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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간 신세진 고성 할머니댁.
 이틀간 신세진 고성 할머니댁.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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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고성시장 근처 골목길에서 만난 할머니댁에서 이틀을 머물렀습니다. 피곤하기도 했지만 시골인심이 주는 푸근함 속에 좀더 머물고 싶었습니다.

처음 만난 주인 할머니와 이웃 할머니, 그리고 건넌방 세 들어 사는 할머니는 하루 거의를 함께 보냅니다. 세 분 외에도 동네 어른들, 조언을 구하러 오는 젊은 사람들이 심심찮게 들락거렸습니다. 왕년에 통반장을 지냈다는 할머니 위신이 여전한 듯 보입니다.

할머니가 차려주신 아침밥상
 할머니가 차려주신 아침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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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할머니는 일일드라마 <바람불어 좋은날>의 왕팬입니다. 재방송부터 '본방'까지 빠짐없이 사수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단단히 뿔이 나 있습니다. 극 중 오복의 남편 대한의 태도가 맘에 안 들어서입니다. 대한의 마음을 자꾸 흔드는 미란은 할머니들의 '공공의 적'입니다.

"저 만노므 자슥. 오복이 저 어린 걸 꼬이갖고 데꼬왔으면 잘해야지, 저 자슥 봐라, 저 자슥. 나쁜 자슥."
"저 저 나쁜년, 저기 또 오복이 남편 꼬신데이. 마 달려가서 확 머리채를 뜯어뿔라. 오복이 불쌍해서 우짜노 오복이 불쌍해서 우짜노…."

처음엔 우습다가 갈수록 흥분하는 할머니가 걱정스럽기도 했습니다. 호통을 치며 노여워하는 모습이 마치 현실의 일을 대하는 듯합니다.

특히 어제(27일) 방송분에서 대한에게 미란이 마음을 고백하며 억지 포옹을 할 때, 오복이 마침 두 사람이 있는 사무실 앞에서 들어갈지 말지를 망설이는 장면에선 "열어라, 후딱 열어라. 오복이 저 바보 같은기 저러다 또 속을끼다이"하며 애를 태웠습니다.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도 할머니의 근심을 끝나지 않습니다. "저 불쌍한 거 우짜겠노. 이혼하겠재? 잘 살겠나?"

TV 보며 이야기 나누시는 할머니들
 TV 보며 이야기 나누시는 할머니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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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할머니가 결단을 내린 듯 말했습니다. 

"안 되겠다. 내 저 드라마 만든 작가 보러 서울 가야겠다. 우리 오복이한테 나쁜 짓 하지 말라꼬 단단히 한 마디 해야겠다. 부모도 없는 불쌍한 거를 와 자꾸 괴롭히노. 작가 가시나도(*작가 분 성별은 모르겠습니다만) 말 안 들으면 쥐이 뜯어놓을끼다!"

고성 할머니들 오복이 잘못되는 날엔 정말로 상경하실 태세이니 <바람불어> 작가님, 부디 바람직한 결말 이끌어주시길 바랍니다. 드라마 종영 날에 할머니께 안부 전화 드려야겠습니다.

자전거 헬맷이 빨가니 예쁘다며 직접 써보는 이웃집 할머니.
 자전거 헬맷이 빨가니 예쁘다며 직접 써보는 이웃집 할머니.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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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여행 이후 처음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오전에 볼일이 있어 외출을 했는데 저만치서 달려오던 스쿠터가 자전거 뒷바퀴를 들이 받았습니다. 스쿠터 운전자인 아주머니가 놀라서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졌는데요, 다행히 큰 부상 없이 일어나시기에 보내드리고 나니 제 자전거가 굴러가질 않았습니다.

고성 와서 여행경비 아끼게 됐다 내심 좋아했는데 자전거 뒷바퀴 교체비로 2만5000원을 썼습니다. 아침에 어머니께서 "간밤 꿈에 왜 너가 20만 원을 달래지?" 하고 전화를 하셨는데 그 꿈이 이 사고의 암시였을까요. 여튼 몸 안 다친 걸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 덕에 고성 주민 한 분을 더 사귀었는데요, 자전거포 할아버지입니다. 자전거를 건네며 "잘 고쳐주실 수 있는 거죠?"하고 의심스러운 듯 물으니 "내가 17살 때부터 자전거 고쳤는데"하며 걱정말라는 투로 말했습니다. 다시 들렀을 때 이것저것 여쭤보니 고성에서 나고 자라 자전거포 하며 번 돈으로 아들 넷을 키웠다고 합니다. 옆에 계시던 할머니가 "고성에선 우리 할아버지가 최고지"하며 추어세웠습니다.

물건을 사러 갔다 예의상 젊어 뵌다 했더니 "그럼 나랑 데이트하면 되겠네"하던 슈퍼 할아버지도 재밌습니다. 잘 방도 내주고 끼니 때마다 정성 가득한 밥상을 차려주시는 할머니를 위해 사탕과 음료수를 사고 계산하는 동안 들은 얘기입니다. 이 할아버지 역시 고성 토박이로 23년간 같은 자리에서 슈퍼를 하다보니 요 앞 초등학교 다니던 아이가 애 아버지가 돼서 찾아 왔더랍니다. 

고성의 최고 베테랑 자전거포 할아버지
 고성의 최고 베테랑 자전거포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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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을 넘겼는데 10년은 젊어 보인다 했더니 그럼 데이트하자 하시던 슈퍼 아저씨.
 예순을 넘겼는데 10년은 젊어 보인다 했더니 그럼 데이트하자 하시던 슈퍼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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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따뜻하고 편한 이틀이었습니다. 세 할머니 모여서 서로 의지해 사는 것도 안심입니다. 주인 할머니는 3년 전 사별한 할아버지를 5년간 간병했는데 그 덕에 지병을 얻었다 했습니다. 셋방 할머니는 "어릴 때부터 지지리 복이 없어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다" 합니다. 어머니 일찍 여의고 길쌈도 하고 밭도 갈고 날품팔이도 하며 집안일을 혼자서 다 했다네요. 이웃집 할머니는 가족 없이 홀로 사는데 몇 년 새 암에 척추에 자궁 수술까지 해서 몸이 성하질 않다 했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어릴 때는 나이가 들면 그 나이에 누려야 할 것들을 자연스레 누리는 게 삶이지 했습니다. 열 살엔 부모 품에서 나날이 행복하고, 스무 살엔 봄 같은 연애를 하고, 서른 살엔 일과 결혼 두 마리 토끼를 쫓고, 마흔 살엔 마음 안팎이 무르익고…, 뭐 그런 것 말입니다. 하지만 서른 세 해를 살며 경험하고 지켜본 바로는 삶은, 그저 끝나는 날까지 아등바등거리는 건가 싶습니다. 

오늘 점심 무렵 할머니들과 작별을 했습니다. 새벽녘 세찬 장맛비에 잠을 깼는데 다시 눈을 떴을 땐 다소 잦아 들었습니다. 여전히 비가 내리긴 하나 마음이 가자 하니 몸도 따라 움직입니다.

감사의 뜻으로 사다드린 사탕과 음료수. 새콤한 아오리 사과는 본인이 먹고 싶어서.
 감사의 뜻으로 사다드린 사탕과 음료수. 새콤한 아오리 사과는 본인이 먹고 싶어서.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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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국내여행, #할머니, #바람불어, #자전거,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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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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