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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외고 문제야?"

 

시간 문제일 뿐 폐지 쪽으로 가닥이 잡혀가는 줄로만 알았던 외고 문제가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왔다. 임기를 꼭 두 달 남겨 놓은 안순일 광주광역시 교육감이 자신의 임기 내에 외고 설립을 성사 시키겠다며 교육청 내에 전담팀까지 꾸렸다(지난 6·2 지방선거에서 당선한 16개 시·도 교육감 가운데 장휘국 광주광역시 교육감 당선자는 현 교육감의 임기가 끝나는 11월 7일 임기가 시작된다). 수 년 전 자신이 교육감 선거를 치를 때 내걸었던 공약이라면서.

 

임기 두달 남기고 외고 추진... 대단한 안순일 광주교육감

 

기실 외고는 사실상 특수목적고의 고유 역할을 벗어던진 지 오래다. 이에 일반 인문계고로 전환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마저 제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교육비 급증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다. 전국적인 일제고사로 대표되듯 경쟁주의 교육을 옹호하고 부추겼던 정부 여당조차 외고가 입시명문고로 전락했다고 주장하는 현실에서, 멀쩡한 인문계고를 외고로 굳이 서둘러 전환시키려는 건 누가 봐도 생뚱맞다.

 

그런데도 기어이 외고로 전환시키겠단다. 이 계획을 접하는 순간 대통령이 그토록 집착하는 4대강 사업이 겹쳐진다. 임기가 끝나기 전 반드시 눈에 보이는 업적 하나쯤은 남기고 싶은 정치적 욕망에 기인한 결정이 아닐지 의구심이 든다. 백년지대계인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입장에서 섣부른 판단을 하기 전에 차라리 두 달 동안 공청회 등을 통해 지역주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거나, 최소한 차기 교육감인 장휘국 당선자와 협의 정도는 거쳐야 하지 않을까.

 

더욱이 외고 전환을 고집하는 현 교육감의 논리는 군색하기 이를 데 없다. 우선 다른 시도에는 모두 있는데 우리 지역에만 없다는 것과 낙후된 지역에서 인재 유출은 막아야 한다는 이유다. 적어도 지역 교육계의 수장이라면 다른 지역의 사례를 타산지석 삼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외고의 설립 목적과 취지를 거듭 성찰하고 대안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선행해야지,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 운운하며 어린 아이 사탕 달라 보채듯 하는 건 보기 민망하다.

 

전문계고를 '소년원'이라 부르는 현실, 정녕 모르시나요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다른 지역에 외고가 운영되고 있어 그 지역의 교육 여건이 좋아졌다거나 주민들의 '살림살이가 좀 나아졌다'는 얘길 들어보지 못했다. 되레 학교별 위화감이 극심해졌고, 덩달아 학교에 따라 자녀는 자녀대로, 또 학부모는 학부모대로 끼리끼리 뭉쳐 '말조차 섞지 않는' 등 교육 문제로 인해 지역 공동체가 와해되고 있다.

 

예컨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등학교는 인문계와 지금은 '전문계'로 부르는 실업계로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특수목적에 맞는 교육을 시킨다며 과학고와 외고를 사실상 인문계로부터 분리시키면서 '3등급'으로 쪼개졌다. 그러더니 등록금과 책값 등 학비가 대학에 버금가는 국제중과 자립형 사립고 등 이른바 '귀족학교'가 더해지면서 다시 '4등급'으로 세분화됐다.

 

아이들의 고등학교 선택이 흥미와 적성이 아닌 점수로 정해지는 현실에서, 전문계고에 다니는 학생들은 졸지에 2등에서 3등으로, 다시 3등에서 4등으로 떠밀리게 됐다. 단지 점수가 낮다는 이유 그 하나만으로 아이들은 꿈 많은 청소년기를 끝 모를 열패감에 허우적거리며 살아가게 된 것이다.

 

'1등급' 특목고 학생과 '4등급' 전문계고 학생이 다정한 친구로 지내는 경우는, 단언컨대, 없다. 서로 소 닭 보 듯하며 대화는커녕 서로 얼굴조차 마주보지 않는다. 이미 '수준이 다른' 아이들의 마음 속에는 기성세대가 교육 경쟁력과 효율성을 들먹이며 갈라놓은 등급보다 더 큰 심리적 장벽이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 자리잡아 버렸다.

 

물론 다 그렇진 않겠지만, 적잖은 특목고 학생들이 반농반진으로 전문계고를 일러 '소년원'이라 놀려대는 씁쓸한 현실을, 외고 전환 운운하는 그들은 정녕 모르는 걸까. 이게 수월성 교육이고 소질과 적성을 배려하는 특성화 교육이며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선진 교육인지 그들에게 묻고 싶다.

 

모름지기 수월성 교육도, 특성화 교육도 단위 학교의 자발성에 기인할 때라야 교육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학교 내에서 학생들의 흥미와 적성에 맞도록 다양한 커리큘럼을 마련하고 운영해 보려는 노력도, 학교 구성원의 그러한 자발적 노력을 북돋우려는 교육청의 지원도 등한시한 채, 외고라는 번지르르한 이름 앞세워 상명하달 방식으로 학교를 서열화해 경쟁 시키는 게 과연 교육적으로 온당한 것일까.

 

서울 소재 명문대 진학이 지역의 영예, 맞습니까

 

지역의 인재 유출을 막기 위한 대책이라는 논리는 더욱 황당하다. 중학교에서 내로라하는 아이들 모두가 지역 외고로 진학한다고 해도, 어차피 3년 뒤에는 그들 대부분은 서울로 서울로 향하게 돼 있다. 또, 그렇게 상경한 아이들이 대학 졸업 후 수구초심 나고 자란 고향으로 돌아올 리 백년하청이다.

 

그들 주장의 논리는 유치하리만큼 단순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다른 지역 학교로 진학하면 인재의 '유출'이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소재 명문대로 진학하면 지역의 '영예'라고 여기는 것이다. 곧, 교육청 차원에서 지역 고등학교의 서울대 진학 실적을 높이기 위해서 외고와 같은 입시 명문고가 필요하다는 고백인 셈이다.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지양하라는 권고가 내려오면서 최근 들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학교 교문마다 명문대 합격자 수를 적어놓고 쾌거라며 자랑하는 남우세스러운 현수막이 나풀거린다. 어쩌면 교육청이 인권위의 지적처럼 아이들 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한다며 이를 제지시키기는커녕 되레 학교 간 현수막 달기 경쟁을 부추겨온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대체 그들이 강조하는 '지역 인재'란 누구일까. 서울대와 고시에 합격했다고 학교와 지역의 명예를 빛냈다며 경축 현수막에 그저 이름 올리는 자라면, 그건 인재의 끝없는 유출을 부추길 뿐 지역 발전에 되레 해악을 끼치기 십상이다. 비록 서울에서 나고 자라 대학을 졸업했더라도 사고무친인 낙후한 지역에 내려와 자신의 능력을 그 지역 발전에 쏟는 자라야 진정한 지역 인재상이 아닐까.

 

적잖은 주민들이 아직도 수능 점수와 명문대 합격자 숫자를 두고 지역 교육의 성패를 결정짓는 잣대로 삼고 있는 것 같다. 21세기를 이끌어 갈 아이들에게 역할 모델로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주어야 할 교육감조차 입신양명과 출세라는 전근대적 교육관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듯해 안타깝다.

 

이번 외고 전환 갈등을 지켜보노라니 11월부터 임기가 시작되는 새 교육감 당선자의 세부적인 공약 내용과 정책보다 그가 지닌 교육 철학이 더 궁금해졌다. 적어도 교육만큼은 눈에 보이는 계량화된 실적이나 결과보다도 입안되고 추진되는 과정이 과연 교육적이고 민주적인지를 더 중시하는 교육감이길 기대한다.

 

임기 말 눈에 띄는 업적 하나 남기지 않아도 좋으니 사소한 정책 하나라도 과연 교육적인가를 고민하고, 더디 진행되더라도 아이들과 주민들의 의견을 끊임없이 듣고 토론하는 그런 교육감을 만나고 싶다. 누구 말마따나 '교육은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태그:#외국어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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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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