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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몰아친 태풍으로 파도가 거세게 일었다.
 얼마 전 몰아친 태풍으로 파도가 거세게 일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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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태풍 '뎬무'가 전남 고흥 우리 집 앞 바다로 몰아쳤습니다. 거센 파도를 몰고 와 집 앞 해변의 자갈 언덕을 사라지게 했습니다. 그러고는 평소처럼 잔잔한 파도가 본래대로 자갈 언덕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자갈 언덕을 다 쌓기도 전에 또다시 '곤파스'라는 태풍이 몰아쳐 겨우 쌓아 놓은 자갈 언덕을 쓸어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바다는 다시 자갈 언덕을 쌓아 올리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다는 자신을 무너뜨리고 치유합니다. 그 어떤 두려움도 없습니다.

이사 와서 당장 생활비가 걱정이었습니다. 집 짓겠다고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500만 원을 빌렸는데 거기서 남은 얼마간의 자금으로 당장의 생활은 가능했지만 앞으로의 생활비가 문제였습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생활비를 충당할 일이 있을 때까지는 당장 방송 원고 쓰는 일을 접어 둘 수 없었습니다.

300여 평의 밭농사를 지어가며 바다를 통해 뭔가를 해야 할 것이었기에 이사 오고 나서 거의 매일같이 바다로 나섰습니다. 바다로 나선다 하여 무슨 뽀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해서 먹고살 것인가? 애초에 바닷가로 이사 오게 되면 중고 배를 구입할 예정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중고 배를 알아봤더니 보통 1톤짜리가 300~400만 원 정도였지만 엔진 값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보통 쓸 만한 엔진이 500만 원이 넘었습니다. 거기다가 어업권이 배 구입비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어지간히 쓸 만한 엔진이 달린 중고 배에 어업권까지 장만하려면 1000만 원 이상의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삽을 들고 나타난 사람들 뒤따라 가 봤더니

이른 봄. 어딘가에 묻어놓은 뼈다귀를 찾아 헤매는 우리 집 개 곰순이처럼 집 앞 바다에서 끙끙거리고 있는데 평소 인적이 거의 없는 해변으로 몇몇 사람들이 삽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슬그머니 뒤따라 가 보았습니다.

다들 장화를 신고 물 빠진 해변에서 뭔가를 캐고 있었습니다. 조개였습니다.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손바닥만큼 큰 조개며 그보다 작은 조개도 캤습니다. 물이 들어오기 전까지 3시간 정도 해변을 돌아다니면서 열댓 개의 조개를 손쉽게 건져 내고 있었습니다. 저만치라면 당장 하루 이틀의 밑반찬 거리로는 충분해 보였습니다.

이른 봄 삽을 들고 집 앞 바다로 나가 조개를 캤다.
 이른 봄 삽을 들고 집 앞 바다로 나가 조개를 캤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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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장화를 신고 삽을 챙겨 틈만 나면 물 빠진 바다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조개 캐기는 보기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쉽지 않은 게 아니라 아주 어려웠습니다. 두서너 시간 해변을 헤집고 다녔지만 내가 캔 조개는 고작 두세 개가 전부였습니다.

조개 캐는 사람들로부터 전수 받은 방식대로 장화를 신고 모래와 갯벌이 뒤섞인 작은 구멍이 뚫린 곳을 집중적으로 꾹꾹 밟아 주면 그 구멍에서 모래가 올라옵니다. 그곳을 개가 땅 파듯이 정신없이 파내다 보면 조개가 나온다고 하는데 그들과는 달리 나는 늘 헛손질을 해댔습니다.

해변 곳곳을 헤집고 다니며 모래가 올라오는 작은 구멍을 향해 죽어라 삽질을 해댔지만 아무것도 없거나 빈 조개껍데기나 불가사리와 같은 엉뚱한 놈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해변 곳곳에 조개를 잡아먹는다는 불가사리들이 설쳐대고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열댓 개의 조개를 캘 때 나는 두서너 개를 캤을 뿐이다. 둥그렇게 생긴 놈은 조개의 씨를 말리는 불가사리라고 한다.
 동네 사람들이 열댓 개의 조개를 캘 때 나는 두서너 개를 캤을 뿐이다. 둥그렇게 생긴 놈은 조개의 씨를 말리는 불가사리라고 한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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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를 가장 많이 캘 수 있는 시기는 일 년 중 바닷물이 가장 많이 빠져나가는 음력 2월 대보름, 영등시 전후입니다. 그때를 맞춰 부지런히 삽질을 했지만 별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불가사리와 조개 구멍을 구별하려면 적어도 한두 해 이상의 공력을 쌓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조개 캐는 일에 기력을 소진하다가 조금 더 먼 곳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해변 곳곳에서 파래며 돌미역들을 심심치 않게 보았거든요. 집 앞 바다에서 20분 정도 갯바위를 타고 해변을 거슬러 올라가면 수심 깊은 바다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눈앞에 돌미역 밭... 바다를 헤매다 육지에 발을 딛는 기분이 이럴까

날마다 영역을 확장해 나가던 어느 날 거기에 바닷물이 빠지고 나면 돌미역 밭이 펼쳐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천에 돌미역이 널려 있었습니다. 공해상을 헤매다가 육지에 발을 딛는 기분이 이럴까 싶을 정도로 가슴이 쿵쿵 뛰었습니다.

바다에 나가 늘 빈손으로 돌아온다고 타박하는 아내의 입이 헤 벌어질 것을 생각하며 아내에게 '인간 승리자'처럼 기분 좋게 말했습니다.

"인효 엄마! 드디어 발견했어! 돌미역이 지천에 널렸어, 지천에 널렸다구!"
"어디? 어디에 있는데..."

다음날 어지간해서는 바다로 나서지 않던 아내는 바구니를 들고 따라나섰습니다.

"야 엄청나게 많네, 이거 진짜 돌미역 맞아? 먹어도 되는 거야?"
"당연히 먹는 거지."
"그런데 왜 사람들이 따가지 않어?"

아내는 가까운 해변 주변에 듬성듬성 널려 있는 돌미역에도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하지만 해안 깊숙이 자리한 돌미역 밭까지 접근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곳까지 가려면 20분 정도 미끄러운 갯바위를 타야 하기 때문에 접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바지락 갯벌 일이 한창 바쁜 시기였기에 거기까지 손이 미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돌미역 밭은 이른 봄 내내 밑천 한 푼 없이 빈손으로 바다를 헤매고 다녔던 내게 바다가 내준 커다란 선물이었습니다. 

돌미역 말리기. 집 앞 해변 깊숙한 곳에서 돌미역 밭을 발견해 손님들에게 인심를 써가며 여름이 오기 전까지 훌룡한 국거리로 삼았다.
 돌미역 말리기. 집 앞 해변 깊숙한 곳에서 돌미역 밭을 발견해 손님들에게 인심를 써가며 여름이 오기 전까지 훌룡한 국거리로 삼았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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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미역이 너무 많아 낫이나 칼을 들고 '너줄너줄한' 돌미역을 베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돌미역까지 베다가 나중에는 큰 놈만을 골라 베었습니다. 처음에는 욕심껏 많이 베다가 나중에는 가져올 만큼만 적당히 베었습니다. 물 먹은 돌미역은 그 무게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또 다른 요령이 생겼습니다. 하루 전날 부지런히 베어 놓고 기상 예보를 감안해 갯바위에 말려 놓았다가 다음날 고들고들해지면 배낭에 짊어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만큼 부피가 줄어들고 무게 또한 가벼워 한꺼번에 많은 양을 짊어지고 올 수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철망 같은 곳에 펼쳐 하루 이틀 정도 볕 좋게 널어놓으면 바싹 마르게 됩니다. 여느 해안 민가들이 그렇듯이 집 주변에 온통 돌미역을 널어놓았습니다. 말린 돌미역이 상하지 않도록 잘 보관해 두었다가 먼 길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인심을 써가며 여름이 오기 전까지 내내 국거리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산에 의지해 생활했을 때 산나물을 저장해 두었다가 요긴한 먹을거리로 사용했듯이 이제는 바다가 그걸 대신해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날 빈손으로 오면서 뭐하려 다녀?"

우리 집 앞 해변에 낚시대를 드리웠다. 큰 고기를 잡겠다고 먼 갯바위로 나설 때는 신통치 않았지만 이곳에서는 생선 밑반찬 걱정이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아 올릴 수 있었다.
 우리 집 앞 해변에 낚시대를 드리웠다. 큰 고기를 잡겠다고 먼 갯바위로 나설 때는 신통치 않았지만 이곳에서는 생선 밑반찬 걱정이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아 올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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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 반찬 역시 바다에서 해결했습니다. 충남 공주 시골 생활을 할 때는 밑반찬 생선이라 해봤자 자반고등어나 백조기 구이 정도가 대부분이었는데 이곳에 와서는 푸짐한 생선찌개는 물론이고 장어탕까지 맘껏 먹을 수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1년에 한 번 정도 먹을 수 있었던 횟감 역시 이곳에 이사 오고부터는 심심찮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낚싯대로 갓 잡아 올린 생선들이었습니다. 

낚시로 고기 잡는 일 역시 처음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봄철 내내 헛손질하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바다에 나가면 미끼 값이 아까울 정도로 빈 바구니를 들고 오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이른 봄 내내 돌미역 밭이 있는 해안 깊숙한 갯바위까지 낚시를 갔지만 욕심이 과한 탓에 고기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감성돔 같은 큰 고기를 잡겠다고 낚싯줄을 멀리 던져 놓았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바다물이 차가운 이른 봄에는 감성돔 같은 고기가 들어오지 않고 다만 갯바위 바로 앞에서 '놀래미'들이 놀고 있었던 것입니다. 갯바위 바로 앞에 갯지렁이를 달아 던져 놓아야 하는데 갯바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크릴새우 미끼를 던져 놓았던 것입니다.

"미끼 값이 아깝다. 만날 빈손으로 들어오면서 뭐하러 그렇게 다녀?"
"기다려봐. 아직은 내가 바다를 잘 모르잖어."
"그 시간에 다른 일을 좀 해봐."
"포인트를 알게 되면 자주 나가지 않아도 된다니께. 조그만 기다려봐. 당신 좋아하는 횟감을 대령할 테니께."
"아이구 어느 세월에? 그 시간에 돈 벌어서 사 먹는 게 더 낫겠다."

그렇게 무던히 아내의 타박을 견뎌내며 봄 내내 농사일을 하다말고 우리 집 개 곰순이와 함께 틈만 나면 갯바위로 달려 나갔습니다. 낚시 가방과 배낭을 메고 20분 거리의 갯바위를 타고 다녔습니다. 고기는 잡지 못했지만 해안 침투 훈련을 받은 특수부대요원처럼 갯바위를 뛰어다닐 만큼 몸이 가벼워진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습니다. 집 짓는 일로 엉망으로 상해 있던 몸을 단단히 해주었던 것입니다.

수온이 따뜻해지는 6월로 접어들면서 비로소 밑반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정작 고기가 많이 나오는 곳은 집 앞 해변이었습니다. 해변 바로 옆 갯바위에서도 얼마든지 고기를 낚을 수 있었습니다. 나 같이 욕심 많고 미련한 인간은 그 어떤 어리석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봅니다. 낚시 포인터를 바로 코앞에 두고 먼 곳까지 원정을 다녔으니까요.

비록 낚싯꾼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감성돔 같은 고기를 낚을 수 없었지만 동네 사람들이 말하는 모래무지(보리멸), 백조기(보구치)들을 쉽게 낚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물때를 제대로 만나면 한 번 출조해서 서너 시간 만에 많게는 20여 마리, 적게는 10여 마리를 거뜬하게 건져 올렸습니다.

낚시가 한창 잘될 때 밤바다에 나가 잡아온 장어. 장어탕을 푸짐하게 끓여 먹었다.
 낚시가 한창 잘될 때 밤바다에 나가 잡아온 장어. 장어탕을 푸짐하게 끓여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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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을 전후해 집 앞 해변에서 굵은 장어도 심심찮게 잡혔다.
 장마철을 전후해 집 앞 해변에서 굵은 장어도 심심찮게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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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기는 찌개거리로 제격이었고 모래무지는 횟감으로 그만이었습니다. 모래무지는 보통 생선에 비해 그 크기가 작지만 횟감으로는 그 어느 생선 못지않게 감칠맛이 났습니다. 거기다가 6월 중순에 접어들고부터는 밤바다에 나서 장어들을 심심찮게 낚아 올렸습니다. 어쩌다가 농어도 낚여 올라왔습니다.

40센티미터가 넘는 농어를 잡은 날 자정이 넘어 집으로 돌아오니 모두들 잠들어 있었습니다. 회를 떠 냉장고에 넣어 놓고 다음날 아침 아내에게 대령했습니다. 충남 공주 시골집에서 그 좋아하는 회조차 먹지 못하고 살아온 아내였습니다.

이곳 사람들이 말하는 '모래무지'회. 공주에서 생활할 때는 1년에 한 번 정도 겨우 먹을 수 있었던 회를 이곳 고흥에 와서는 아내에게 시도때도 없이 대령할수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말하는 '모래무지'회. 공주에서 생활할 때는 1년에 한 번 정도 겨우 먹을 수 있었던 회를 이곳 고흥에 와서는 아내에게 시도때도 없이 대령할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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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뗘? 오늘은 밥값 했지? 앞으로 인효 엄마 좋아하는 횟감 얼마든지 먹을 수 있게 해줄 께. 낚시 간다고 타박하지 말어잉."
"누가 타박했다고 그래? 툭하면 바다로 나가니까 그렇지."
"바닷가에서 살려면 일단 바다를 알아야 하잖어..."
"뭘 알아야 하는데..."

나는 바다에 대해 뭘 알려고 하는 것일까? 돈벌이를 멀리하고 살아가는 못난 남편 덕분에 늘 생활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아내의 물음은 바다에 대해 뭘 알겠다는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먹을거리를 내주는 바다는 이미 그 답을 내주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바다는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흐릅니다. 최소한의 것으로 만족하고 생활에 대한 두려움 없이 낮은 자세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바다는 그만큼 내줍니다. 바다에 대해 개뿔도 모르면서 큰 고기를 잡겠다고 욕심부렸던 내게 아무것도 내주지 않았던 바다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욕심부터 버려라.

해뜰 무렵의 우리집 앞 바다. 바다는 크게 욕심 부리지 않고 낮은 자세로 살아가는 만큼 내준다.
 해뜰 무렵의 우리집 앞 바다. 바다는 크게 욕심 부리지 않고 낮은 자세로 살아가는 만큼 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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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바다와 생활, #조개잡이, #돌미역, #바다낚시, #두려움 없는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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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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