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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심장 천안문 광장
 중국의 심장 천안문 광장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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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관광은 걷는 관광으로 발병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많이 걸어야 한단다. 거기다가 관광지마다 사람들도 엄청 많다. 여유 있게 보고 느낄 수가 없다. 어디를 가도 사람들로 가득 찼다. 중국이 인구가 많다고 하더니 자금성에서 사람구경 한다.

오늘도 많이 걸어야 한다. 천안문 광장으로 향했다. 천안문광장 앞에서는 주차를 못하니 먼 거리에서부터 걸어가야 한다. 도로 맞은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마오쩌뚱 기념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이란다. 마오쩌둥 참배를 하기 위해 중국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아침 일찍부터 줄을 서서 기다린다.

"혁명은 총구에서 싹튼다."

강력한 사회주의 혁명을 추진했던 마오쩌둥은 중국이 개방되고 새로운 경제정책이 도입되어도 여전히 중국인들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나라의 정서와 문화로 인정해야겠다.

중국의 심장, 천안문광장에 서다

천안문 광장으로 들어선다. 천안문은 명 영락(永樂)연간인 1417년에 지어졌으며, 황제가 사는 자금성의 정문이었다. 당시에는 승천문(承天門)이라고 불렸다가 청대에 개조된 후부터는 '천하를 편안하게 하다'라는 뜻의 천안문(天安門)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천안문 광장에 걸린 오성홍기. 그 뒤로 천안문이다.
 천안문 광장에 걸린 오성홍기. 그 뒤로 천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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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뚱 초상화가 걸린 천안문
 마오쩌뚱 초상화가 걸린 천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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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은 황제의 대형 의식이나 새 군대 파견을 위한 행사를 위해 이용되었고,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이 중국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장소다. 천안문 앞 광장은 1954년에 주변 건물을 철거하고 네 배나 크게 확대하여 전체 면적이 44만㎡이나 되는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광장인 천안문광장은 중국의 심장이자 중국인들의 사상표현의 장소다. 1989년 200만 명이 참가했던 민주화 시위가 있었다. 중국정부는 공산당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강경진압을 하였다. 민주화를 향한 짧고 강렬했던 '베이징의 봄'으로 기억되었다. 또 1999년 파룬궁 무술수련생 1만5000명이 무언시위를 하자 강제해산시킨 큰 사건이 있었다.

광장 중심에는 중국 인민영웅기념비가 서있고, 동쪽엔 중국 국가박물관, 서쪽엔 인민대회당이 있다. 남쪽으로는 마오쩌둥 기념관이 있고, 북쪽으로 천안문이 섰다. 천안문과의 사이에는 국기게양대에 오성홍기가 걸렸다. 중국의 심장에 선 기분. 전혀 꾸미지 않은 광장 그 자체만으로도, 그 위에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중국의 중심에 섰다는 기분이 느껴진다.

세계에서 가장 큰 궁궐 자금성

광장에서 지하도를 지나 천안문으로 향했다. 천안문 벽에는 대형 마오쩌둥 초상화가 걸렸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다리를 건너 천안문으로 들어섰다. 천안문은 입구가 다섯 개다. 가운데는 황제만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가운데로 들어가고 싶은데 들어갈 수가 없다. 나올 수만 있다.

'ㄷ'자 형태로 움푹 들어간 오문.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ㄷ'자 형태로 움푹 들어간 오문.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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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을 지나면 'ㄷ'자 형태로 된 커다란 문이 버티고 섰다. 오문(午門)이다. 자금성으로 들어서는 문이다. 문이 웅장하기도 하지만 'ㄷ'자 형태로 돼 있어 문 앞에서면 마치 덫에 걸린 느낌이다. 그 옛날 조선의 사신이 이 문을 지나기 위해 앞에 섰을 때 받았을 감동은 어떠했을까?

자금성(紫禁城)은 중국에서는 고궁(故宮)이라 부른다. 1406년에 짓기 시작해서 1420년에 완공하였고, 전체 면적이 72만㎡이며, 총 9999개의 방이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고대 궁전 건축물이다. '자금성'이라는 이름은 '북두성(北斗星)의 북쪽에 위치한 자금성(紫禁星)이 천자가 거처하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자금성 태화전. 엄청난 크기에 놀란다.
 자금성 태화전. 엄청난 크기에 놀란다.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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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문을 지나면 아름다운 기단 위에 문이 또 있다. 태화문(太和門)이다. 천안문과 오문이 커다란 벽에 입구를 만들었다면, 태화문은 아름다운 돌계단 위에 문을 만들었다. 하얀 대리석에 섬세한 조각을 한 석조물이 웅장함에 아름다움을 더한다.

한자와 만주어가 병기된 현판에서 청나라의 자존심이 보인다

태화문을 지나면 정전인 태화전(太和殿)이 3단 기단위에 웅장하게 섰다. 금빛 기와에 단청도 금빛이다. 기둥은 붉은색으로 웅장함을 더했다. 태화전 뒤로 중화전(中和殿)과 보화전(保和殿)이 일직선으로 있다. 보화전 뒤로는 황제가 머무르던 건천궁(乾淸宮), 교태전(交泰殿), 곤녕궁(坤寧宮)이 있다.

자금성 황금빛 기와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자금성 황금빛 기와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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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내 현판. 한자와 만주어를 같이 썼다. 명나라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지만 건물 이름은 만주어를 표기하여 청나라가 만주족의 나라임을 표현하였다.
 자금성내 현판. 한자와 만주어를 같이 썼다. 명나라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지만 건물 이름은 만주어를 표기하여 청나라가 만주족의 나라임을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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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청궁 현판이 특이하다. 가로로 새긴 한자와 함께 만주어가 나란히 쓰여 있다. 자금성내 왕이 머무르던 전각 현판에는 만주어를 병기했다. 이는 명나라가 지은 궁궐을 그대로 사용하지만 왕이 머무르던 곳에는 만주어를 적어 만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것.

최근 광화문을 복원하면서 현판을 한자로 집자한다고 한다. 이에 한글학회 등에서는 세종대왕상 뒤 광화문에 한자를 쓴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한 적이 있다. 문화재를 원형대로 복원해야 하느니, 한글을 써야 하느니….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광화문 현판도 한자와 한글을 병기하면 어떨까?

자금성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크다. 금빛 기와의 화려함에 더해서 하얀 대리석 높은 단위에 세운 전각은 웅장함이 한없이 넘쳐난다. 과연 이렇게 크게 지을 필요가 있었을까? 중국이라는 커다란 나라를 통치하려면 절대 권력의 상징이 필요했겠지만…. 황후의 거처를 지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을 뒤로 하고 나온다.

호수를 파서 산을 만들었다니

점심을 먹고 이화원(頤和園)으로 향한다. 청나라 말기 서태후의 여름별장으로 유명하다. 사진으로 보았을 때 그러려니 했는데, 커다란 호수 앞에 서 본 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는 걸 알았다. 놀라웠다. 그런데 곤명호(昆明湖)라 부른 이호수가 인공호수라니…. 아직 감탄하기는 이르다. 호주 한편에 우뚝 솟은 산은 호수를 만들 때 파낸 흙으로 쌓은 산으로 만수산(萬壽山)이란다. 중국인들의 크기에 대한 열망에 무한한 경외감을 느낀다.

이화원. 인공호수인 곤명호와 인공산인 만수산
 이화원. 인공호수인 곤명호와 인공산인 만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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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원 곤명호에는 연꽃이 피었다.
 이화원 곤명호에는 연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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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원은 처음 청의원(淸漪園)이었는데, 1860년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원명원을 불태웠을 때 함께 파괴되었다. 그러다가 광서 14년(1888)에 서태후는 해군 군비를 이용해서 재건하면서, 이름을 현재의 "이화원"으로 바꿨다.

이화원 재건 때문에 청나라가 몰락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태후가 해군 군함을 만들 군비를 이화원 재건에 전용하자 많은 비난이 일었다. 서태후는 이화원이 해군 훈련을 위한 장소라고 했다나. 후일 청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해군 군함이 바다에 나가지 못해서 일본에 졌다는 말이 있다.

이화원은 서태후의 여름별장

서태후가 이화원에 각별한 관심을 둔 목적은 피서와 요양이었다. 서태후는 이곳에서 신하들과 국정을 논할 일이 많이 생기자 정원 앞 부분에 궁전과 생활거주지구를 짓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화원은 궁전과 정원 두 가지 기능을 모두 갖춘 황족 정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서태후는 만주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고 북경으로 이사해서 17살에 궁에 들어간다. 당시 궁녀들은 3년에 한 번씩 물갈이를 하는데, 황제의 눈에 들지 못하면 출궁을 하게 된다. 황실 정원인 원명원에 있던 서태후는 내시에게 있는 돈을 다 줄 테니 기회를 달라고 했고, 내시는 3일 뒤에 황제가 오니 능력껏 알아서 하라고 이야기 한다.

3일 뒤 황제가 원명원을 방문하게 되고, 서태후는 호숫가에 앉아 비파를 치며 유일한 재주인 노래를 불렀다. 황제는 노랫소리에 이끌려 서태후에 호감을 갖게 되고, 아들을 낳으면 황후대접을 해준다는 약속을 받는다. 서태후는 약속대로 아들을 낳게 되고, 기존 황후는 동태후가 되었다.

황제가 죽자 9살 아들이 황제를 물려받고 서태후는 섭정을 하게 되면서 무한 권력을 갖게 된다. 이후 서태후는 남편이 없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이화원에서 일상을 보내게 되고, 북경에 잘생긴 남자들을 잡아와서 즐기고 없애버렸다고 하니, 북경에 잘생긴 남자는 씨가 말랐다고 한다.

서태후 침실인 낙수당.
 서태후 침실인 낙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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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원 서태후 침실 앞에는 기둥이 있는데, 당시 정을 통하던 내시가 서태후에게 잘 보이려고 그곳에 홍등을 달아 전깃불을 켰다고 한다. 서태후는 너무나 아름다운 홍등에 반했고, 이는 중국에 전기가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길이가 728m로 세계에서 가장 긴 복도인 장랑 난간에 기대어 섰다. 이화원을 미처 다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다. 만수산에 올라보고 싶은데…. 정원이 큰 것만큼 그 안에 있는 허전함도 크다.


태그:#북경, #베이징, #천안문, #자금성, #이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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