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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20일)는 오후에 기사를 송고하고 집에서 쉬려니까 엉덩이가 들썩여서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추석을 이틀 앞두고 재래시장 풍경이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해서 카메라와 수첩을 챙겨 밖으로 나갔지요.

철부지 시절부터 사람냄새를 좋아했던 저는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복잡한 시장을 통해 등·하교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호객행위를 위한 고함소리도 시끄럽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지금도 형님댁에 가려면 시장을 끼고 있는 길을 이용합니다.

채소장수 할머니.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기보다, 세월을 기다리는 할머니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았습니다.
 채소장수 할머니.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기보다, 세월을 기다리는 할머니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았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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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리니까 어둑어둑했습니다. 저녁 7시도 안 되었으니까 한여름 같았으면 대낮처럼 밝았어야 하는데, 해가 짧아진 것을 실감했습니다. 고추, 가지, 깻잎, 약초 등을 길가에 진열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할머니의 표정과 앉은 자세에서 장사가 지지리도 안 된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다 지쳤을 때 나오는 자세이고 표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할머니처럼 손님을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말을 붙이기도 어렵더군요.

할머니와 마주앉아 있는 아주머니에게 "고구마순 얼마입니까?" 하고 물으니까 한 단에 2500원이라고 하더군요. 비싸다고 했더니 "아자씨도, 쪼꼬만 배추 한 포기도 5천 원인디 이걸 비싸다고 허믄 어치게 혀유!"라고 하더군요. 그냥 값을 물어봤을 뿐인데 미안했습니다. 

"할머니도 고구마순 다듬어서 파시지 그래요?"하고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더니 "이 나이에 무슨 존 꼴을 더 보겄다고 무겁게 이것저것 들고 댕긴데유"라고 하시기에 "오늘 뭐 좀 팔았습니까?" 하고 다시 물으니까 "손님이 와야 팔든지 말든지 허쥬"라고 하더군요. 설 명절 이후 8개월 넘게 기다려온 대목 장사인데, 할머니는 포기한 것 같았습니다.

길가에 널려 있는 햇과일들. 초라하게 보이는 햇과일들이 사라져가는 추석문화를 상징하는 것 같았습니다.
 길가에 널려 있는 햇과일들. 초라하게 보이는 햇과일들이 사라져가는 추석문화를 상징하는 것 같았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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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를 뒤로하고 단감, 사과, 배 등을 바구니에 담아 땅바닥에 진열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20대 여성에게 다가갔습니다. 배 한 상자에 얼마냐고 물었더니 10개 들이가 2만5천 원이라며 달고 시원하니까 사라는 거였습니다.

작년에는 얼마였느냐며 과일 사진을 찍으니까 표정이 바뀌면서 며칠 동안 어머니 장사를 도와주고 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시청에서 조사 나온 줄 알고 조심하는 눈치였습니다. 행상하는 사람의 불안감은 모두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과는 다섯 개, 배는 네 개에 1만 원씩 팔고, 단감은 한 바구니에 5천 원이었습니다. 얼마 전 봤던 태풍 '콘파스'로 모든 과일이 낙과했다는 뉴스가 떠오르더군요. 감을 직접 우려서 파는 감독(감도가)에도 추석이 코앞인데 영업하는 가게가 한 곳도 없으니 무슨 부연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작년 가을에는 들러서 취재도 하고 그랬는데···.

한가한 신발가게. 고무신 한 켤레에 잠을 이루지 못하던 시절이 아련히 떠올랐습니다.
 한가한 신발가게. 고무신 한 켤레에 잠을 이루지 못하던 시절이 아련히 떠올랐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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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을 역전시장 안으로 옮겼습니다. 시장은 대목인데도 한산했습니다. 입구에 있는 신발 가게 진열대에는 다양한 모양, 다양한 색깔의 운동화들이 백열등 불빛 아래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더군요. 보기 민망할 정도로 한가했지만, 아저씨·아주머니가 TV를 시청하며 웃는 모습에서 여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고무신과 운동화만 진열해놓고 팔던 60년대는 명절 때 바쁜 가게 중의 하나로 고무신 가게가 꼽혔습니다. 고향집 뒷골목 대곤이 어머니가 경영하는 고무신 가게도 이맘때쯤이면 항상 붐볐거든요. 여름에 땀나면 손에 들고 뛰어야 하는 미끄러운 고무신만 신다가 검정 운동화 한 켤레 받아들고 기뻐하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채소가게. 주인아주머니는 배추가 금값이라니까, 모두 배추를 심는 바람에 김장철에는 처치하기 어려울 정도로 쏟아질 거라고 걱정하더군요.
 채소가게. 주인아주머니는 배추가 금값이라니까, 모두 배추를 심는 바람에 김장철에는 처치하기 어려울 정도로 쏟아질 거라고 걱정하더군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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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을 채소 가게로 옮겼는데요. 제수용 고사리와 도라지를 만지작거리던 아주머니에게 대목 경기를 물으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내둘렀습니다. 대목이고 뭐고 사람이 와야 해먹는 거 아니냐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배추 한 포기에 얼마냐고 물으니까 진열되어 있던 배추 한 포기를 덥석 집더니 "이거 5천언씩 팔었는디 4천언에 가져가셔유!"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값을 알아보려고 나왔다고 하니까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래도 대답은 친절하게 해주더군요. 

한 묶음에 1000원이던 호박잎은 2000원, 한 개 1000원이던 호박은 4000원, 한 포기 1500원이던 배추는 5000원, 한 개 1000원이던 무는 4000원 시금치 오이 등은 그나마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발길을 돌리는데, 옛날 아주머니들에게 자주 듣던 "이놈의 날씨가 사람 잡겄네!"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과일 가게의 햇대추와 햇밤. 날은 무덥지만, 햇과일에서 가을의 풍요를 느껴봅니다.
 과일 가게의 햇대추와 햇밤. 날은 무덥지만, 햇과일에서 가을의 풍요를 느껴봅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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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대추를 싸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아주머니에게 다가갔습니다. 어떻게 파느냐고 물으니까 손님인 줄 알았는지 모두 국내산이라 달고 맛있으니까 잡숴보라며 햇대추 하나를 집어주더군요. 정말로 당도가 높은지 맛을 보려다 실망할까 봐 사양했습니다.  

한국산이라고 써놓았기에 산지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충남 공주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상자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상자에는 '홍산'(충남 부여군에 속한 면)이라고 적혀 있더군요. 아주머니는 틀린 게 미안한지 겸연쩍어하는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밤은 한 되에 5천 원씩 팔고 있었는데요. 작년에 비해 밤은 40kg 1박스에 2만 원 올랐고, 대추는 10kg들이 한 박스에 1만 원 정도 올랐다며 "올해는 지사(제사) 상에 밤이랑 대추는 안 올리는 개비네유..."라며 불경기를 에둘러 탄식했습니다.

금방 쪄낸 송편. 향긋한 쑥 냄새와 예쁜 모양의 떡들이 구미를 당겼습니다.
 금방 쪄낸 송편. 향긋한 쑥 냄새와 예쁜 모양의 떡들이 구미를 당겼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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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떡집은 다른 가게에 비해 형편이 조금 나은 편이었습니다. 추석을 앞두고 송편이 가장 많이 팔리는데 개업식, 결혼식, 아이 돌이나 고희(古稀)를 준비하는 자녀들이 주문을 해오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시장 안에 있는 '골목 떡집'은 사위까지 나와서 일손을 돕고 있었는데요. 30년 전 시어머니가 집에서 손으로 만들어 팔아오다, 20년 전에 지금의 가게를 장만해서 영업을 해오고 있어서 단골손님이 많다고 했습니다. 

20년 전 시어머니에게 기술을 전수받기 시작했다는 주인아주머니는 아이들 간식으로는 떡이 으뜸일 것이라며 신토불이 떡 예찬에 열을 올렸습니다. 아주머니는 그날그날 필요한 만큼 만들어 파는 것을 떡이 좋은 또 다른 이유로 꼽았습니다. 고기로 말하면 싱싱하다는 것이지요.

송편과 인절미는 1kg에 7000원, 작은 비닐 상자에 든 경단과 찹쌀떡은 3000원, 시금자(검은 깨)떡 한 조각에 5000원, 팥떡, 콩떡은 4000원, 백설기는 3000원씩 팔았습니다. 작년과 비교해보니까 송편과 인절미는 1000원이 올랐고, 경단은 50%가 올랐더군요.

명태장수 아저씨. 단대목이 되니까 평소보다 많이 팔린다고 좋아하면서도 명절 후를 걱정했습니다.
 명태장수 아저씨. 단대목이 되니까 평소보다 많이 팔린다고 좋아하면서도 명절 후를 걱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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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집에서 나와 명태를 포 떠서 파는 아저씨에게 다가가 "추석 대목장 좀 보셨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대목요? 추석 대목이 아니라, 죽을 대목이네유!"라며 불경기를 죽음에 빗대서 표현했습니다. 얼마나 불경기면 저렇게 죽겠다고 하겠느냐는 동정 어린 푸념이 절로 나오더군요.

무게가 5kg-6kg 정도 나가는 명태 한 마리 포 떠주고 6000원씩 받는데, 그것도 깎자는 손님이 있다면서 어이없어했습니다. 평일에는 네다섯 마리 팔기도 하고, 두세 마리 팔고 마는 날도 있었는데 추석을 앞두고 15-20마리씩 나간다며 웃었습니다.     

쉰한 살이라는 생선장수는 그 자리에서 분식집을 운영하다 12년 전에 생선장수로 전업했는데 올해처럼 불경기는 처음 본다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생선은 채소보다 오르지 않았는데도 손님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손님이 없는 게 아니라 재래시장을 이용하는 사람이 줄어드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아저씨 말이 정답이네유"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건어물 가게. 상한가를 치고 있는 쥐포에서 격세지감을 느꼈습니다. 한 마리에 500원으로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건어물 가게. 상한가를 치고 있는 쥐포에서 격세지감을 느꼈습니다. 한 마리에 500원으로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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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남짓 시장 상인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건어물 가게에 들렀다가 오징어과 생선은 구경하기도 어렵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다 수온이 상승해서인지 추운 지방에서도 잡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주인은 오징어 상품 스무 마리에 4만5천 원으로 작년보다 3배 올랐다며 손님에게 말하기조차 무섭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흔하던 쥐포는 아홉 마리에 1만5000원으로 상한가를 치고 있었고, 맥주 안주로 으뜸인 '한치' 포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단대목이고 밤 8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시장에서 고함은커녕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습니다. 문을 닫은 가게도 있고, 시장을 끼고 있는 거리에서도 오가는 사람을 구경하기 힘들어 명절 분위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더군요.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각종 의류를 시장 입구 길바닥에 쌓아놓고 손바닥으로 박자를 맞춰가며 "자~아 무조건 1000원, 고~올라 골라!" 가락으로 손님을 부르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는데요. 돌아오는 발길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재래시장, #추석,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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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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