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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7일 드라마 <동이> 제 55부에서는 동이 최숙빈(한효주 분)의 라이벌인 장희빈(이소연 분)이 소복을 입고 사약을 마신 뒤 고꾸라지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인현왕후(박하선 분)와 장희빈이 몇 달 간격으로 세상을 떠남으로써, 이제 최숙빈은 '최후의 1인'으로 남게 되었다.

 

홀로 남은 동이는 중전 자리를 욕심내지 않고 스스로 고사한 데에 이어, 숙종(지진희 분)의 세 번째 정실부인인 인원왕후(오연서 분)가 소론당·남인당과 합세하여 연잉군을 견제하는 움직임을 방어하고 있다. 드라마 속의 동이는 숙종의 변치 않는 사랑을 배경으로, 살벌한 궁정에서 '상생의 정치'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자신감 있게 펼쳐나가고 있다.

 

위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드라마 속 상황에 불과하다. 인현왕후·장희빈 사후에 최후의 승자가 된 최숙빈이 처한 실제의 상황은 드라마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가 처한 상항은 한마디로 '쓸쓸함+씁쓸함'이었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초래되었을까?

 

장희빈 죽은 뒤, 최숙빈은 궁 사람이 아니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죽은 이듬해인 숙종 28년(1702)에 내명부(內命婦) 즉 '왕궁 여인들의 조직'은 숙종 임금의 결단에 의해 대대적으로 개편되었다. 이 해 9월 김주신의 딸인 인원왕후가 세 번째 정비(정실부인)가 된 데에 이어, 10월에는 후궁들인 김씨·박씨·유씨의 품계가 동시에 격상되었다. 이로부터 3년 뒤인 숙종 31년(1705)에는 김씨 성을 가진 또 다른 여인이 종4품 숙원에 책봉되었다.

 

이렇게 인현왕후·장희빈·최숙빈의 구도가 전격 해체되고 인원왕후 중심의 새로운 내명부가 출현하는 과정에서, 최후의 승자 최숙빈은 궐내의 입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숙종실록>을 토대로 할 때, 최숙빈은 장희빈이 죽은 숙종 27년(1701) 10월부터 숙종 30년(1704) 4월 사이의 어느 시점엔가 왕궁을 떠나 이현궁(梨峴宮)으로 거처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이현궁의 '궁'은 '왕의 집'을 가리키지 않고 '왕실 구성원의 집'을 가리킨다. 이현궁은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의동에 있었다. 왕실의 사당인 종묘의 동남쪽에 위치했던 것이다. 서울지하철 1호선의 종로3가역과 종로5가역의 중간쯤에 이현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숙빈이 기거하면서부터 이현궁은 숙빈방(淑嬪房)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이곳은 오랫동안 최숙빈의 집이 되었다. 그는 32세 혹은 35세부터 숙종 및 연잉군과 떨어져 이곳 숙빈방에서 외롭게 살게 되었다. 여인천하에서 승리하고도, 그는 쓸쓸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후궁은 중전될 수 없다"는 숙종의 권력욕 때문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죽은 뒤에 최숙빈이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기는커녕 도리어 궐에서 내쳐지게 된 것은 숙종의 권력욕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숙종은 조정이든 궁정이든 간에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당파나 인물이 출현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숙종은 인현왕후·장희빈 사후에 궁정에서 최숙빈의 영향력이 극대화되는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장희빈이 죽기 전날이라서 장희빈이 더 이상 중전이 될 가망이 없는 상태에서 숙종이 "앞으로는 후궁이 중전이 될 수 없도록 한다"는 왕명을 제정한 것은 유력한 중전 후보였던 최숙빈을 사실상 겨냥한 조치였다.

 

이 같은 숙종의 조치를 되새기고 되새기면서 최숙빈이 얼마나 많이 씁쓸해 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장희빈을 중전에서 끌어내리고 죽음으로 내모는 과정에서 숙종은 항상 최숙빈의 보고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그렇게 자신을 무조건 믿어주던 숙종이 인현왕후·장희빈 사후에 자신을 전격적으로 내쳤다는 사실을, 최숙빈은 처음 한동안은 제대로 실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숙종이 평소 자신을 신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을 경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최숙빈을 더욱 더 괴롭게 했을 것이다. 감옥만큼 고독한 숙빈방에서, 최숙빈은 숙종과의 이별로 인한 쓸쓸함보다는 숙종의 배신으로 인한 씁쓸함에 더욱 더 괴로워했을지 모른다. 

 

한편, 최숙빈의 아들인 연잉군은 11세 때인 숙종 30년(1704)에 서종제의 딸(훗날의 정성왕후)과 혼례식을 치렀다. 장희빈이 죽은 지 3년 뒤의 일이었다. 이 혼인을 계기로 연잉군의 거처는 왕궁에서 창의궁(彰義宮)으로 바뀌게 되었다. 창의궁은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에 있었다. 경복궁의 왼쪽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숙종은 왜 숙빈의 거처를 옮겼을까

 

 

그럼, 최숙빈이 왕궁 밖에 나가 있었던 동안에 그와 숙종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드라마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가 변치 않았던 것처럼 묘사되었다. 하지만, <숙종실록>을 보면, 두 사람의 관계가 상당히 소원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둘의 관계가 소원했다"는 기록이 <숙종실록>에 명시된 것은 아니다. <숙종실록>에 실린 숙종의 코멘트를 통해 그런 분위기를 포착할 수 있다.

 

최숙빈이 왕궁을 떠난 지 7년 혹은 10년째 되는 해인 숙종 37년(1711) 6월 22일에 숙종은 최숙빈과 관련된 전교(왕명)를 하달했다. 이때 최숙빈의 나이는 42세였다. 고독의 분위기 속에서 이미 나이 40을 넘긴 뒤였다. 전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의 이현궁은 오늘날의 숙빈방이다. 주위가 넓고 커서 다른 궁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여서, 연(임금의 가마)을 타고 지나갈 때마다 마음이 항상 미안했다. 이제는 (최숙빈의 집을) 연잉군의 집으로 정했으니, 이 집에 동거해도 불가할 것이 없다."

 

최숙빈의 거처를 창의궁(연잉군의 거처)으로 옮기라는 전교였다. 숙빈방이 너무 넓고 커서 그 앞을 지날 때마다 항상 마음이 아팠기에 최숙빈을 연잉군과 함께 살도록 하려고 이런 조치를 내린다고 숙종은 말했다.

 

여기서 포착해야 할 것은, 그간 숙종이 최숙빈을 자주 찾지 않았다는 점이다. "연을 타고 지나갈 때마다 마음이 항상 미안했다"는 것은 숙빈방을 그냥 지나치기만 했을 뿐 그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상당히 소원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최숙빈은 자신과 아들이 함께 살 수 있도록 해준 숙종의 조치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물론 그는 연잉군 부부와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어 기쁘고 즐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숙종의 조치 뒤에 숨어 있는 진짜 이유 때문에 또 한번 씁쓸함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서인당의 힘을 빌려 장희빈을 중전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죽음으로까지 내몬 사실에서 느낄 수 있듯이, 최숙빈은 보통 사람들을 능가하는 정치감각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거처를 숙빈방에서 창의궁으로 옮긴 숙종의 조치에 담긴 진짜 이유에 대해서도 그는 곰곰이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최숙빈의 거처를 창의궁으로 옮기라는 전교의 진짜 메시지는 '최숙빈의 거처를 숙빈방에서 창의궁으로 옮겨 주라'가 아니라 '최숙빈의 거처인 숙빈방을 비워 주고 창의궁으로 옮겨 가라'였다. 너무 크고 넓은 곳에 최숙빈을 홀로 놔둔 것도 미안하지만, 그보다는 최숙빈 홀로 그런 궁을 차지하는 것은 낭비라는 인식에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이 점은 숙종의 전교를 역사에 기록한 사관(史官)이 숙종의 조치를 매우 칭송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이 조치에 대한 사관의 평가는 한마디로 '왕에게 사사로운 욕심이 없음을 보여주는 조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검약의 정신'을 왕궁의 여타 부분으로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인천하에서 이겼지만, 쓸쓸한 숙빈의 말년

 

숙종의 조치에 담긴 의미를 오늘날의 우리보다 훨씬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당시의 사관은, 숙종이 최숙빈의 거처를 옮긴 것은 최숙빈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왕실 재정을 긴축하기 위해서였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숙종의 조치를 칭송했던 것이다. 단순히 후궁의 쓸쓸함을 더해주고자 그런 전교를 내렸다면, 사관들이 굳이 그렇게까지 칭송할 필요는 없었다.

 

숙종이 검약을 실천했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필이면 최숙빈의 거처를 상대로 그런 검약을 실천했다는 점이다. 표면상으로는 최숙빈 모자가 함께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재정 긴축을 명분으로 최숙빈의 거처를 축소했던 것이다. 최숙빈을 왕궁에서 내보낸 데에 이어 그의 거처까지 축소함으로써, 숙종은 최숙빈의 위상을 또 한번 떨어뜨린 것이다. 

 

최숙빈 역시 왕실재정을 위한 대의명분에는 동의했겠지만, 재정긴축을 명분으로 하필이면 자신의 집을 축소시킨 사실을 곰곰이 음미해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입지를 또 한 번 축소시킨 숙종을 생각하면서, 그는 한층 더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드라마 속의 동이는 장희빈 사후에도 숙종의 변함없는 사랑을 누리고 있지만, 실제의 최숙빈은 위와 같이 신체적·정신적으로 숙종과 격리되어 쓸쓸함과 씁쓸함을 느끼며 여생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모두 죽음으로써 최숙빈만이 홀로 남아 최후의 승자가 되었지만, 그 승리는 그에게 쓸쓸함과 씁쓸함으로 채워진 또 다른 삶의 시작이 되었다. 어쩌면 그는 장희빈과 더불어 치열하게 싸우던 지난 시절을 몹시 그리워하며 숙빈방과 창의궁에서의 삶을 보냈는지도 모른다.  

 

(다음 주에는 <동이> 편의 마지막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태그:#동이, #최숙빈, #숙빈방, #이현궁, #창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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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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