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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내일(7월 21일)이다. 마침내 제주 4·3 역사기행을 떠난다. 짧은 2박3일 동안 4·3이라는 묵직한 이름 뒤에 우리는 무엇을 담고 올 수 있을까? 이전의 캠프도 그랬지만 이번 캠프는 준비과정과 각오, 느낌이 남다르다. 아직 결정해야 할 것이 한가지 더 남아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H와 상담을 했다. 결정은 이미 일 주일 전에 내린 상태였다. 그렇지만 H를 데려가기로 결정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널 믿어도 되겠지?"
"뭘요?"

그는 내 질문의 의미를 알면서도 되물었다. 그가 이제껏 보여준 모습에 여전히 물음표를 지울 수가 없었다. 솔직히 그를 공부방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를 데려간다는 말에 우려 섞인 목소리도 많았다. 그럼에도 그가 나와 아이들에게 한 약속을 믿기로 했다. 이로써 이번 제주 4·3 역사기행 참가 인원은 인솔교사 셋을 포함 모두 22명이 됐다. 길벗투어 K팀장과 최종 확인 전화를 했다.

다음날 오전 11시, 푸른학교(경기도 성남 소재 지역아동센터)에 도착했다. M선생님이 먼저 도착해서 점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도 서너 명이 짐을 바리바리 싼 가방을 옆에 끼고서 음악을 듣거나 인터넷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달뜬 목소리와 표정엔 생전 처음 제주도를 간다는 기대와 호기심이 잔뜩 묻어났다.

두시간 동안 연안부두행 지하철을 접수하다

성남에서 연안부두까지는 지하철로 두 시간이 넘는 거리다. 혼자 가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스무 명이 이동하기엔 만만찮은 거리다. 버스이건 지하철이건 단연 눈에 띈다. 특히 지하철에선 가능하면 경로석을 피해야 한다. 술 취한 어르신의 일장 훈계를 참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캠프를 함께 하지 못하는 L선생님이 자가용으로 연안부두까지 짐과 아이들 몇명을 데려다 주셨다.

2시 30분, L은 아이들 넷과 짐을 싣고 먼저 연안부두로 출발했다. 나를 포함한 열여덞 명은 각자의 짐을 메고서 동인천행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지하철 한 칸이 북적였다가 휑했다. 갈아 탈 때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란다. 동인천역까지는 두시간이 넘게 걸렸다.

오후 5시에 동인천역에서 내렸다. 5번 출구로 나와서 24번 버스를 타야 하는데 5번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일순간 뒤에서 따르던 일행을 놓쳐 버렸다. P에게 전화를 했다. 2번 출구로 나왔다는데 보이지 않는다. 십여 분을 헤메다가 조를 지어서 택시를 타라고 했다. 연안부두에서 만나자고 했다. 초반부터 일이 틀어진다. 나와 3학년인 B가 먼저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L과 아이들, 그리고 K팀장이 우리를 맞았다. 출발 전날 주문한 도시락도 도착해 있었다. 잠시후 아이들이 모두 도착했다. L과 작별인사를 했다.

두번째 만나는 오하마나호, 아니 오바마호

오후 6시 30분, 드디어 오하마나호 승선이다. 아이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거대한 배의 위용에 감탄산를 연발한다. 바람은 언제나 거세다. 승선하기 전 선착장 앞에서 현수막을 펼치고 단체사진을 찍었다. C1, C2. 객실을 두 개 배정 받았다. 3등실이지만 다른 일행들과 섞이지 않아서 좋았다.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의 숙소가 더 넓고 좋다며 투덜거린다. 배에 오르니 긴장이 다소 풀린다. 슬슬 배도 고팠다. 아이들도 배가 고픈듯 손에는 과자 봉지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오하마나호에 오르고 있다.
▲ 오하마나호 오하마나호에 오르고 있다.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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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이 배 이름이 뭐예요?"
"오하마나호."
"네?"
"오~ 하마나호."
"에이 너무 어려워요. 그냥 오바마호 할래요."

도시락을 풀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다. 3500원짜리 도시락 치고 메뉴는 괜찮았다. 과자를 먹은 아이들은 밥과 반찬을 남겼다.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출발하는 모양이다. 도시락을 다 먹지도 않은 채 갑판으로 달려나갔다. 배는 이미 항구에서 상당히 멀어져 있었다. 갈매기 수십 마리가 무리를 지어 배 옆으로 날아온다. 아이들이 과자를 내밀자 갈매기들이 잽싸게 채간다. 아이들은 더욱 흥분한다. 부지불식간에 손가락을 물린 한 여학생은 기겁을 하며 뒤로 넘어진다.

오하마나호 인천 연안부두를 떠나고 있다.
▲ 오하마나호 오하마나호 인천 연안부두를 떠나고 있다.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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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8시부터 객실에서 모둠 활동을 시작했다. 출발 전 세 모둠으로 나누었다. 조장은 3학년인 H와 B, 그리고 1학년인 J였다. 모둠 이름과 구호 그리고 숙소에서 할 장기자랑을 정했다. 벌칙으로 제일 점수가 낮은 모둠이 캠프 마지막 날 아침식사를 준비하기로 했다. 세 모둠이 모두 장기자랑을 정하는 데는 한 시간 정도 걸렸다.

밤 10시가 넘었다. 몇 명이 배멀미를 했다. 이골이 났을 K팀장도 속이 안 좋았다. 스피커에서 불꽃놀이를 시작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우르르 달려 나갔다. 사회자의 신호가 끝나자 신나는 음악과 함께 삼천 발이 넘는 불꽃이 망망대해의 밤하늘을 밝게 수놓았다. 선상에서의 댄스 타임. 이 망망대해에서 모두가 열광하라. 아이들은 이 순간을 만끽했다. 짧은 열정의 시간이 지나간 후 사람들은 다시 이 좁은 배안 어딘가로 자기만의 시간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런데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 선상을 올라가니 아이들 서넛이 내려온다. 표정이 심상찮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우리는 가만히 있었는데 어떤 남학생이 시비를 거는 거예요."
"맞아요. 그래서 한 마디 해주고 내려오는 거예요."

혹시나 싶어서 객실에 들어가라고 했다. 잠시후 일단의 학생들이 누군가를 찾으며 선내를 돌아다녔다. 표정을 보니 심상치 않았다. 아까 그 일 때문에. 불안이 엄습했다. 급히 객실로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간곡히 당부했다. 선생님은 텔레비전에 나오고 싶지 않다고...

"너희들 어디서 왔니?"
"용인에서요."
"제주도는 왜 가는 건데?"
"축구 시합이 있어서요."
"축구부구나, 그런데 아까부터 누굴 찾는 것 같은데...."
"누군가 가방에 있던 돈을 훔쳤나 봐요. 목격자가 있어서 지금 그 애 찾고 있는 중이에요."

휴, 일단은 안심이다.

제주도, 그리고 식당 주인이 인심이 좋았던 까닭은?

"선생님, 저 위에 보이는 것이 한라산이에요?"
"글쎄."

산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9시가 넘었지만 배에서 내리지 못했다. 예정보다 삼십 분 정도 더 지나서 배에서 내릴 수 있었다. 검정색 선글라스를 낀 버스 기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는 출발하자마자 허기를 달래줄 식당으로 향했다. 값에 비해서 메뉴가 꽤나 풍성했다. 여행지에서의 메뉴는 형편 없기가 일쑤다. 제주도의 인심이 박하지 않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저녁에야 알수 있었다.

결7호 작전, 그리고 알뜨르 비행장

4·3은 한두 가지의 사건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과정의 결정체다. 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군의 진주를 막아야 하는 일제는 제주 전지역을 요새화 시켰다. 일본 본토를 방어할 목적으로 결1호부터 결7호까지 작전을 짠다. 제주도는 그 마지막인 결7호에 해당한다.

8월 15일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원폭이 떨어져도 일본이 항복을 하지 않았다면 제주도는 미군과 일제에 의해서 초토화되었을 거라고 K팀장은 제법 비장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더위에 지친 아이들은 집중하지 못했다. 7만이 넘는 일본 군인이 20만의 제주도민을 인질로 연합군과 결사 항전을 벌였다면... 잊혀지는 역사의 비극들, 그 한 페이지 한페이지를 들여다 볼 때마다 지금 누리고 있는 평화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는다.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다. 수십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형태를 온전히 유지할만큼 튼튼하게 지어졌다.
▲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다. 수십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형태를 온전히 유지할만큼 튼튼하게 지어졌다.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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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4·3역사 기행 코스는 알뜨르 비행장이었다. 햇볕이 따가운지 아이들은 조금만 걸어도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비행장은 밭이 되어 있었지만 얼마나 튼튼하게 만들었는지 격납고만은 지금도 그 형체를 온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비행장이 갖는 의미는 특별 할 수 밖에 없다고 K팀장은 거듭 강조했다.

섣알오름 학살터(탄약고) 그리고 올레길 10코스
송악산을 오르기전 섣알오름 학살터를 찾았다. 이백명이 이곳에서 학살을 당했다고 하는데 바닥이 시멘트로 되어 있어서 늪처럼 되었다고 한다.
▲ 섣알 오름 학살터 송악산을 오르기전 섣알오름 학살터를 찾았다. 이백명이 이곳에서 학살을 당했다고 하는데 바닥이 시멘트로 되어 있어서 늪처럼 되었다고 한다.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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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알오름 학살터를 지나 송악산으로 향했다. 송악산을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에 아이들은 무척이나 힘들어 했다. 가는 길목마다 말똥이 있어서 아이들은 기겁을 해댔다. 사실 이번 코스는 나도 예상치 않던 코스였다. 앞에서 우리를 안내하던 K팀장도 아이들이 힘겨워 하자 좀더 쉬운 코스로 변경했지만 힘들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짬짬이 쉬면서 먹는 방울토마토가 무척이나 달았다.

"이런 캠프가 어디 있어?"
"캠프 다시는 오지 않을 거야."

도대체 캠프와서 등산은 왜 하는 거냐며 아이들은 투덜거렸다. 그나마 중간 중간 말들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송악산 올레길 오르는 길에 말농장이 있었다.
▲ 송악산 올레길 송악산 올레길 오르는 길에 말농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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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날수록 땀은 비오듯 쏟아졌고 아이들의 짜증은 극에 달했다. 해안동굴을 가기 전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아이들은 배가 고팠는지 거의 잔반을 남기지 않았다. J만 배가 고프다며 밥을 먹지 않았다.

해안 동굴, 그리고 4·3평화 기념관

점심을 먹은 후 해안 동굴 답사를 끝으로 마지막 코스인 4·3평화 기념관으로 향했다. 직접 손으로 팠다는 해안동굴은 내부가 막혀 있었지만 트럭도 드나들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해안을 끼고 십여개의 동굴이 있었다. 동굴끼리는 서로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한다. 넓은 곳은 트럭도 드나들수 있다고 하는데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동굴을 손으로 직접 팠다는 것이다.
▲ 해안동굴 해안을 끼고 십여개의 동굴이 있었다. 동굴끼리는 서로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한다. 넓은 곳은 트럭도 드나들수 있다고 하는데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동굴을 손으로 직접 팠다는 것이다.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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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기념관안의 내부 전경이다. 학살 장면을 형상화 시켰다. 백비(이름이 없는 비석)가 있었는데 가이드 말로는 아직 43을 정의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언젠가 이 비석에도 이름이 새겨질것이다.
▲ 43평화 기념관 평화 기념관안의 내부 전경이다. 학살 장면을 형상화 시켰다. 백비(이름이 없는 비석)가 있었는데 가이드 말로는 아직 43을 정의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언젠가 이 비석에도 이름이 새겨질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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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평화 기념관은 깔끔하고 단장이 잘 되어 있었다. 시간대별 흐름도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갑자기 몰려든 다른 팀으로 인해 가이드의 설명을 제대로 들지 못한 게 아쉬웠다.

펜션급 숙소에 아이들의 입이 쩍 벌어지다

바닷가로 가기 전 숙소에 짐을 풀었다. 숙소는 생각보다 깔끔하고 넓었다. 아방궁이 따로 없었다. 아이들 입이 쩍 벌어졌다. 6시가 넘었다. 아이들은 빨리 물놀이를 하고 싶다며 성화다. 7시에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으니 해변에서의 물놀이는 기껏해야 한 시간 정도다. 한 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에 사방에서 볼멘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짧은 물놀이가 끝나고 아침을 먹었던 식당으로 향하는데 K팀장이 저녁 메뉴가 맘에 들지 않더라도 이해해달란다.

"무슨 말이에요?"
"아침 메뉴가 다른 팀이랑 바뀌었어요."

같은 값인데도 아침 메뉴랑 차이가 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저녁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음 모둠별 장기자랑을 했다. 연습 시간이 짧았음에도 아이들은 그들만의 흥겨운 시간을 스스로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일정은 담력 테스트다. 진행은 수학 튜터를 맡고 있는 P가 맡았다. 지원자 넷을 데리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숙소 근처에 숲이 있어서 담력 테스트를 하기에 좋았다. 두 명씩 짝을 이루어 숲으로 보냈다.

담력 테스트를 끝으로 제주에서의 첫날 일정이 모두 끝났다. 아이들은 숙소에서 밤이 늦도록 컵라면을 끓여 먹거나 게임을 했다. 숙소 앞에 편의점이 하나 있었는데 늦은 시간이어서 문은 닫혀 있었다. 편의점 옆 빈 테이블에 앉아서 선생님들끼리 하루 일과를 정리하고 있는데 숙소 앞에 택시가 서더니 술이 취한 두 남녀가 내린다.

얼마나 마셔댔는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바닥에 널부러진 여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남자가 여자를 일으켜 세우려 하지만 남자 또한 술이 만땅이다. 역부족이다. 그렇게 한동안 두 남녀는 엉켜 있었다. 남자가 널부러져 있는 여자에게 일어나라며 욕지거리를 해댄다. 아이들이 창밖으로 얼굴을 내민다. 술취한 남자가 아이들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K팀장이 한마디 하자 그녀에게도 욕을 내뱉는다. 경찰서에 전화를 했다. 잠시 후 경찰차가 도착했다. 경찰과 몇마디 주고 받던 남자는 여자를 등에 업고 골목 어딘가로 비틀비틀 사라진다.

아이들이 준비한 아침식사, 짠물 먹이며 복수를 하다

펜션급 숙소 때문인지 캠프를 진행한 후로 가장 편하게 잠을 잤다. 눈을 감자마자 아침이었다. 어젯밤 장기자랑에서 2등을 한 H의 모둠이 차라리 설거지 대신 밥을 하겠다고 했다. 메뉴는 간단했다. 만두라면. 조금 불었지만 H는 약속대로 조장 역할을 잘 수행했고 또 아이들과도 별다른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9시에 출발을 하기로 했는데 짐을 챙기는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다. 다시 해변이다. 원래는 한라 수목원을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전날 물놀이 시간이 너무 짧았던 터라 다시 해변으로 가기로 했다. 오늘은 나도 물놀이를 할 생각에 여벌옷을 준비했다. P와 M선생은 물에 들어갈 생각이 없는지 돗자리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나는 이 참에 녀석들에게 그동안 당한(?) 복수를 하고 싶어졌다. 조용히 다가가서 한 명씩 물을 먹였다.

"어푸 어푸. 살려주세요. 오지 마세요. 저리 가세요. 아! 안돼욧! 어푸 어푸."

아이들은 내가 다가가자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하지만 언제 또 내게 이런 기회가 올까? 흐흐흐. 살려 달라는 애원에도 불구하고 잔인하게 물을 먹여줬다.

제주 국제 공항 검색대에 걸린 까닭은?

오전 11시, 제주 국제 공항에 도착했다. 아이스박스가 무겁다. 가져온 음식이 거의 그대로다. 군것질을 못하게 했어야 할까? 판단 미스다. 버스에 두고 내렸던 떡은 쉰내 가득하다.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M선생님이 후원인들에게 줄 선물(녹차 초콜릿)을 샀다. 아이들도 아껴둔 용돈을 모아서 부모님에게 드릴 초콜릿을 하나씩 사서 들고 있었다. 검색대를 통과하는데 뭔가가 걸렸다. 짐을 풀어보니 필통 속에 칼이 하나 들어 있었다.

공항에선 의외로 버려야 할 것들이 많았다. 기상 악화로 탑승 수속을 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서울은 폭우가 쏟아지고 있단다. 열두 시 탑승 예정이었지만 이십 분 정도 더 걸렸다. 전속력으로 직진하던 비행기는 한순간 공중으로 솟아 올랐다. 붕 뜨는 느낌, 아! 이런 느낌이구나. 나 역시 비행기는 처음이다. 아이들 앞이라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조금은 떨린다. 아이들도 긴장이 되는지 조심스레 멀어지는 육지를 바라본다. 어느새 제주도는 사라지고 작은 지도가 되어 버렸다. 구름이 저 아래에 있다. 신기하다. 기류의 변화로 기체가 조금씩 흔들렸다.

잠수함 빼고 육·해·공을 다 타다

발을 내딛은 김포 공항은 축축했다. 출발이 늦어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비는 그쳤다. 우리는 캠프 내내 비를 피해 다녔다.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공항이라 그런지 값이 무척 비쌌다. 보통 7000원 이상이다. 감자칩을 뺀 햄버거 세트를 시켰다.

"아, 제주도 다시 가고 싶다."
"택시, 지하철, 배, 비행기, 버스, 등산까지... 잠수함 빼고 육해공군 다 탔네."
"등산하는 것만 빼면 디게 재미있었는데..."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햄버거와 콜라를 마시며 2박 3일의 여정을 돌이켜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여러분들은 생애 몇 번쯤은 제주도를 방문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제주는 관광의 섬, 특별 자치도시, 이국적인 풍광들, 그런 이미지들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런 평화의 모습 뒤에 가려진 4·3의 비극을 또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 첫번째 방문으로 4·3 역사 기행을 했다는 사실은 여러분들이 훗날 제주도를 다시 방문 할 때에는 그 의미가 남다를 것입니다." 

처음 역사기행을 시작할 때 K팀장이 아이들에게 한 말이다.

그렇다. 2박3일 짧은 여정. 그 중에서도 단 하루라는 시간 동안 우리 안에 4·3을 온전히 담기엔 부족하다. 그의 말처럼 제주도를 방문하는 첫 목적이 4·3을 알기 위한 역사기행이었다라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번 기행의 목적은 성공이 아닐까? 우리에게 4·3은 아직 미완성이다. 아니 뭇사람들에겐 잊혀진 역사다. 평화 기념관의 '백비'가 말해주듯이 5·18 광주 민주 항쟁 혹은 혁명처럼, 아직 4·3이라는 숫자 뒤에 어떠한 수식어가 붙지 않았으므로.

이번 아이들과의 역사 캠프, 7할은 긴장 그리고 3할은 즐기자는 출발전의 결심은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했다. H는 나의 염려를 온전히 기우로 만들었다. 때때로 불만을 토로하기는 했지만 모둠을 잘 이끌었고 모둠 활동도 멋지게 해냈다. 그가 모둠장이 되어서 이끈 장기자랑도 멋진 공연을 펼쳤다. 이번 캠프를 기회로 우리는 조금더 친해 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 또한 서로를 좀 더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 게임을 통해서 복잡하게 얽혀 버린 커플(?)끼리 문제만 생기지 않는다면...

덧붙이는 글 | '2010 이 여름을 화끈하게! 응모' 기사입니다



태그:#제주도, #여름 캠프, #공부방, #43역사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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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 뉴스 시민기자입니다. 진보적 문학단체 리얼리스트100회원이며 제14회 전태일 문학상(소설)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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