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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녕에서 내리 이틀을 쉬었습니다. 어제(7일) 정오 무렵 욕심을 부려 길을 나섰다가 불볕더위와 맞선 지 서너 시간 만에 녹다운되고 말았습니다. 연일 35℃를 웃도는 폭염에, 결정적으로 함안에서 예까지 오는 길에 과하게 한낮 땡볕을 쬔 게 화가 된 듯 합니다.

창녕 석빙고. 문이 열렸다면 저 안에 들어가 태양을 피했을 겁니다.
 창녕 석빙고. 문이 열렸다면 저 안에 들어가 태양을 피했을 겁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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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며칠 전부터 몸이 무겁고 부쩍 짜증이 늘었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샤워를 할 때면 물에 젖어 갈라진 머리카락 사이로 벌겋게 익은 두피가 보입니다. 얼굴과 팔에 비해 신경을 덜 쓴 종아리는 '고기 타는' 냄새와 함께 밤새 따끔거립니다. 

이런 상태로 사흘 전 함안 악양에서 질날늪과 대평늪을 보고 함안보 건설현장을 돌아 곧바로 창녕 오는 지방도를 탔습니다. 오는 중에 '도천리 공룡발자국 화석' 같은 이정표에 이끌려 자전거를 멈추고 숲길을 걷는 등 길을 우회하기도 했습니다.

도천리 공룡발자국 화석
 도천리 공룡발자국 화석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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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더위는 최고조에 달했고 오후 반나절 끓는 듯한 사방의 열기를 온몸으로 흡수했습니다. 오후 2시경 도로 한가운데서 만난 기사식당으로 몸을 피했지만 열받은 선풍기 두어 대로 열기를 식히긴 역부족이었습니다. 설상가상 출발할 때 물통을 잃어버려 수분 섭취도 원활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창녕에 도착했을 때는 이날 마지막 목적지로 정한 우포늪 가는 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어서 빨리 시원한 바람을 쐬고 차가운 물을 마시며 몸 상태를 바로잡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숙소 찾는 데 또 한 시간여…. 그 사이 '자연 냉장고' 석빙고를 발견했는데, 문이 열려 있었다면 그 속에 들어가 드러눕고 말았을 겁니다.   

아슬아슬 객사를 모면하고 다음날이 밝았습니다. 체크아웃 시간을 최대한 채운 뒤 숙소를 나섰습니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말을 듣질 않았습니다. 밥이라도 먹으면 나아질까 개중 맘에 드는 분식점에 들어갔는데, 푸짐하게 먹으려 시킨 '스페셜 모듬세트'가 화만 돋웠습니다. 가짜 돈육에 주먹밥 대신 맨밥, 덜 익은 쫄면 등 성의없고 부실한 음식에 마음이 상할대로 상했습니다.

화를 부른 '스페셜 모듬세트'
 화를 부른 '스페셜 모듬세트'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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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인 기후에 장기간 여행은 신경과민을 부릅니다. 스페셜 모듬세트에 대한 분노로 남은 기력을 소진한 나머지 결국 '그냥 쉬자'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러고는 전날 묵은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경비를 아끼려 24시간 찜질방에 갈까도 했지만 근처 유일한 해당업소는 잘 곳이 못 된다는 조언이 있어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대신 5천원 저렴한 침대 없는 방을 택했습니다. 그것이 오후 5시경.

마음을 접을 땐 깔끔하게 접는 게 좋습니다. 기왕 하루 여정을 미룬 것 영양 섭취도 하고 제대로 기분을 내기로 했습니다. 입고 있던 옷가지들과 배낭을 제멋대로 널브려 놓고 며칠 눈앞에 삼삼하던 치킨과 맥주를 먹기로 맘먹었습니다.     

'눈물의' 치킨 반 마리와 영혼을 달래는 음료
 '눈물의' 치킨 반 마리와 영혼을 달래는 음료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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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또다시 태클. 이번엔 치킨이 문제였습니다. 혼자 먹는 것이니 반 마리를 주문하려는데 가게마다 안 된다며 거절을 했습니다. 억지로 밖에 나가 반 시간쯤 발품을 팔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이쯤되니 감정이 북받쳐 이성이 휘청였습니다. '치킨 반 마리는 안 파는 더러운 세상!' 당장이라도 악다구니를 치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일. 숙소에 돌아와 흥분을 가라앉히고 114에 문의, 서너 군데 전화를 돌린 끝에 마침내 치킨 반 마리를 쟁취할 수 있었습니다! 

눈물겨운 치킨 반 마리에 적당한 음주로 속을 적시고 나니 어느새 잠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시련이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몇시였을까요, 집요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힘겹게 잠을 깨니 숙소 주인이 바깥에 내어둔 자전거를 들이라 했습니다. 도난을 걱정해서였습니다. 충고는 고마웠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방 안 상황이 가관입니다. 분명 '강풍'으로 설정한 에어컨이 귀를 먹먹케 하는 굉음과 함께 더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습니다. 

애써 이룬 잠이 깬 데다 찜질방 방불하는 실내를 돌아 보니 주인에게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방이 왜 이런 겁니까?" 분명 5천 원 저렴한 게 침대가 없다는 이유 하나였는데 이건 도저히 잘 수 없는 방을 준 거나 다름 없었습니다. 방 상태를 직접 확인한 주인이 자전거를 갖고 올라오자 "돈 안 받을 테니 어제 묵었던 방에 가서 그냥 주무세요" 했습니다.

이럴 때면 대개 짜증이 나지 않습니까? 아님 제가 사나워져 있던 탓이었을까요. 애초에 사람이 쉴 만한 방을 주지 않고 늦어도 너무 늦게 방을 바꿔주니, 고맙기보다 누굴 놀리나 싶은 거지요. 그렇다고 괜한 오기를 부렸다간 본인만 손해, 짧은 실랑이 끝에 '한밤의 이사'를 감행했습니다.

그렇게 또 정신산란한 밤이 지났습니다. 결국 더위로 인한 후유증을 치유하는 데 이틀이 걸렸습니다. 이제 다시 떠날 채비를 해야지요. 여행 시작 20일째, 종종 '내가 왜이러고 있지?'하고 묻습니다. 사서 생고생, 가족들 마음고생, 막막하고 힘들고….

하지만 처음 이 여행을 계획하며 생각했습니다. '머릿속에 내 나라 아름다운 길 100갈래쯤 떠오르면 좋겠다.' 그리고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지요. 계속 갈 겁니다. 지치면 좀 쉬다 가면 그만이지요. 어차피 행복해서, 더 행복해지려고 하는 일이니까요. 응원해주십시오. 계속 길 위의 가슴 벅찬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게, 언젠가 당신과 함께 오늘을 추억할 수 있게.

열기와 굉음을 내뿜던 문제의 에어컨. 잠에서 깼을 때 묻고 싶었다. '누구냐 넌?'
 열기와 굉음을 내뿜던 문제의 에어컨. 잠에서 깼을 때 묻고 싶었다. '누구냐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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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국내여행, #불볕더위, #창녕, #석빙고, #맥주와치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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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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