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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 오전. 폼페이를 향해 달리는 차창에 스치는 이탈리아 농촌 풍경은 독일의 농촌처럼 깔끔하지 않았으나 넓은 농지와 그림 같은 집은 우리나라보다 풍요롭고 정리된 느낌을 주었다. 

현지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제철 음식을 좋아해 비닐하우스에서 작물을 키우지 않는다고 했다. 그곳에 가끔 보이는 비닐하우스는 꽃을 키우는 곳이라고 한다.

설마…! 그리고 차창 밖 풍경을 계속 주시했지만 가이드의 말대로 우리나라엔 많은 비닐하우스 단지를 찾을 수 없었다. 이탈리아는 위도상으로 한반도보다 약간 높으나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겨울은 습하고 비가 많이 온다고 한다. 겨울철 최저 기온이 영하 이하로 떨어지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사철 채소를 재배할 수 있는 조건이 되어 굳이 비닐하우스가 필요 없지 않은가 싶었다.     

이탈리아는 우리처럼 반도 국가다. 전체 면적은 우리나라의 남북한 크기의 약 1.5배정도, 인구는 약 6000만으로 남북한 인구보다 적다. 한때 파시스트가 집권하여 2차대전의 전쟁을 도발한 독일의 편에 섰던 역사가 있지만 현재는 한해 관광수입만 500억 달러에 이르고, 가죽, 섬유, 자동차 등의 공업도 활발하여 선진국대열에 선 나라다.

로마를 중심으로 북쪽 밀라노 지역은 공업이 발달하여 주민들의 소득이 높은 반면 남쪽은 농업에 의존하여 주민들의 소득이 낮다고 한다. 이 때문에 남과 북의 주민 갈등도 크다고 했다. 

로마에서 8시 출발한 버스가 11시를 넘겨 폼페이에 도착했다. 3시간 반쯤 걸릴 것이라고 했는데 시간으로 보면 광주에서 서울까지의 거리쯤 될 것이다.

     비록 폐허가 되었으나 도로와 건물의 벽, 기둥이 2천 년 전에 건설된 도시의 모습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 폼페이 시가지 비록 폐허가 되었으나 도로와 건물의 벽, 기둥이 2천 년 전에 건설된 도시의 모습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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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폼페이는 내륙에 위치하지만 과거에는 사르노강 하구의 상업이 발달한 항구 도시였다. 폼페이가 언제 누구에 의해 건설됐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아마 한 집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수백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건설되었을 것이다. 돌길에 파인 수레바퀴의 흔적이 오래된 도시였음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루어진 폼페이는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순식간에 화산재에 묻혀버렸다. 폼페이를 발굴하기 시작한 것은 1600년이 지난 후였다. 18세기부터라고 했는데 지금도 발굴은 진행형이라고 한다. 그 밖에 폼페이의 역사에 대해서 많은 설명을 들었으나 여기서는 기록하지 않고 폼페이를 돌아본 소감만 적고자 한다.

   채광을 고려한 내부 시설은 결코 오늘날의 시설에 뒤지지 않았다.
▲ 목욕탕 내부 채광을 고려한 내부 시설은 결코 오늘날의 시설에 뒤지지 않았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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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 사고 당시 폼페이는 지구상의 많은 도시 중 건축이나 생활 등 문명사적인 면에서 지중해에서 앞서가는 상업 도시 중 하나였다. 여러 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었고 시민들의 놀이 공간인 원형극장, 포럼이라고 불리는 광장, 돌로 포장된 도로, 견고하게 지어진 주택, 사치스러운 목욕탕도 있었다.

그밖에 제분소의 맷돌, 카페의 흔적, 요즘으로 말하면 명품을 파는 상점, 그 상점의 과시용 모자이크 그림 등을 볼 수 있었는데 2000년이 지난 요즘의 시각으로도 대단한 도시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 이미 철과 납으로 만든 수도관을 통하여 수돗물을 공급했다니 오늘날의 도시에 비해서도 결코 손색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분소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노예 혹은 가축의 힘을 이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 제분소의 맷돌 제분소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노예 혹은 가축의 힘을 이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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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폼페이는 뭇 남성을 상대로 여자들이 몸을 파는 것도 허용된 도시였다. 지금도 창녀의 집 입구에 부조 형태로 남아 있는 남근의 조형, 내부에 성행위를 묘사한 천연색 그림, 그리고 길거리 돌바닥에 새겨진 장녀의 집을 안내하는 음각된 남근을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폼페이의 성 풍속도까지 알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화를 당했을 당시 폼페이 상주 상주인구는 2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그 중에는 악인도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상인들을 상대로 못된 짓을 했던 타락한 관리들도 있었을 것이다. 남에게 베풀기보다는 개인적으로 호화로운 주택에 살면서 사치를 일삼은 부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더 많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오순도순 정을 나누며 살았던 가족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로마를 장악한 기독교는 자신들의 관점으로 폼페이를 방탕하고 타락한 도시로 매도하면서 신의 저주를 받아 멸망한 사례를 제시해 자신들의 신앙을 확대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폼페이 사람들은 폼페이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족을 잃거나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고도 신의 저주를 받은 도시에 갇힌 존재가 되어 일말의 동정조차 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폼페이는 오랫동안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어쩌면 중세 교황이 지배하는 로마 시대에 사람들이 폼페이의 실체에 접근하는 것은 금기였을지 모를 일이다. 

과연 폼페이 사람들이 특별히 신의 뜻을 거슬렀던 다른 무엇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개인의 일반적인 상식에 비추어 볼 때 원수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종교가 자신들이 지향하는 이상과 달랐다고 하여 한 지역의 불행을 신의 저주로 해석했고 그걸 포교의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사실은 납득할 수 없는 종교의 오만이요, 횡포다.

   당시 성 풍속을 엿볼 수 있다.
▲ 창녀의 집 입구에 조형된 남근석 당시 성 풍속을 엿볼 수 있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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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있는 창녀의 집을 근거로 향락으로 말한다면 지금 전 세계에서 신의 저주를 피할 도시는 거의 없을 것이다.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다양한 신을 믿는 것을 타락으로 보았다면 현재 지구상에서 기독교가 차지하는 비율로 볼 때 신의 채찍을 받아야할 도시는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로마에 남아 있는 유적의 대부분은 이방인들을 노예로 끌어와 건설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 말은 로마제국이 공격적인 군대의 힘으로 세계 각지를 유린하고 약탈했다는 말이 된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보건데 어쩌면 폼페이도 수많은 노예들의 힘으로 이루어진 도시일 수 있다. 

그러나 노예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했기 때문에 당한 재앙이라고도 볼 수 없다. 그렇기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을 '말하는 동물'로 취급했던 나라들이 멀쩡하다는 것과 더불어 그 나라들이 세계의 강대국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화산의 폭발이라는 자연의 재앙 때문에 그곳에서 무고하게 죽은 영혼을 위한 기도를 바치지는 못 할망정 그런 불행을 신의 저주라고 한다면, 선량하게 살다 변을 당했던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될 것인가?

    뒤에 베수비오 산이 보인다.  베수비오 산은 아직도 불안한 활화산이라고 한다.
▲ 폼페이 광장 뒤에 베수비오 산이 보인다. 베수비오 산은 아직도 불안한 활화산이라고 한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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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그곳에 살다가 희생당한 사람들을 싸잡아 타락한 인간들로 매도하고 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종교적인 계율과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집단이나 사람들을 악마로 몰아가는 종교 집단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당시 폼페이에 살다가 졸지에 죽어야 했던 사람들의 심정까지 헤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이 눈요기하는 비극적인 풍경이 오랫동안 신의 저주에 묶여 접근할 수 없었던 도시임을 알아야할 것이다.

신의 저주를 털고 나와 이제 세계 각지의 관광객을 모아 지역사회와 이탈리아 경제에 기여하는 폼페이를 본다. 열린 광장과 원형극장에 북적이는 관광객들을 본다. 그들이 무너진 폼페이의 모습, 비참한 주검을 통해 말하는 침묵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면 싶다.

폼페이를 삼켰던 베수비오 산을 보면서 문득 79년이라는 숫자를 떠올린다. 화산폭발로 묻힌 해가 기원 후 79년이니 이 시기의 우리 역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 초기에 해당된다. 우리에게도 폼페이처럼 그 때 묻힌 삼국의 유적은 없는 것일까?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겨레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폼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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