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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쌍용자동차 공장을 점거하고 옥쇄파업을 벌였던 한 노동자. 지금 그의 집에는 라면박스가 쌓여있습니다. 여전히 쌍용차 공장 안에 갇혀있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온갖 상비물품을 자기 주변에 챙겨두는 버릇이 생긴겁니다. 싸움은 끝났지만, 극한 투쟁이 남긴 상처가 그에게 너무도 깊게 남았습니다. 기륭, KTX 승무원에 학습지 노조 재능지부까지. 많은 노동자들이 1000일 남짓 또는 그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투쟁현장을 지키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투쟁 그 후]를 통해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지난 26일 서울중앙지법이 KTX 여승무원들의 근로자지위 확인 청구 소송에서 채용 당시부터 철도유통이 아니라, 철도공사에 고용된 것이라고 판결한 가운데 30일 오후 서울역에서 철도노조 KTX승무지부 조합원 김진옥, 김영미, 배귀염(왼쪽부터)씨가 투쟁의 날을 하루빨리 끝내고 KTX 여승무원으로 복직돼 일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지난 26일 서울중앙지법이 KTX 여승무원들의 근로자지위 확인 청구 소송에서 채용 당시부터 철도유통이 아니라, 철도공사에 고용된 것이라고 판결한 가운데 30일 오후 서울역에서 철도노조 KTX승무지부 조합원 김진옥, 김영미, 배귀염(왼쪽부터)씨가 투쟁의 날을 하루빨리 끝내고 KTX 여승무원으로 복직돼 일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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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는 집도 사고 차도 샀는데 난 여전히 해고자였어요. 만나면 아파트가 얼마나 올랐다는 등 그런 얘기를 하니까 친구들도 못 만나겠더라고요."

철도노조 KTX승무지부 조합원 김진옥(32)씨의 말이다. 20대 후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KTX에 올라탄 그녀지만 철도공사를 상대로 싸우다보니 어느새 30대가 돼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던 세월이었다. 앞서가는 친구들을 보며 여전히 제자리인 자신에게 미안했던 날들이었다. 그러나 지난 26일 법원은 4년 6개월 동안 이어진 진옥씨의 노력이 제자리걸음이 아니었음을, 이들이 생떼를 쓰는 게 아니라 정당한 요구를 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서울중앙지법이 'KTX 승무원은 철도공사가 고용한 근로자'라고 판결한 것이다. 철도공사가 KTX 승무원들을 자회사를 통해 파견 노동자로 근무하게 한 것이 위법함을 명확히 한 판결이다. 2006년 이후 KTX 조합원들이 철도공사 측에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내세웠던 주장 그대로다.

"너희가 싸우는 건 옳은 일"이라며 응원해준 가족

2008년 9월 11일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장기농성 중인 KTX 여승무원 20여명이 서울역 승강장 부근에서 쇠사슬로 몸을 묶은 채 무기한 농성에 돌입했다.
 2008년 9월 11일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장기농성 중인 KTX 여승무원 20여명이 서울역 승강장 부근에서 쇠사슬로 몸을 묶은 채 무기한 농성에 돌입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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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그녀들의 농성장이자 일터이기도 했던 서울역에서 KTX 조합원들을 만났다. 진옥씨는 "단순히 재판에서 이겨서라기보다 내가 생각했던 게 맞고 이게 정당한 거고, 앞으로도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근거가 생겨서 좋았다"며 활짝 웃었다.

KTX 조합원 김영미(32)씨도 같은 마음이었다. "승소 판결을 받은 후 곧장 엄마한테 전화를 했는데 '참 잘됐다'며 엄마가 우는 바람에 같이 펑펑 울고 말았다"고 말하는 영미씨 눈에는 금세 눈물이 고였다.

가족은 건드리면 톡하고 터지는 눈물샘이었다. 싸우는 자신들을 지지해줄수록 혹은 그만 하라고 말릴수록 '찌르르' 가슴을 에는 무언가였다.

진옥씨는 "가족들의 응원이 많은 힘이 되었다"며 "부모님이 '너희가 싸우는 건 옳은 일이다, 앞으로 많이 힘들 텐데 네가 참을 수 있으면 엄마아빠는 상관없다'고 말해주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단식, 점거농성, 고공농성... 고난의 4년 6개월

KTX 여승무원들은 노동부의  불법파견 여부에 대한 재조사 결과 발표를 하루 앞둔 2006년 9월 28일 오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뒤 몸에 쇠사슬을 묶고 국회로 행진하고 있다.
 KTX 여승무원들은 노동부의 불법파견 여부에 대한 재조사 결과 발표를 하루 앞둔 2006년 9월 28일 오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뒤 몸에 쇠사슬을 묶고 국회로 행진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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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들이 철도공사에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투쟁에 나선 것은 2006년 2월의 일이다. 이후 시작된 투쟁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꿈쩍도 않는 철도공사에 승무원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이들은 곡기를 끊고, 점거농성을 했고, 머리카락을 밀었으며, 40m 높이의 철탑에 올랐다.

조합원들이 그중 가장 아픈 기억으로 꼽은 것은 2006년 4월 국회 헌정기념관 점거 때의 일이다. 이들은 한명숙 당시 총리 면담을 요구하며 기념관을 점거했었다.

영미씨는 "기념관에 들어간 조합원들은 음식도 차단된 채 오들오들 떨며 지내야 했다"며 "이후에 애들이 끌려 나가는데 차마 볼 수가 없었다"며 울었다. 조합원 중 막내인 배귀염(28)씨는 "헌정기념관 바닥이 대리석인데 그 위에서 자니까 등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며 "노숙자들이 왜 술을 먹고 자는지 그때 알았다"며 웃었다.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아직도 가슴이 아픈 그런 순간들이다.

26일 법원 판결 이후 눈코뜰새 없이 바쁜 오미선 철도노조 KTX승무지부장은 여의도에서 따로 만났다. 바쁜 일정이지만 오 지부장의 표정에선 여유가 묻어났다.
 26일 법원 판결 이후 눈코뜰새 없이 바쁜 오미선 철도노조 KTX승무지부장은 여의도에서 따로 만났다. 바쁜 일정이지만 오 지부장의 표정에선 여유가 묻어났다.
ⓒ 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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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승무지부 지부장인 오미선(31)씨는 고공농성이 가장 힘들었던 때라고 말했다. 미선씨는 "고공농성만큼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없다"며 "지부장이라는 부담감에 하기 싫어도 해야 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그는 "철탑에 올라가 탤런트 안재환씨 자살 소식을 들었는데,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면 저런 생각을 할 수 있겠구나 이해가 되었다"며 "나쁜 생각이 들 정도로 힘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4년 6개월은 지쳐가는 가족들 때문에 더 힘겨웠던 시간이었다. 귀염씨는 "가족들도 '네가 맞다 한들 세상을 이길 수 없다'고 했다"며 "일이 해결될 기미를 보이다가 어그러지길 반복하니 가족들이 많이 실망했었다"고 말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진옥씨도 "부모님이 방에 가둬놓거나 휴대폰을 빼앗는 등 가족의 반대에 부딪혀 농성을 그만둔 친구들이 굉장히 많았다"고 말을 보탰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도 그들을 위축되게 했다.

"서울역 부근에서 서명을 받았었는데 곁을 지나던 내 또래의 한 남자가 '사회가 원래 그런데 순진하게 믿은 너희가 죄'라며 무조건 우리를 탓했어요. 설득하려 했지만 전혀 들으려 하지 않더군요. 이후 사람들을 대하는 게 무서워졌어요. 젊은 사람들도 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사회가 조금이라도 변할 수 있을까 싶어 두렵기도 했고요."

진옥씨의 말이다.

"투쟁 도중 나간 이들, 여전히 비정규직인 사람들 많아"

수많은 어려움을 견디지 못한 340여 명의 조합원은 투쟁 현장을 떠났지만 34명의 조합원은 끝까지 남았다. 귀염씨는 "고비 때마다 못 견딘 사람들이 우수수 떠나갔다"며 "처음엔 한 명이라도 더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이해한다"고 담담히 말했다.

나간 이들은 현재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귀염씨는 "물론 잘된 사람도 있지만 시기가 어려우니까 밖에서 헤매는 사람들도 있다"며 "여전히 비정규직인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영미씨는 "아무리 친했어도 나가버리면 연락하기가 어렵다"며 "사이가 틀어져서 안타깝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말 좋은 사람들이 남아서 평생 갈 수 있는 친구들이 생긴 것 같아 좋은 점도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남은 이들 간의 유대가 더 공고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매일 같이 먹고 자고 붙어 다니니 마치 군대에 온 것 같았다는 선배들의 말에 "그럼 난 4년 동안 만년 일병"이냐며 꺄르르 웃던 귀염씨도 "KTX 탈 때는 선배들이 무서워 업무 외에는 다가서지도 않았는데 투쟁하면서 만날 같이 있으니 이젠 정말 친언니같다"고 거들었다.

투쟁의 끝엔 사람 뿐 아니라 사회를 바라보는 다른 시각도 자연스레 생겼다. 미선씨는 "2006년 이전에는 투쟁을 몰랐지만 그 이후에는 알게 됐다"며 "투쟁을 하면서 사회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비정규직 투쟁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고 해야 하는 일인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상징으로 불렸던 그녀들의 승리는 어디선가 투쟁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선례'를 남기기도 했다. 최후의 수단이었던 철탑까지 올랐던 그녀들은 농성 대신 법을 택했다. 2008년 10월, '근로자 지위 보전 및 임금 지급'을 요구하는 가처분신청을 제기했고, 그 해 12월 서울중앙지법은 승무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2008년 11월에는 가처분신청과 같은 취지의 본안소송도 제기했다. 그 결과가 지난 26일 나온 것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얻은 결실들이었다.

귀염씨는 "우리를 보고 기륭(전자) 등의 조합원들이 언젠가는 이길 수 있다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며 "우리도 소송 가서 좋은 결과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그런 순간이 왔다"고 말했다. 기륭전자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는 진옥씨는 "철도공사 뿐 아니라 다른 업체의 사장이나 임원들도 우리처럼 독하게 싸운 애들도 있으니까 알아서 잘 해 줬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진심으로, KTX 승무원을 하고 싶다"

KTX 여승무원 정규직원으로 인정해달라며 4년 6개월 동안 투쟁을 벌여온 철도노조 KTX승무지부 조합원 김영미, 배귀염, 김진옥씨(왼쪽부터)가 농성장이자 일터이기도 했던 서울역 앞에서 길고 힘든 투쟁의 시간을 회상하며 하루 빨리 일터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KTX 여승무원 정규직원으로 인정해달라며 4년 6개월 동안 투쟁을 벌여온 철도노조 KTX승무지부 조합원 김영미, 배귀염, 김진옥씨(왼쪽부터)가 농성장이자 일터이기도 했던 서울역 앞에서 길고 힘든 투쟁의 시간을 회상하며 하루 빨리 일터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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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고 KTX고 징글맞을 법도 하지만 "진심으로, 너무나도 KTX 승무원을 하고 싶다"는 조합원들. "다시 2006년으로 돌아가서 파업을 시작한다 해도 같은 결심을 했을 것"이라는 그들과 함께 KTX가 막 도착한 서울역의 플랫폼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발 디딜 틈도 없이 올라오는 이들에 밀려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있는데 진옥씨가 한마디 툭 건넨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세 명이서 모든 서비스를 다 해야 했어요. 그래도 일이 참 즐거웠죠. KTX 타면 좌석 앞에 철도공사에서 만든 책자가 꽂혀 있잖아요. 처음 근무 시작할 때 매달 그걸 모아야지 했죠. 정년퇴직 때까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모으는 게 작은 바람이었는데 결국 못했네요. 아직도 그 책자가 집에 있어요. 차마 못 버리겠더라고요, 마음이 짠해서."

본안소송 1심에서 승리했지만 철도공사 측은 항소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2심으로 이어진다 해도 회사 측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대법원까지 법정싸움을 이어가야 한다. 진옥씨가 다시 책자를 모을 날이 언제일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진옥씨는 "대법원까지 가더라도 어떻게든 결과는 나올 것이고, 그 결과가 우리를 배신하진 않을 거라 믿는다"며 "이젠 끝이 보인다"고 자신했다.


태그:#KTX, #여승무원, #비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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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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