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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과 경술국치 100년을 앞두고, 우리 근현대사에 가장 위대한 애국자 안중근 의사의 유적지인 러시아 크라스키노,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포브라니치나야, 중국 쑤이펀허, 하얼빈, 지야이지스고(채가구), 장춘, 다롄, 뤼순 등지를 지난해 10월 26일부터 11월 3일까지 아흐레간 답사하였습니다. 귀국한 뒤 안중근 의사 순국날인 2010년 3월 26일에 맞춰 눈빛출판사에서 <영웅 안중근>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습니다.

2010년 경술국치 100년에 즈음하여 <영웅 안중근>의 생애를 다시 조명하는 게 매우 의미 있는 일로 여겨져, 이미 출판된 원고를 다소 손보아 재편집하고, 한정된 책의 지면 사정상 미처 넣지 못한 숱한 자료사진을 다양하게 넣어 2010년 11월 20일까지 43회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 기자말

일제는 안 의사를 뤼순 감옥에 가뒀지만 안 의사는 그 감옥을 극락으로 여기며 지내고 있는 심경을 이 유묵에 담았다. 그 기개와 자긍심에 삼가 머리를 조아린다.
▲ 유묵 '극락', 일제는 안 의사를 뤼순 감옥에 가뒀지만 안 의사는 그 감옥을 극락으로 여기며 지내고 있는 심경을 이 유묵에 담았다. 그 기개와 자긍심에 삼가 머리를 조아린다.
ⓒ 눈빛 <대한국인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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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공해상에서 

망망대해다. 동해바닷물이 검푸르게 짙다. 새삼 넓은 대자연에 내 한 몸이 작게 보이고 겸손해진다. 우주 영겁으로 볼 때, 나는 몹시 작고 내 평생조차도 잠깐 동안 아닌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대단한 양 으스대고, 천년만년 살고자 한다.

한러국경지대의 동해바다로 멀리 북한 산하가 가물거린다.
▲ 한러 국경지대 한러국경지대의 동해바다로 멀리 북한 산하가 가물거린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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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바닷바람과 짭짤한 바다냄새를 실컷 들이킨 뒤 객실로 돌아왔다. 객실은 혼자이기에 내 침대 구석자리에 놓은 짐들을 다른 침대에 옮겨 놓은 뒤 책을 펼쳤다. 그런데 눈은 자꾸만 유리창 너머 바다로 향했다.

내가 쓰고 있는 객실은 동춘호 오른편이라 배가 북으로 항해하니까 일본 쪽만 바라 보였다. 혹이나 북한 산하가 멀리서나마 보일까 다시 갑판 위에 올랐다. 하지만 동서남북 어디나 바다만 보일 뿐, 언저리를 아무리 살펴도 북녘 땅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야 보따리 무역상들을 통해 안 사실이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남북관계가 악화되자, 동춘호 항로도 공해상으로 더 멀리 나가 항해하기에 북한과는 거리가 더 멀어졌고 항해시간도 한 시간 남짓 더 길어졌다고 했다.

바다만 바라보기도 싫증이 나서 선내 시설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동춘호는 선장(船長, 배의 길이) 132미터에 선폭(船幅, 배의 너비) 23미터 12,000여 톤으로 승객 600명을 실어 나른다고 하는데, 이날은 승객이 일백 명 남짓해 보였다. 대부분 여객선이 그러하듯 식당, 매점, 면세점, 전자오락실, 목욕탕 등이 한일페리와 비슷했다. 배가 오래된 탓인지 한일 간을 오가는 카멜리온 호보다 배 안 시설이 훨씬 낡고 칙칙했다. 

선상토론

마침 저녁 식사시간이라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스낵코너를 지나는데 속초항 대합실에서 만난 보따리 무역상 여인이 친구와 얘기를 하다가 벌떡 일어나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앞자리에 앉으라 하였다.

내가 앞자리에 앉자 그는 자기 친구를 소개했다. 친구도 중국 훈춘에 사는데 자기처럼 한국을 오가는 무역상이라고 했다. 그는 어찌나 큰소리로 "이분이 안중근 의사 유적지를 찾아가는 분이다"라고 나를 소개하는지, 건너편 자리에 앉아 텔레비전을 바라보던 한 부인도 그 말을 듣고는 얼른 우리 자리로 건너 왔다.

세 사람이 모두 오늘이 안중근 의사 거사 100돌인 것을 뉴스를 통해 알았다고 하고는 나에게 집중으로 질문했다. 먼저 남편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목회를 한다는 목사님 부인이 물었다.

"안중근 의사가 거사할 때 몇 살이었습니까?"
"1879년생으로 그날이 1909년 10월 26일이었으니까 만 30세였습니다."
"네에!? 겨우 서른 살 청년이 그런 큰 일을 하다니요? 정말 놀랍고 장한 일입니다."

"왜 조선이 일본에게 먹혔습니까?"
"여러 원인이 있지만 가장 큰 요인은 우리나라 지도층의 부패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요즘 뉴스를 보면 고위층의 부패가 판을 치더구만요."

세 사람은 내가 대단한 역사학자라도 되는 듯 왜 조선이 망했는지, 일제 35년은 어땠는지 등을 꼬치꼬치 물었다. 내가 아는 대로 성의껏 답을 하자 그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처 몰랐다는 듯, 내 얘기에 감탄하고는 굳이 커피까지 사다가 대접했다. 그런데 훈춘에 산다는 친구 되는 여자의 질문이 점차 예리해지고 현대사로 옮겨왔다.

국력이 강해지면 자주국이 된다

"제가 연변에서 학교 다닐 때 배우기는 남조선은 미제 식민지라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남쪽에 와서 보니까 그렇게 보였습니까?"
"그렇게 보이지 않더구만요."
"그게 답입니다. 내 눈으로 본 것보다 더 정확한 답은 없지요. 나라도 국력이 강해지면 저절로 자주국이 되고, 개인도 능력이 있으면 종살이에서 벗어나 자립하기 마련 아닙니까?"

세 여인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공감하는 듯했다. 말이 많다보면 실언이 따르기 마련이다. 고심하던 차 마침 그때 속초 대합실에서 만난 훈춘 여인이 스낵코너 한 편에 있는 텔레비전에서 일일연속극이 나오자 간밤에 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그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선상 난상토론은 거기서 그쳤다. 다른 두 여인도 뒤따라 텔레비전 쪽으로 자리를 옮기에 나도 객실로 돌아왔다.

배가 계속 북진하는데 바다에도 여객선에도 비바람이 세찼다. 동해 바다의 너울은 허연 혓바닥을 내밀며 삼킬 듯이 여객선에 부딪쳤다. 침대에서 윗몸을 벽에 기댄 채 안중근 의사 숭모회에서 펴낸 <대한의 영웅 안중근 의사>와 <안중근 의사 자서전>, 그리고 나와 친분이 두터웠던 나명순 형이 안중근 거사와 순국 현장을 발품을 팔아 쓴 세계일보사 발간 <대한국인 안중근>을 펴들었다.

<대한의 영웅 안중근 의사>는 안중근 의사 생애 전반이 일목요연하게 약술돼 있어 좋았고, <안중근 의사 자서전>은 안중근 의사를 깊이 이해하는데 필독서요, 세계일보사 발행 <대한국인 안중근>은 이번 답사여행의 길잡이로 책장을 넘길 때마다 고인이 된 나명순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안중근 행장(3)

한국 침략의 원흉으로 일본국 총리대신을 네 차례 역임했다.
▲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 한국 침략의 원흉으로 일본국 총리대신을 네 차례 역임했다.
ⓒ 눈빛 <대한국인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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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뒤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으로 건너와서 정부를 위협하여 을사오조약을 강제로 맺어 삼천리강산과 이천만 인심을 뒤흔들어 (백성들이)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이 되었다. 이런 일을 당하자 아버님께서는 마음의 울분을 참지 못하여 병이 더욱 깊어졌다. 나는 아버님과 은밀히 상의하였다.

"일본과 러시아가 개전할 당시에 일본의 선전 포고문 가운데는 동양의 평화를 위하고 한국의 독립을 굳건히 하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일본이 그 같은 신의를 저버리고 야심적인 책략만을 자행하고 있으니, 이는 모두 이토의 정략 때문입니다. (그들은) 먼저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고, 다음으로 뜻 있는 선비 무리를 없앤 뒤에 강토를 삼키려는 것이 현재 나라를 망치는 새로운 수법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속히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큰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인데, 어찌 손을 놓은 채 아무 방책도 없이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의거(義擧)를 일으켜 이토의 정책을 반대한들 (군사력의) 강약이 같지 않으니 부질없이 (우리 의병만) 죽을 뿐, 아무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요즘 들리는 말에 따르면, 청나라 산동(山東)과 상해(上海) 등지에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하니, 우리 집안도 모두 그곳으로 옮겨 살다가 앞뒤 방책을 꾀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가 먼저 그곳으로 가서 살펴 본 뒤에 돌아올 테니 아버님께서는 그동안에 몰래 짐을 꾸려 식구들을 데리고 진남포로 가서 기다리시다가 제가 돌아온 다음에 다시 의논해서 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부자사이에 계획이 정해졌다.
 - <안응칠 역사> 96~99쪽

삼흥, 돈의학교 교장 시절의 안중근 선생
▲ 진남포에서 육영사업을 하던 시절의 안중근 삼흥, 돈의학교 교장 시절의 안중근 선생
ⓒ 눈빛 <대한국인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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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 도착한 안중근은 우연히도 황해도에서 오랫동안 선교활동을 같이한 프랑스인 르각(곽원량) 신부를 만나 그의 조언으로 국권회복을 위하여 일단 애국계몽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그해 12월 고향으로 돌아온 안중근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장남으로 정성을 다하여 장례를 다시 올리고 나라의 앞날을 염려하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육영사업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1906년 3월, 안중근은 가산을 정리한 뒤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이주하여 삼흥(三興)학교와 돈의(敦義)학교를 세우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안중근은 교육입국(敎育立國, 교육을 통하여 나라를 튼튼하게 세움)에 힘쓰는 한편, 안창호(安昌浩), 이준(李儁)과 같은 애국지사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여는 등, 애국계몽운동에 온 힘을 쏟았다.

다른 한편 안중근은 대구의 서상돈(徐相敦)이 일으킨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선도하여 평양에서 그 취지를 여러 백성들에게 권고하고, 자신 가족부터 솔선수범하기로 결정, 금은반지 장신구 비녀 등을 헌납하기도 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초대 조선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정미조약)을 강요하며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런가 하면 산림과 광산, 철도를 빼앗는 등, 한국의 식민지화를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한일 완전 병탄 계획을 은밀히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제에게 강제 폐위당하다. 나라의 힘이 약한 군왕이 당한 치욕이었다.
▲ 광무(고종) 황제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제에게 강제 폐위당하다. 나라의 힘이 약한 군왕이 당한 치욕이었다.
ⓒ 눈빛 <대한국인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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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본의 통감정치에 조국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처럼 놓이게 되자 안중근은 마침내 "교육으로는 백년대계는 가능하되, 당장 망해가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결단을 내렸다.

 안중근은 국내 투쟁의 한계를 느끼고 해외 망명의 길을 떠났다. 그해 가을 연해주로 가고자 원산에서 청진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청진에서 일본 경찰의 경계가 삼엄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바닷길을 포기하고 육로를 택해 간도로 잠입했다. 그때 안중근은 29세였다.
 - <대한의 영웅> 15~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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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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