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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살 무렵부터 떡을 만들었으니 살아온 날 대부분이 떡과 보낸 날이다. 부평시장에서 '청주떡집'을 운영하고 있는 남수현(53)씨는 열아홉 살께 충북 청주에서 올라와 지금까지 부평시장을 지키고 있다.

아내 임행덕(50)씨는 떡의 '떡'자에도 관심이 없을 때 지인의 소개로 남편 남씨를 만나 떡 빼고 말 할 수 없는 삶을 20년 넘게 살고 있다. 남편이 만드는 떡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자랑하는 임씨의 말이 살갑게 느껴지는 것은 세월의 힘이라 하겠다.

"전에는 떡집을 '떡 방앗간'이라고 했지"

"청주에서 살고 있을 때 친구가 아는 농산물유통업(에 종사하는) 선배가 이 일을 주선해 줬다. 당시 그 사람이 고추 등을 매입해 도시에서 유통하는 일에 종사했는데, 말린 고추를 가져가면 이를 빻고 납품할 사람이 필요하다면서 나를 고용했다. 그렇게 시작한 곳이 '효성방앗간'이었다"

아내 임씨는 “진짜 떡의 ‘떡’자도 모르고 결혼했다. 성실한 총각이라기에 결혼했는데, 막상 떡집에 와보니 일이 진짜 많았다. 물론 지금도 일이 많다. 그래도 남편 떡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떡이라고 했다.
▲ 부평시장 청주떡집 아내 임씨는 “진짜 떡의 ‘떡’자도 모르고 결혼했다. 성실한 총각이라기에 결혼했는데, 막상 떡집에 와보니 일이 진짜 많았다. 물론 지금도 일이 많다. 그래도 남편 떡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떡이라고 했다.
ⓒ 김갑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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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떡집은 이제 떡만을 취급한다. 몇 년 전부터 떡집이 '브랜드화' 되면서 곳곳에 프랜차이즈 떡집이 생겨났지만, 떡집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니라 방앗간이 사실상 떡집이었다. 방앗간은 떡도 만들지만 그 외에 참깨와 들깨를 빻아 기름을 짜고, 말린 고추를 곱게 빻아 고춧가루를 만들던 곳이다.

열아홉 살 무렵 방앗간에 취직한 남씨는 그렇게 떡집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군대 가기 전까지 방앗간에서 일하며 고춧가루 만드는 일부터 기름 짜는 일, 떡 만드는 일을 두루 익혔다. 군대에 갔다 와서도 떡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남씨는 "기틀을 잡아야 했는데 20대인 내가 가진 게 뭐 있었나? 그래도 군에 가기 전 일했던 곳에서 예쁘게 봐줬는지 방앗간에서 떡만을 분리해 내게 인수해줬다. 그때부터 내 떡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셈인데, 고마운 분들이다. 내가 일하던 곳은 '삼진떡방앗간'이었는데 지금은 '삼진방앗간'으로 바뀌었고, 고춧가루만 만들고 있다"고 들려줬다.

부평시장에는 당시 떡집이 두 곳밖에 없었다. 비록 총각이긴 했으나 총각이 만들어낸 '떡 맛'이 아줌마들의 입맛을 움직였다. 맛있는 떡을 만드는 성실한 총각으로 부평시장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렇게 6년을 더 방앗간에서 일한 후 아내 임씨를 만나, 이름도 청주떡집으로 바꾸고 그만의 떡집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아내 임씨는 "진짜 떡의 '떡'자도 모르고 결혼했다. 성실한 총각이라기에 결혼했는데, 막상 떡집에 와보니 일이 진짜 많았다. 물론 지금도 일이 많다. 쌀을 씻어 앉히는 것부터 설거지까지 정신없이 신혼 초를 보냈다. 그렇게 20년을 보내고 나니 떡 만드는 일이 이제 몸에 배였지만, 사실 힘들었고 그나마 장사가 잘 돼 재미도 있었다"고 말했다.

청주떡집이 잘나가던 시절, 추석과 설 같은 명절대목 무렵에는 하루 소화하는 쌀이 무려 80㎏짜리 열두 가마니에 달했다. 대목에 보통 백 가마니의 쌀을 가지고 떡을 뺄 정도였으니, 나름 돈 좀 벌었던 80~90년대였다.

'떡 장사'하며, '학사모' 쓰고 '학장상'도 받고

90년대까지 청주떡집은 쉴 틈이 없었다. 여기저기 납품하느라 떡 찌고 떡 빼는 기계는 방앗간 방아처럼 연신 돌아야했다. 가래떡, 바람떡, 꿀떡, 모찌, 백설기, 경단, 인절미, 약식, 떡떡떡….

청주떡집은 2000년대 들어서며 매출규모가 줄었다. 전에는 학교급식과 지역 웨딩홀 뷔페식당에 떡을 납품하며 쉴 틈이 없었지만, 자의반 타의반으로 납품을 중단한 뒤 지금은 기업이나 단체의 기념 떡과 단골손님의 주문 제작을 받고 있다.

남씨는 "학교에 납품하는 급식업체가 떡을 주문하면 우리가 납품하는 방식이었다. 떡 맛이 좋고, 떡도 다양하게 맞춰주니 인기가 좋았다. 그런데 우리가 납품했던 업체가 부도 위기에 몰리자 공급을 줄였고, 결국 업체가 부도나면서 급식과 멀어지게 됐다"고 말했다.

청주떡집과 같은 지역의 떡집이 시장에서 밀려난 데는 식품대기업의 진출도 한몫했다. 대기업들이 학교급식에 뛰어 들면서 자본력과 시설규모가 약한 지역의 소규모 떡집들은 밀려났다.

해썹(=HACCP) 기준 등이 강화되면서 시장의 영세업체들은 자연스럽게 밀려났다. 또한 지역에서 명성을 구가했던 행복웨딩홀, 개선문예식장, 백마웨딩홀, 한길웨딩홀 등이 서울자본에 밀려나면서 웨딩홀 뷔페에 납품하던 떡도 줄었다.

매출규모가 줄긴 했지만, 부부는 가게를 찾는 단골손님들이 있어 떡 만드는 삶이 즐겁다. 오히려 단골손님들을 기반으로 주문 제작과 소매를 넓혀가려 노력 중이다. 떡집 경영을 위해 부부는 나란히 상인대학을 수강하며 점포경영을 배우기도 했다.

남편 남씨가 먼저 지난해에 상인대학에 들어가 손님맞이 교육, 점포 전시방법 등을 배웠고, 올해 열린 2기에는 아내 임씨가 등록해 상인대학을 수료했다. 5월부터 8월까지 바쁜 장사일 속에서 졸음과 싸워가며 공부했고, 임씨는 졸업생 가운데 수석에 해당하는 명예학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임씨는 "남편이 지난해 들었으니, 나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큰 기대를 안 하고 들었지만 주변상인들이 꼭 들었으면 할 정도로 내용이 좋다. 물론 강의 내용이 다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도움이 된다"며 "전에는 손님들에게 인사도 잘 안 하고, 입도 잘 안 떨어졌는데 신기하게 이제 입이 떨어진다. 시쳇말로 '진상'손님이 올 경우 불친절해지려다가도 번뜩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청주떡집의 떡은 여전히 남수현씨가 간을 본다. 제아무리 바빠도 간만큼은 남편이 본다고 했다. 부부이지만 일하는 현장에선 각 역할이 명확하다. 남편이 만드는 떡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아내의 말에, 남편은 웃음만 짓는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부평시장, #청주떡집, #떡방앗간, #부평, #자영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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