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나가사키시 마츠야마 마치 171번지. 이곳은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미군에 의해 원자폭탄이 투하된 낙하중심지다. 그 폭심의 위치를 가리키는 검은 '낙하중심비'가 세워져 있으며, 그 우측에는 폭심으로부터 500m 떨어진 거리에 있던 우라카미 성당의 피폭 잔해를 옮겨놓은 것이다. 나가사키 폭심지 공원의 상징적인 피폭 유물이다.
▲ 나가사키 폭심지 공원 나가사키시 마츠야마 마치 171번지. 이곳은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미군에 의해 원자폭탄이 투하된 낙하중심지다. 그 폭심의 위치를 가리키는 검은 '낙하중심비'가 세워져 있으며, 그 우측에는 폭심으로부터 500m 떨어진 거리에 있던 우라카미 성당의 피폭 잔해를 옮겨놓은 것이다. 나가사키 폭심지 공원의 상징적인 피폭 유물이다.
ⓒ 전은옥

관련사진보기


뉴욕에는 9.11 사건으로 미국의 심장부였던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진 자리에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가 있다. 110층의 초고층 빌딩으로 이른바 '쌍둥이 빌딩'으로 불리웠던 두 동의 건물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본래 '그라운드 제로'는 군사적인 관점의 용어로서 원자폭탄이나 수소폭탄 등의 핵무기가 투하된 폭발중심지를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그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폭력적인 용어이기도 하다. 어쨌든 따옴표를 사용하여 굳이 말하자면, 뉴욕에 앞서 이미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그라운드 제로'가 있었다.

나가사키시 마츠야마 마치 171번지. 이곳은 1945년 8월 9일 미국이 세계2차대전 말기 인류 역사 최초의 핵무기를 히로시마에 투하한 3일 후, 두번째 핵무기를 떨어뜨린 '폭심' 지점이다. 사람들은 '원자폭탄이 떨어졌다'라고 할 때, 흔히 원자폭탄이 곧바로 땅에 떨어져서 폭파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실제로는 미군 폭격기 복스카가 고도 약 9000m에서 원폭을 투하하자 그것이 점차 지상으로 가까이 내려오다가, 상공 500m지점에서 엄청난 섬광을 발하며 폭발하고 곧이어 강력한 열선과 폭풍, 방사능의 위력으로 생명을 살상했던 것이다.

이 핵무기가 폭발한 순간 직경 2백 미터의 불기둥이 솟아올랐는데, 원폭 피해자들은 마치 태양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았다고 증언한다. 나가사키 평화추진협회가 제작한 원폭자료관 학습서에 따르면 이 핵무기는 폭발과 동시에 약 3초동안 엄청난 고열로 지상을 에워쌌다고 한다. 핵무기가 투하된 낙하 중심지는 지면 온도가 3000도에서 4000도였다. 1km 떨어진 곳에서도 약 1800도, 1.5km 떨어진 곳에서는 600도의 열선이 방출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온 도시를 불태우고 삼켜버렸다.

지금 마츠야마 마치 171번지에는 '폭심지 공원'이 들어서 있다.  원폭이 투하된 그날 이곳에는 수목으로 둘러싸인 어느 부호의 별장이 있고, 테이스 코트가 있었는데 당시 미쯔비시 나가사키 조선소가 여자 근로정신대의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매수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아직은 빈집 상태였다. 1945년 8월 그날의 희생과 아픔을 기억하며, 핵무기와 전쟁이 없는 세계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이곳에는 원폭 낙하 중심비가 세워져 있다. 나가사키의 '그라운드 제로'인 것이다. 그리고 중심비를 기준으로 주변은 동심원으로 계단식 잔디가 둘러싸고 있다.

현재 '그라운드 제로'에 세워져 있는 검은 색의 기둥은 1956년 3월 나카사키시가 제작한 삼각주 위에 화강암을 올린 것이다. 원폭 피폭 직후부터 헤아리면 폭심지를 가리키는 표식으로서는 네번째로 세워진 것이다. 

'마츠야마 마치 원폭 피폭지 복원의 회'가 펼친 현지 주민들의 열성적인 조사 활동에 기반하여 복원해낸 원폭 피폭 당시의 주택과 거주자 성씨 복원도. 이 안에는 조선인의 성인 '김'이라는 이름도 포함돼 있다.
▲ 나가사키시 원폭 피재지 시가지 복원도 '마츠야마 마치 원폭 피폭지 복원의 회'가 펼친 현지 주민들의 열성적인 조사 활동에 기반하여 복원해낸 원폭 피폭 당시의 주택과 거주자 성씨 복원도. 이 안에는 조선인의 성인 '김'이라는 이름도 포함돼 있다.
ⓒ 마츠야마 마치 원폭 피폭지 복원의 회

관련사진보기


1945년 미국은 핵무기를 투하해놓고, 원자폭탄 피재 조사단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보낸다. 그 조사단이 최초로 '그라운드 제로'에 한자로 '폭심', 영어로 'Centre'라는 글자를 새겨 작은 막대를 꽂는다. 그 막대가 사라진 후, 1946년에 간단한 형태의 두번째 중심비가 세워졌고, 1948년에 '원자폭탄 낙하 중심지의 표, 지상 500에서 작열'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세번째 비가 시민들의 주목 속에서 세워진다.

당시 마츠야마 쵸(당시 행정명, 폭심지로부터 동서남북 250m)에는 주택이 밀집해 있었다. '마츠야마 마치 원폭 피폭지 복원의 회'에 따르면, 이곳에는 약 300세대에 1860여 명의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혼자 방공호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피폭을 당하고 살아남은 7살의 소녀 스가와라 타에코를 포함한 단 2명의 소녀를 제외하고는 전원이 즉사했다고 한다. 당시 나가사키시 인구가 21만 명으로 전체 피폭자 수를 헤아리면 약 7만 5천여 명이 사망, 7만 5천여 명이 부상을 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추정치에 불과하다. 65년이 지난 지금도 정확한 통계는 내놓지 못하고 있다.

나가사키시에서는 '마츠야마 마치 원폭 피폭지 복원의 회' 등이 주축이 되어 당시 이 지역에 몇 채의 집이 있었고, 각각의 집에는 누가 거주했는지 그 이름을 되살린 복원도가 제작되었다. 공원내에 그 복원도가 설치돼 있다. 1945년도의 각종 주택 설계도나 도시 설계와 주민 거주와 관련된 행정 기록을 필사적으로 추적하여 복원한 것이라 하는데 간간이 공란도 아직 남아 있다. 빈집이었는지 혹은 누가 살았는지를 도저히 밝혀내지 못한 채 미궁속에 갇혀 버린 곳이다.

마츠야마 마치 171번지는 하필이면 '그라운드 제로'에 있었으니 주택들이 전파, 전소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하얀 재가 되어버린 것은 물론이다. 당시 우연히 작은 볼일이 있어서 폭심지 부근에 들어가 있었던 사람을 포함하여 신원도 판명되지 않은 채로 화장된 사람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온가족이 전멸한 경우도 많았다. 검게 타버린 건물 더미 속, 누구의 것인지 헤아려 볼 수도 없이 공원 밑에 파묻혀 있는 그 유골들은 아마도 누군가의 엄마이며 아기이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어린 아이였을 것이다. 당시 젊은 남자는 군대와 전선으로 갔고, 학생들도 동원학도나 근로정신대라는 이름 등으로 강제동원되어 군수공장에서 저마다 제 몫의 일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

'나가사키 증언의 회'의 모리구치 마사히코 씨(71세)는 "이곳에 조선인이 살고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의 복원도를 보면 그속에 새겨진 거주자의 성씨 중 김씨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본인 중에서 이런 성씨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으므로 조선인이었을 겁니다"라고 말한다.

공원보다 지층이 약 2~3m 가량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공원에서 계단을 타고 2m쯤 내려간 곳에 당시 원폭피해를 입고 타다 남은 어느 가정집의 식기구와 가재도구 잔해들이 피폭당시의 지층과 함께 발굴되어 보존되고 있다. 이것이 유일하게 공개되고 있는 부분이며, 공원 재정비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원폭의 날, 폭심지 옆을 흐르던 이 강 저수지에서 수영을 하던 나가사키 공업학교 학생 20여 명도 전원 즉사했다고 한다.
▲ 폭심지 공원 옆을 흐르는 작은 강 원폭의 날, 폭심지 옆을 흐르던 이 강 저수지에서 수영을 하던 나가사키 공업학교 학생 20여 명도 전원 즉사했다고 한다.
ⓒ 전은옥

관련사진보기


세계 2차 대전 말기의 일본에서는 미군의 본토 공습에 대비하여 국가의 방침에 따라 어린아이는 먼 시골 지역으로 소개(疏開)를 당했다. 모리구치 마사히코 씨도 폭심지로부터 약 39킬로미터 떨어진 소개 지역에서 원폭의 버섯구름을 목격했다고 한다. 1945년 8월 9일 그날 오전 11시 2분. 소년 모리구치의 눈앞은 새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나서 엄청난 폭음이 들려왔다. 시내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아직 나가사키에 남아 있는 가족이 있었기 때문에 일주일 뒤에 시내에 돌아와 보니 복구작업이 시작돼 있기는 하였으나 예전의 나가사키가 아니었다.

일주일 뒤의 나가사키 시에서는 죽은 시체들을 불태우는(화장) 연기로 가득차 있었다. 모리구치 씨는 아직 방사능이 잔류해 있던 시기에 시내로 들어왔으므로 일본 정부가 정한 피폭자 분류에 따르면 '입시(入市) 피폭자'에 해당한다. 원폭의 그날로부터, 일본이 전쟁에서 패전한 그때로부터 65년 동안 모리구치 씨는 이 전쟁과 원폭을 자신이 어떻게 대면해 살아야 하며, 후세대에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를 줄곧 고민하며 살아왔다고 한다.

검은빛의 원폭 낙하 중심비가 세워진 앞 자리에는 '원폭 순난자 명부 봉안함'이 있다. 그곳에 선 모리구치 씨는 말한다.

"나가사키의 원폭을 국내 외에 전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단어가 바로 '순난(殉難)'이라는 단어입니다. 순난이라는 단어는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신념과 가치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원폭 순난자라는 말투는 일본의 전쟁, 일본 국난의 때에 천황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전쟁에서 천황과 국가가 지향한 목표를 위해서 이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바쳤다는 의미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밟고 있는 이 공원의 풀밭 2m 지하에 묻힌 400여 명의 아기와 어린이와 엄마들이 과연 스스로 천황을 위해 목숨을 던졌을까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원폭 낙하 중심지 공원 안내판에 소개된 최초의 원폭낙하 중심 지점을 가리키는 표식. '폭심 Centre'라고 적혀 있다.
▲ 미군이 원폭투하 직후 세운 '그라운드 제로' 위치 표식 원폭 낙하 중심지 공원 안내판에 소개된 최초의 원폭낙하 중심 지점을 가리키는 표식. '폭심 Centre'라고 적혀 있다.
ⓒ 하야시 시게오

관련사진보기


이 봉안함에는 나가사키시에서 원폭으로 인해 사망한 이들의 이름이 모셔져 있는데, 유가족과 후손에 의해 신청을 받아서 봉안했고 149,266개(2009년 8월 9일 현재)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고 한다. 이중에는 200명에 가까운 조선인의 이름도 들어 있다.

"과연 그 200명의 조선인 분들도 천황과 일본의 전쟁을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바쳤을까요? 여기에 계신 원폭 희생자들은 일본의 중고등학생을 포함해서 각종 군수공장 등에 강제로 동원되어 노동을 했던 사람들도 많은데 그들은 결코 순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희생자'입니다."

나가사키시는 그리스도교의 마을이고 그들이 탄압과 수난을 당했던 역사적인 땅이다. 원폭 투하 당시에도 이 부근의 우라카미 마을에는 1만 2천 명의 신자가 살고 있었고, 8월 9일 8500명의 신자가 즉사했다. 종교적으로 탄압 당하다가 끝내 배교하지 않고 끔찍하게 살해당한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이 나가사키에는 굉장히 많았다. 모리구치씨는 이러한 종교적인 풍토가 가미되어 아마도 '순교'의 이미지와 함께, 성찰 없이 여기저기에 '원폭 순난자'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시내 곳곳에 '순난자의 비'라는 이름을 가진 추모비가 몇몇 개 더 존재하고 있다.

나가사키에는 원폭을 기억하고 평화를 기도하는 장소로 두 개의 평화공원이 존재한다. 그 하나가 바로 원폭투하 중심지에 조성된 '폭심지 공원'이고, 또 하나는 원폭투하 중심지로부터 최단 거리로 100m, 최장 350m 거리에 위치한 언덕 위의 '평화공원'이다. 1951년 나가사키 국제문화도시 건설법에 기반하여 조성된 평화공원은 두 공원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거대한 청동의 평화기념상 앞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가는 곳은 언덕 위의 평화공원이다. 지금의 폭심지 공원은 원폭피해로 사라져 버린 주택지를 매장하고 세워진 공원이며, 언덕 위의 평화공원은 전회에도 소개한 것처럼 형무소와 사형장 터 위에 세워진 공원이다.

원폭에 피폭당했을 당시의 지층이 공원 재정비 공사 중에 발굴되어 일부분을 보존, 공개하고 있다. 파손되지 않도록 일반인은 두꺼운 유리창 속으로 안을 들여다 보도록 되어 있다. 옆에는 주택지가 밀집해 있던 당시 폭심지 부근 일대를 복원해놓은 지도와 피폭 직후의 참상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놓은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 원폭 피폭 당시의 지층 원폭에 피폭당했을 당시의 지층이 공원 재정비 공사 중에 발굴되어 일부분을 보존, 공개하고 있다. 파손되지 않도록 일반인은 두꺼운 유리창 속으로 안을 들여다 보도록 되어 있다. 옆에는 주택지가 밀집해 있던 당시 폭심지 부근 일대를 복원해놓은 지도와 피폭 직후의 참상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놓은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 전은옥

관련사진보기


올해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도 원폭 피폭의 땅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찾는다고 한다. 나가사키에서는 8월 5일 원폭 낙하 중심비를 방문한 뒤, 조선인 원폭희생자 추도비에도 헌화할 예정이라 한다. 8월 6일에는 히로시마 평화공원에서 열리는 평화기념식 행사에도 참석한다. 수많은 일본인과 외국인들이 올해도 나가사키의 형무소 터 평화공원과 수많은 뼈들이 묻혀 있는 원폭낙하 중심지의 땅위를 걷고, 사진을 찍고, 꽃을 바치고, 기도를 올릴 것이다. 

한일강제병합 100년의 피해자였으며, 피식민지배와 일본의 아시아 태평양 침략전쟁의 폭주 끝에 드리워진 65년 전 원폭의 참상은 일본인만의 몫이 아니었다. 핵무기는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북한 사람이든, 미국사람이든 그 어느 누구에게도 사용되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지만, 어쨌든 당시 한반도에서 건너갔던 한국인들의 원폭 피해는 강제연행 문제나 '위안부 문제', 그리고 일본군의 이름으로 죽어야 했던 조선인 BC급 전범 문제와 더불어 침략전쟁 피해의 극단을 보여주는 복잡다단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전쟁없는 세상과 핵무기 없는 세상, 그리고 한반도 정세의 일촉즉발 위기 속에서 동아시아와 전세계의 평화의 노력이 절실한 이때 한국인 유엔사무총장의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 방문은 그 의미가 특별하다. 과연 그가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어떤 메시지를 발신하고,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숱한 눈매가 주목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참고 자료

나가사키 평화추진협회,「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자료관 학습과 피폭지 순례・평화학습의 수기서」, 2000.
MUP나가사키 편,「나가사키 피스 트레일」, 해조사, 1995.
나가사키평화연구소 편,「가이드북 나가사키-원폭유적과 전적을 순례한다」,신일본출판사, 1997.
원폭낙하중심지 공원 안내판 설명문 등 참조.



태그:#나가사키, #원자폭탄, #그라운드 제로, #폭심지 공원, #원자폭탄 낙하 중심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주부이자, 엄마입니다.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