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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톡 튀는 기발한 생각과 엉뚱한 발상으로 가득한 어린이 책은 어른들의 굳어진 머리를 좀더 유연하게 해준다. 어린이 책을 읽다보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고, 어느 때는 '나도 이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을까' 싶어서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읽어주기 위해서 함께 읽는 책이지만 어린이 책은 내 획일화된 머리를 좀 더 말랑말랑하게 해주는 유연제다. 내 주위의 일상적인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린이 책을 읽을 때도 있다.

아이들과 책을 읽고나면 지은이 소개도 함께 읽곤 한다. 아이들에게 '이 책을 지은 분은 어떤 분인가 알아보자'며 지은이 소개를 읽어주곤 하는데 그때마다 난감해진다. 하나같이 무슨 대학을 나왔으며 뭘 전공했으며 무슨 상을 받았는지, 무슨 무슨 협회의 회원인지를 참으로 열심히 줄줄이 열거해놓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본다. 이 지은이가 무슨 대학을 나왔고 무슨 상을 받았고 무슨 협회 회원인지가 아이들에게 그렇게 중요할까. 아마 그것은 분명 엄마들을 위한 것일 거다.

한 예로, 내가 무척 좋아하는 영국 작가 앤서니 브라운의 책. 내용도 재밌지만 그림 곳곳에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듯 무궁무진한 재미와 비밀이 숨겨져 있어 나도 아이들도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의 그림책을 모두 섭렵했을 정도다. 몇 번을 읽어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그런데 앤서니 브라운을 소개하는 글은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그의 기발함과 재치, 독창성에 비하면 그를 소개하는 글은 너무 밋밋하고 형식적이었다. 차라리 이렇다할 수상경력은 관두고, 저자가 직접 그린 자신의 캐리커처 같은 것이 있었더라면 더 많은 상상력과 재미를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아마 출판사에서 책의 소비자인 엄마들에게 지은이를 좀 더 잘 소개하고자 그렇게 써놓았을 것이다.

어린이책 저자 소개글은 누굴 위한 것?

어린이 책을 읽는 주체는 당연히 어린이다. 지은이를 좀 더 잘 알고싶어하는 권리도 당연히 1차 독자인 어린이에게 있다. 물론 어느 작가의 책을 보여주느냐는 엄마들에게도 중요한 문제다. 좀 더 잘 알려진 작가의 양질의 책을 아이들에게 읽히고 싶은 것은 엄마들의 공통된 마음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서점이나 인터넷 서점에서 지은이 소개만을 보고 즉흥적으로 책을 고르는 엄마들은 그리 많지 않다. 추천 도서목록을 참고하거나 입소문이 좋은 책, 주위의 권장도서 위주로 책을 고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충실한 저 자소개는 책 구입의 타당성을 부여하는 마지막 보너스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은이 소개글에 관심없는 엄마들도 더러 있다.

그러던 중 얼마전에 아주 신선한 지은이 소개글을 발견했다. <똥벼락>(사계절/2008)이라는 책의 저자소개를 읽은 순간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린이 조혜란 선생님은 1965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에서 동양화를 공부했습니다. 자연과 아이들 그리고 그림책을 아주 좋아해서 고향 근처인 태안 바닷가에서 두 딸을 키우며 그림책을 만들고 있는 조혜란 선생님은 '밥알 한 톨, 김치 한 조각도 농부의 땀이 배어있는 소중한 것'이라며 딸들이 남긴 음식까지 말끔히 먹어치우는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씩씩한 엄마이기도 합니다. 우리 옛 그림의 맛이 살아있는 그림을 그리기위해 노력하는 조혜란 선생님은 어린이들이 즐겁게 보면서 세상을 새롭게 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그림책을 꾸준히 만들고 싶다고 합니다. 그동안 그린 책으로는 ....가 있습니다'

'글쓴이 김회경 선생님은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나 상명여자 대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했습니다. 동네 아이들에게 옛이야기와 동화들려주기를 좋아하는 김회경 선생님은 아이들의 마음 속에 도깨비가 살아있음을 느낄 때 희망을 발견한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자연 속에서 뛰노는 것을 좋아하여 자연과 한 몸으로 살았던 인디언의 생활을 동경한다는 선생님은 지금 판소리를 열심히 배우고 있는데 판소리를 하다보면 소리를 잘 지르게 되어 새와 짐승의 소리를 똑같이 흉내낼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자연의 생명들과 함께 어우려져 춤추고 노래하고 싶대요.'

학력사항은 딱 한줄만 기록되어있고 책을 쓰고 그린 지은이들의 평소 이야기와 생활신조, 희망사항 등이 아이들의 언어와 눈높이에 맞게 쓰여있다. 참 살갑고 정다운 소개다.

<내 웃음 어디갔지?>(청림아이/2005)의 지은이 케서린 레이너의 소개글도 재밌다. 한 권의 아주 짧은 동화책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내 웃음 어디갔지?>의 지은이 소개글
 <내 웃음 어디갔지?>의 지은이 소개글
ⓒ 청림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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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서린 레이너는 영국의 에딘버러에서 그림책을 만들며 살고있습니다. 레이너는 집에서 일을 하는데 고양이 에나는 하루종일 책상위에 앉아 그녀가 그림 그리는 것을 지켜본답니다. 에나 발고도 기니피그 마빈과 개 엘리, 말 새넌은 그녀의 식구이자 좋은 친구들이죠. 이 동물들에게서 영감을 얻는 레이너는 가끔 자신의 애완동물을 모델로 작업을 한답니다. <내 웃음 어디갔지>로 북트러스트 어워드 2006년도 신예 일레스트레이터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마지막 문장에 엄마들을 위한 서비스(?)로 작가의 수상경력이 들어가 있긴 해도 소개글의 초점은 아이들에게 맞춰져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린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린이 눈높이로

화났을 때 내가 가끔 읽는 책 <소피가 화나면-정말 화나면>의 저자 소개는 이렇다할 큰 독창성은 없지만 지은이 소개 란 위에 '몰리 뱅'이 아이들에게 남기는 석줄의 글을 함께 적어두어 인상깊다.

'누구나 화를 내본 적이 있습니다. 소피는 화가 났을 때 밖으로 달려나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화를 표현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화가 날 때 어떻게 하나요? - 몰리뱅

<소피가 화나면>의 지은이 소개글
 <소피가 화나면>의 지은이 소개글
ⓒ (주)케이유니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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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생각의 여지를 슬쩍 남겨주는 이런 식의 지은이 소개글도 여운을 준다. <유리구두를 벗어버린 신데렐라>의 그림을 그린 주리 작가의 소개글도 아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유리구두를 벗어버린 신데렐라>를 그리면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꿋꿋이 이겨내며 당당히 자신의 꿈을 이루어 나가는 신데렐라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는 걸 느꼈답니다. 주리 선생님은 *** 등 여러 소설책의 표지 및 내지 일러스트 작업을 하였습니다.'

내가 느낀 것을 작가도 느꼈다니. 작가가 느낀 걸 나도 느낄 수 있다니. 작가와의 공감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아이들은 책 뿐 아니라 지은이와도 한 걸음 더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방금 들었던 예문 중에서 '일러스트'나 '영감' 등 초등학생 저학년이나 유치원생들이 이해하기 힘든 단어를 조금 더 알기쉬운 단어로 바꾸었으면 하는 것이다.

어린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린이를 위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책 내용은 어린이를 위한 것이면서 지은이 소개란에서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어른들 흉내내는 식의 소개글은 지양했으면 좋겠다.

어떤가. 앞서 제시한 작가의 소개글만 보아도 작가가 대충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느껴지지 않는가. 학력이나 수상경력이 아닌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지은이 소개글이 더 간절하다.


똥벼락

김회경 글, 조혜란 그림, 사계절(2001)


태그:#어린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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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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