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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 우는 밤입니다. 다시 시작한 여행의 첫 밤을 경남 의령 성남마을에서 보냅니다. 이번 여정부터 숙박비 절감을 위해 읍내서 제법 떨어진 찜질방을 찾았습니다. 지역 유지가 운영하는 산 속 가든의 부대시설로 주로 단체예약을 받는 곳인데 지금은 덩그러니 혼자 앉았습니다. 무서울 것 같지만 구수한 장작 향과 맑은 공기, 곤충들의 속닥임이 마음을 편히 해줍니다.   

 

 

이른 새벽 집을 나섰습니다. 부산에서 의령까지는 부산역이 아닌 부전역에서 기차를 타고 진주에서 버스로 이동해야 합니다. 6시 50분 첫차에 허둥지둥 몸을 싣고 3시간쯤 정신없이 자다보니 진주역이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곧장 시외버스터미널로 가려다 계획을 바꿔 반나절쯤 진주 시내를 둘러봤습니다. 

 

진주 하면 끔찍이 싫어하던 수학여행 장소였던지라 괜스레 거북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몇 해 전 남강유등축제를 보러 왔을 때도 늦은 밤 도착해 현란한 유등 불빛만을 음미하고 서둘러 돌아갔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번 참엔 찬찬히 다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막상 떠올려보면 기억나는 것도, 얘기할 것도 없으니 결국은 모르는 거나 매한가지란 생각에서였습니다. 

 

 

역에서 가까운 진주교에서 천년광장을 지나 죽림숲을 걸었습니다. '사진 찍기 좋은 곳'이라고 친절히 표시해둔 자리에서 강 건너 진주성과 촉석루를 바라 봤습니다. 한때 피 비린내 나는 전장이었고, 충절어린 기생이 적장의 숨줄을 쥐고 비장한 죽음을 맞은 곳이지만 수백년 세월 지난 지금, 처참했던 현실은 옛이야기로만 남았습니다.

 

천수교 옆 산머리 정자에선 드러누워 바람을 즐겼습니다. 아침저녁 가을이 왔음을 눈치는 챘지만 한낮 바람이 오늘처럼 시원하긴 처음입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결에 춤추는 나뭇잎들을 응시하다 깜박 잠이 들었다 깨어났습니다.

 

 

천수교 건너 인사동골동품거리를 따라가면 진주성 들어가는 입구가 나옵니다. 관람료는 천 원. 좌우 갈림길 가운데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상이 서 있었는데 그가 목사 신분에 불과 39살에 순절했음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늘진 좌측 돌담길에선 전설 서린 '용다리'의 잔해를 봤는데, 두 남녀가 신분의 벽에 부딪혀 비극적 사랑을 하다 죽음에 이르렀다는 흔하디 흔한 사연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짠했던 건 남강 따라 걷던 중에 나도 모르게 로맨틱한 기분이 된 탓이었을까요. 우습지만 걸으면서 키스하기 좋은 장소들에 눈도장을 찍기도 했습니다. 아늑한 죽림숲길에서, 천수교 옆 풍광 좋은 정자에서, 음악분수 옆 다리 아래에서, 진주성 내 길고 좁은 돌담길에서. 벌건 대낮에 혼자 여행하면서 이런 상상을 하는 것이 뭐, 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전 건강한 대한민국 미혼여성이니까요.) 

 

 

성 내에 있는 국립진주박물관에서는 인상적인 포스터 한 장을 봤습니다. 경남지역 진주농민항쟁, 동학농민운동과 함께 3대 근대민중운동으로 꼽히는 백정들의 형평운동에 관한 포스터였습니다. 건장한 남자가 한 팔로 저울을 높이 들고 있는 강렬한 색채의 그림입니다.

 

20세기 초까지도 노비나 무당보다도 업신여김을 당한 백정들이 계급 철폐와 모욕적인 호칭 폐지, 교육 장려 등을 부르짖으며 일으킨 항거인데 저울은 그들이 원하는 평등세상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육식업계를 비롯해 모피 수출업자나 의류업자들이 '사람 취급' 받고 사는 것도 이러한 투쟁의 대가라 생각하니 실소가 나왔습니다. 저급한 편견으로 인해 사람의 역사는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습니까...

 

 

긴 세월 온갖 풍파 겪은 촉석루 옆으로 논개 영혼 달래는 의기사에 들러 묵념 올리고 그녀, 결연하고 애통한 심경으로 마지막 자취 남긴 의암을 끝으로 진주성 관람을 마쳤습니다. 모르고 보면 그저 낭만이 가득하고, 알고 보면 겹겹이 아픔이라 이런 유서깊은 도시를 보고 나면 얼마쯤 울적하고 복잡한 심경이 됩니다.

 

그리고 터미널 근처에서 이른 저녁식사를 하고 의령으로 건너 왔습니다. 좀전에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를 봤는데 덕분에 이틀째 눈물바람입니다. 특히 어제(25일)분 방송에서 임종을 앞둔 팔봉 선생의 독백이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사람은 들판에 핀 한 송이 꽃과 같아서 지고 나면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거늘...' 다르지 않은 운명이나 땅속에 뿌리박혀 속박된 몸이 아니니 살아있는 한 자유로이 살아야지 생각했습니다. 명품 드라마 한편이 훌륭한 부모나 스승과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구나, 감탄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위 기사는 네이버와 다음 개인 블로그에 게재합니다. 


태그:#국내여행, #진주성, #형평운동, #죽림숲, #논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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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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