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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날갯짓의 유혹이 시작된 것은 봄날이 아닌 7월이었습니다. 태양에 녹아 흘러내리는 뜨거운 물 같은 유리창 바깥쪽에서 팔랑거리는 나비들의 날갯짓은 기어이 내 발을 끌어내 여름의 하오, 잠깐 잠깐 그 더위를 잊게 하였음이 분명합니다.

맨드라미와 흰나비
 맨드라미와 흰나비
ⓒ 장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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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 가지에 앉은 검은 나비
 배롱나무 가지에 앉은 검은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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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홍과 호랑나비
 백일홍과 호랑나비
ⓒ 장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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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비스커스와 호랑나비
히비스커스 꽃은 내얼굴 두배만하다.
나비의 크기가 짐작되리라
 히비스커스와 호랑나비 히비스커스 꽃은 내얼굴 두배만하다. 나비의 크기가 짐작되리라
ⓒ 장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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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카메라에 가장 먼저 담긴 흰나비는 고요하였고 내가 홀딱 반해 끝까지 따라다니던 검은 나비는 도도하였습니다. 서두름 없던 호랑나비는 우아하였고 왕나비들은 애첩을 끼고 사는 듯 제가 좋아하는 꽃에 들러붙어 정신을 놓고 있었습니다.

내가 끝내 담지 못한 노랑나비들은 쉴 사이 없이 건반과 건반 위를 건너뛰며 아르페지오를 연습하는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처럼 꽃과 풀과 나무와 바람을 짚고 땅과 하늘 사이를 머무름 없이 건너뛰며 나를 조롱하였습니다.

뜻밖에 출현한 수 십 마리의 나비들을 불러들인 장본인은 다름 아닌 백일홍입니다. 지난해 심은 백일홍이 올해는 꽤 무리를 지어 피어 몇 해 동안 피고 지던 똑같은 꽃들에 싫증이 날 무렵 내게 특별한 선물을 해준 셈입니다.

나비의 날갯짓은 가까이 있어도 아득합니다.

하염없이 가볍고 연약해 보이기만 한 저 날개의 궁극적인 목적지도 그저 허공을 떠도는 일이거나 생명을 잇기 위한 가장 단순한 노동의 자리인 내 눈 앞의 꽃과 나무는 아닐 것이라는 인간의 생각은 나비의 가벼운 날개에 과중한 짐을 지웁니다.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 에서 바다를 건너는 나비와 김규동의 시 <나비와 광장> 에서 아름다운 영토를 향해 이즈러진 날개를 파닥거리는 나비, 박봉우의 시 <나비와 철조망>에서 벽에 부딪혀 피를 흘려도 날아야 하는 나비, 나비들.

그러나 나는 이 여름 한철 나비의 무거운 날개들을 물리고 가벼운 날개에 편승했음을 알립니다.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 흰 열무 꽃이 파다하다 /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 흰 열무 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 가녀린 발을 딛고 / 3초씩 5초씩 짧게 짧게 혹은 /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 내 열무 밭은 꽃밭이지만 /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문태준의 시 <극빈> 입니다.

열무를 심고 꽃을 바라보는 가난한 시인은 그 꽃마저 나비에게 뺏겼다며 극빈을 읊고 있지만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슬며시 웃었습니다. 채소밭에 꽃을 심어 가난하긴 나도 마찬가지인데 꽃도 내 무릎이요 나비도 내 무릎이니 망중한 뜰에 서서 뜨거운 해와 함께 가까이 있어도 아득한 날개 위에 설핏 드는 선잠도 꿀맛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고마웠습니다. 비로소 날개에 얹힌 시대의 아픔과 '자유'와 '이상', '현실'의 삼중고를 내려놓고 열무 꽃 위에서 나비들을 쉬게 한 시인. 나비에게 기꺼이 자신의 무릎을 내어준 그는 부자입니다.

그러다가 엊그제 찢기고 상한 날개들을 보았습니다. 늘 오던 나비 중 호랑나비와 왕나비 대여섯 마리의 날개가 성치 않았습니다. 한 마리는 아예 날개의 절반을 잃어버렸습니다. 저 아이들도 8월을 건너기가 바다를 건너는 것만큼 쉽지 않았나 봅니다. 순간 얼마나 미안해지던지요.

자유를 위해, 생존을 위해 날아야 했던 나비의 날개도 내 것처럼 상처받고 찢어진다는 걸 처음 안 아이처럼. 더 이상 가벼울 수 없는 나비의 날개들이 날고 있습니다. 무거운 날개이나 날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내 작은 뜰을 오가는 길이 저 아이들에게는 김기림의 바다요 김규동의 광장이요 박봉우의 철조망임을 이제야 압니다.

사느라고 어깨가 아픈 당신. 이 한밤 자고 나면 당신의 어깨에도 날개가 돋을 거란 말은 이제 못합니다. 그러나 나비는 숨을 멈추지 않는 한 내일도 그 날갯짓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나비,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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