금은 원래 오래되었으니 벗겨진 것이고. 비단에 싸고 칠기 상자에 넣어서 공방의 물통에 집어넣었다는 건, 여기를 관리하는 사람이 언젠가는 전쟁이 끝나면 돌아와서 수습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몰래 묻어놓은 것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백제가 망한 것은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서였다. 사비성은 당나라 군대에 의해 쑥대밭보다 처참한 지경으로 변했다고 한다. 사비성이 7일 밤낮을 타서 성 안에 살아남은 생명체가 하나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니까 그 상황이 어찌 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런 상황에서 왕의 향로를 지키기 위해 땅 속에 묻을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 는 신 관장의 이야기다.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진 향로는 부여의 땅속에서 물에 잠긴 채 깊은 잠을 자고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흔들어 깨워 세상에 내놓은 이가 바로 신 관장이었다.

백제문화단지 사비성 옆에 복원된 능산리 능사
 백제문화단지 사비성 옆에 복원된 능산리 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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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에 끌려간 의자왕, 죽임당했을 것"

전화(戰火)에 휩싸인 사비성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머금은 채 서둘러 향로를 묻어야 했던 백제인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다시 깃들기를 기원했겠지만, 백제는 영원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1400년 전에 사라진 나라 백제가 세상의 부름을 받아 공주와 부여 일원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비록 축제라는 형태지만.

백제가 망한 뒤, 의자왕을 비롯한 왕자들과 백제의 유민 1만2천여 명이 당나라로 끌려갔다고 한다. 당나라 낙양으로 끌려간 의자왕은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고 알려졌는데, 신 관장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한다.

"의자왕이 중국까지 씩씩하게 끌려갔는데 거기 가서 왜 죽어요. 죽였다고 보는 겁니다. 여기(사비)에서 전쟁을 하면서 당나라 군대가 보급로가 끊겨서 저희들끼리 순번을 정해서 잡아먹을 정도로 궁핍한 전쟁을 했는데 임금(의자왕)이 중국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죽였다고 보는 거지요. 죽이고 나서 후장(後葬)을 해서 곡도 하게 하고 비석도 세워주고 했던 것 같아요."

백제가 망한 뒤에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났고, 다시 백제가 살아날 것을 염려한 당나라가 의자왕을 죽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화근(?)은 일찌감치 없애는 것이 상책이라고 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의자왕이 죽은 뒤 낙양의 진숙보의 무덤 옆에 묻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했지만, 의자왕의 무덤은 찾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조금 더 깊이 파헤치고 들어가면 찾을 가능성이 있겠지만, 우리나라 땅도 아닌 중국 땅에 있는 무덤이니, 그리 만만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라고 신 관장은 덧붙여 설명했다.

백제 의자왕 가묘
 백제 의자왕 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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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이 묻혀 있는 무덤은 찾지 못했으나, 능산리 고분군 옆에 의자왕의 가묘가 조성되어 있다. 의자왕의 후손들이 그의 무덤을 찾지 못하게 되자 안타깝고 아쉬워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에 대한 신 관장의 이야기는 낙화암에서도 이어졌다. 의자왕에 관한 이야기는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들이 더 많이 전해진다. 낙화암에서 삼천궁녀가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졌다는 사연은 정설처럼 굳어져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고.

낙화암이 올려다 보이는 백마강은 지난여름에 내린 비로 물이 많이 불어 있었지만, 평소에는 물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서 그곳에 들른 사람들은 저런 곳에 어떻게 3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빠져 죽을 수 있었을까, 의아해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신 관장은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다. 낙화암 하나만 보더라도 우리의 역사를 너무 비굴하게 희화화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고.

신광섭 국립민속박물관장
 신광섭 국립민속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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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과장법이 같이 있어요. 과대 과장과 축소 과장이 같이 있습니다. 삼천궁녀를 거느리고 살았다는 건 과대 과장이지요? 백제의 여러 가지 역사문화가 형편없다고 하는 것은 축소 과장입니다.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사실을 제대로 살펴야 하지 않느냐. 백제는 비록 정치사로는 불우한 나라였지만 문화사로는 엄청난 한민족의 기저를 이룬 나라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은 망국 군주인 의자왕도 마찬가지라고. 의자왕은 서왕자만 41명으로 그들을 각 지역의 제후로 임명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지닌 왕이었으나, 끝내 나라가 망하자 여자 좋아하고, 술 좋아하면서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백마강을 일주하는 배를 타면 설명이 나오기는 한다. 백제 시대의 궁녀가 3천 명이 안 되었다는 얘기로, 3천 명의 궁녀가 낙화암에서 뛰어내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백제보다 땅덩어리가 넓었던 조선시대에도 궁녀는 3천 명이 안 되었다고 하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태그:#세계대백제전, #신광섭, #백제, #부여, #백제금동대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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