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대단한 책이 하나 나왔다.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에서 활동하는 한형식씨가 자신의 강의를 정리해서 출간한 <맑스주의 역사 강의>(그린비 펴냄)가 그것이다. 물론 대단한 책이라고 했을 때, 그 '대단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그 단어를 듣는 사람의 사이에 떠올리는 이미지가 판이할 수 있다. '대단히' 만족스러운 책도 있지만 '대단히' 실망스러운 책도 있지 않겠나. 그래서 이 책이 왜 대단한지에 대해서 약간은 자세하게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첫째, 이 책은 '대단히' 쉽다. 맑스주의 역사를 다룬 책이라고 한다면 무척 어렵고 난해한 책이라고 지레짐작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한형식씨의 강의 녹취를 바탕으로 내용을 구성했다는 이 책은, 바로 앞에서 저자의 강의를 듣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맑스 이전의 공상적 사회주의부터 시작해서 맑스 엥겔스의 초기 및 후기 사상을 거쳐 제2인터내셔널 시절의 논쟁들을 족집게 과외처럼 짚어주고, 러시아 혁명과 레닌, 그리고 스탈린을 거쳐 중국혁명과 마오주의를 넘나드는 역사적 과정들이 이 책에는 마치 잘 만들어진 한편의 다큐멘터리 필름처럼 펼쳐진다. 이렇게 폭넓고 다양한 주제들의 구슬들을 하나로 꿰어서 멋진 목걸이로 만드는 저자 한형식의 내공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둘째, 이 책은 '대단히' 관점이 좋다. 이것은 어쩌면 필자의 주관이 들어간 평가일지도 모르겠지만, 특히 스탈린을 다룬 부분에서 고개가 절로 끄덕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스탈린이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히틀러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와 비슷한 반응을 나타내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스탈린의 이미지는 냉전시절 철저하게 서방 측에 의해서 빚어진 인공물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이 책에서는 스탈린이라는 소련의 지도자를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논쟁 속에서 조명하면서 그동안 스탈린에게 씌워졌던 오해와 편견의 가면들을 하나씩 벗겨낸다. 팩트들을 담담하게 서술하면서 합리적인 결론과 판단을 이끌어내는 저자 한형식의 불편부당함은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빛낸다.
셋째, 이 책은 '대단히' 시의적절하다. 무슨 맑스를 다룬 책이 시의적절하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북한이나 쿠바 같은 몇몇 사회주의 국가들이 그나마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시대에 맑스주의의 역사를 다룬다는 것은 그저 옛 향수를 그리워하는 좌파 지식인의 사변놀음 아니냐고?
지금 미국의 뒷마당이었던 라틴 아메리카는 그야말로 사회주의 열풍이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 얼마 전에 한국을 방문한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 등 민주적으로 선출된 중남미의 대통령들은 공공연하게 21세기 사회주의를 주장하면서 무상의료 무상교육의 복지 천국을 실현해 나가고 있다.
비단 중남미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각지에서 막가파식 신자유주의 거품경제의 후폭풍을 거치면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좀 더 평등하고 정의가 살아있는 세상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다. 일본의 자민당 정권이 무너진 것도, 미국에서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것도 이런 시대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최근에 마르크스 <자본론>이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지 않은가.
넷째, 이 책은 '대단히' 유연하다. 맑스주의를 하나의 형이상학적 사고틀, 그러니까 고정된 이데올로기 체계로 보지 않고 물적 토대의 변화와 역사적 논쟁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는, 펄펄 살아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상으로 파악한다. 이런 유연함 때문인지 이 책의 마지막 장은 맑스주의의 전통 속에서 아시아 공산주의의 위상을 조명해 보려는 의미 있는 시도를 보여준다. 물론 본격적인 연구를 담은 것은 아니지만 아시아 공산주의의 일반성과 구체성을 맑스주의의 전통 속에서 풀어보려는 진지한 고민은, 앞으로 저자 한형식의 후속 작업에 큰 기대를 갖게 만든다.
필자의 편협함 때문인지 아니면 오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에는 패션좌파, 강남좌파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좌파 사상이 그 무슨 유한계급의 액세서리 정도 취급을 받는 것 같다. 물론 그런 방식으로라도 진보적 좌파적 사상이 알려지면 필자로서는 대환영이다.
하지만 맑스주의는 단순히 액세서리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철학이다. 액세서리에 맞는 책도 필요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철학이라는 위상에 맞는 책도 필요하다. 그런 위상에 맞는 '대단한' 책이 나와서 정말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