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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저녁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고 황민웅, 고 연제욱 씨 추모제에 한 켠에 마련된 영정사진과 제사상. 아래의 종이는 유족들이 직접 작성한 것이다.
▲ 고 황민웅, 고 연제욱 씨의 영정사진 23일 저녁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고 황민웅, 고 연제욱 씨 추모제에 한 켠에 마련된 영정사진과 제사상. 아래의 종이는 유족들이 직접 작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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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23일, 한 남성이 세상을 떠났다. 백혈병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4년 뒤인 2009년 7월 23일, 다른 남성이 세상을 떠났다. 종격동암이었다. 그들은 생전에 한 번도 서로 만나보지 못했으나, 딱 하나 공통점이 있었다.

'삼성'. 그들 모두 삼성전자의 직원이었다. 한 사람은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또 한 사람은 삼성전자 LCD 탕정공장에서 설비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병을 얻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사람이 되었다.

23일 서울역 광장에서 황민웅(2005년 사망, 당시 32세), 연제욱(2009년 사망, 당시 28세) 두 사람의 추모 행사가 열렸다. 오후 2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 회원들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선전전을 펼쳤다.

오후 7시가 넘어 반올림 이종란 노무사의 사회로 시작된 추모제는 오후 9시를 훌쩍 넘겨 끝이 났다. 150여 명이 촛불을 들고 모여 두 사람의 넋을 기렸다. 이들은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더 이상 감추지 마라"며 한목소리로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추모제에 함께한 홍희덕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은 "현 정권에서 산업재해를 승인하는 비율이 감소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번 정기국회에서 실효성 있는 자료를 요청하고 쟁점화하겠다"고 밝혔다.  

세상을 떠난 두 노동자의 유족들은 추모제에 마련된 발언 자리에서 애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황민웅씨 부인은 "자본은 사람을 때려도 된다고 누가 그러던가"라고 분노했고, "사람이, 젊은 노동자들이 죽어간다. 방관하는 동안 더 죽어갈지도 모른다"며 울부짖었다. 귀한 아들을 잃은 연제욱씨 어머니는 손으로 직접 써 온 편지를 읽다가 결국 오열했다.

23일 저녁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고 황민웅, 고 연제욱 씨 추모제에서 낭독된 고 연제욱씨 어머니의 편지. 곳곳에 눈물 자국이 있다.
▲ 고 연제욱씨에게 보내는 어머니의 편지 23일 저녁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고 황민웅, 고 연제욱 씨 추모제에서 낭독된 고 연제욱씨 어머니의 편지. 곳곳에 눈물 자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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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다감했던 오빠를 먼저 떠나보낸 연씨의 동생도 "(오빠가) 유언 한마디 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비명만 지르다가 떠났다"며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까, 얼마나 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을까"라고 울먹거렸다. 23일 오후, 추모제 전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수술도 받지 못하고 죽은 남편... 아이들을 봐서라도 세상과 타협할 수 없다"

23일 저녁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고 황민웅, 고 연제욱 씨 추모제에서 참석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앉아 있다.
▲ 추모제에 참석한 사람들 23일 저녁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고 황민웅, 고 연제욱 씨 추모제에서 참석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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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출장 갔다고 생각하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2005년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황민웅씨의 부인 정애정씨(34)는 지난 5년간 어떻게 보냈는지 묻자 그렇게 답했다. 정씨는 자신과 가족의 시간이 황씨가 살아 있던 그때에 멈춰 있는 듯하다고 덧붙였다. 아직도 남편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같은 사업장에서 만나 2년의 연애 끝에 결혼한 남편이었다. 2001년 결혼할 당시 그녀는 25세, 남편 황씨는 28세였다. 첫아이를 얻었으나 부부가 교대근무로 일하다보니 친정 부모에게 맡기기 일쑤였다. 바빠서 결혼기념일도 한번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3번째 결혼기념일이 다가오던 때, 그들은 이번에야말로 결혼기념일을 챙기리라 약속했다.

그렇게 손꼽아 기다리던 결혼기념일 바로 전날, 남편은 백혈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진단을 받기 한 달 전쯤인 9월 중순부터 남편은 몸살에 걸린 것처럼 온몸이 욱신욱신 아프다고 했지만 감기에 걸린 줄로만 알았다.

2주 넘게 약을 지어 먹어도 차도가 없었다. 동네 병원에서는 피 검사를 해보자 했고, 며칠 뒤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말을 들었다. 황씨는 수원 아주대병원으로 갔고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병원으로 간 바로 그날 항암치료가 시작됐다. 직접 차를 몰고 응급실로 온 황씨에게 담당 의사가 "어떻게 이 상태로 운전을 했느냐"며 놀라워할 정도로 위험한 상태였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전쟁같은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항암치료가 이어졌고, 골수기증자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애정씨는 그때를 "숨도 못 쉴 정도로 위급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정씨는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남편이 백혈병 판정을 받은 1주일 뒤, 임신 5주라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에서 골수기증자를 찾았다. 8월 13일로 수술 날짜를 확정한 날, 부부는 함께 울었다. 정씨는 "(남편이) 만삭인 내 배를 끌어안고 울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이제 살았구나' 해서 울었다더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황씨는 한쪽 눈의 시력을 잃을 정도로 기력이 쇠잔해진 상태였다. 결국 2005년 7월 23일, 황씨는 그토록 기다리던 수술도 받지 못하고 32세의 젊은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투병 9개월만이었고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황민웅씨가 세상을 떠나고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를 때까지, 부인 정애정씨는 11년을 몸담았던 자신의 직장, '삼성'을 의심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산업재해라고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정씨는 "(회사에) 11년을 다니니 (나도) '삼성맨'이 다 됐었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그는 뒤늦게 남편의 죽음에 의문을 갖게 되었고 힘든 싸움을 시작했다. 그 싸움이 햇수로 3년째다.

"약한 사람에게는 자신을 낮추고 강한 사람에게는 강해지려 하는 사람이었다. 애기 아빠(황민웅씨)의 '정의'를 알기 때문에 싸움이 낯설고 창피하지만 나를 격려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싸움을 시작하기 전 고민을 많이 했지만, 끝까지 갈 것이라 결심했다. 아이들을 봐서라도 세상과 타협을 할 수 없다."

정씨는 결연한 눈빛으로 힘주어 말했다. 그는 추모제 발언에서도 "내가 (싸움을) 끝내지 않는 한 삼성도 끝낼 수 없다. 그 희망으로 끝까지 싸워나가겠다"며 남편을 위한 싸움을 이어나갈 것을 밝혔다.

"사람 목숨 가지고 흥정한 삼성, 꼭 진실 밝혀내겠다"

23일 저녁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고 황민웅, 고 연제욱 씨 추모제에 참석한 유족들이 영정을 들고 앉아 있다. 왼쪽부터 고 황민웅 씨의 부인 정애정 씨, 고 연제욱 씨의 동생 연미정 씨, 어머니 최술연 씨.
▲ 눈물 흘리는 유족들 23일 저녁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고 황민웅, 고 연제욱 씨 추모제에 참석한 유족들이 영정을 들고 앉아 있다. 왼쪽부터 고 황민웅 씨의 부인 정애정 씨, 고 연제욱 씨의 동생 연미정 씨, 어머니 최술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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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하게 주는 돈이냐고 물었더니 '제욱씨는 겉으로 드러난 게 하나도 없어서 아무것도 아닌데 삼성은 초일류 기업이라서 성의표시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반올림'을 통해 재심사를 청구하면 이 돈도 드릴 수 없다고 했다." 

2009년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연제욱씨의 동생 연미정씨(28)는 산업재해 재심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들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죽은 연씨는 참 좋은 아들이자 오빠였고, 남자친구였다. 어머니에게는 "아프지 말고 잘 계시면 호강시켜 드리겠다"고 약속했고, 누이동생에게는 "시집갈 때 내가 맡은 LCD를 선물로 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누구보다 건강한 청년이었다. 여름이면 서핑보드, 겨울이면 스노보드를 즐기던 사람이었다. 건강에 좋지 않다며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았고, 술도 회식자리에서 한두 잔이 전부이던 사람이었다.

연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삼성맨'이 되는 게 꿈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컴퓨터 관련 학과에 진학했고 집에 학비 부담을 주기 싫다며 자장면 배달을 해서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2004년, 삼성전자 LCD 탕정공장에 설비 엔지니어로 입사하면서 꿈에 그리던 삼성맨이 되었다. 열심히 일했다. 잔업을 가장 많이 한다며 자랑스러워했다. 방에는 회사에서 받은 상장을 걸어 두었고 동기 중에 진급도 가장 빨랐다. 어렵다는 사원용 아파트 분양까지 받았다. 그는 동생인 연미정씨에게도 삼성이 '꿈의 직장'이라며 입사를 권유했다.

그런데 입사 후 연제욱씨는 아픈 곳이 많아졌다. 호흡기질환에, 피부질환, 코피도 종종 흘렸다. 그리고 입사 3년 8개월만인 2008년 2월 종격동암이라는 희귀암 진단을 받았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7월에 종양제거 수술을 받았고 인터넷 직거래를 하다가 우연히 여자친구도 만났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가발을 쓰고 회사에 다시 출근했다. 연미정씨는 오빠인 연씨가 아프면서도 "'회사를 쉬면 진급이 늦어질 텐데'라며 걱정이 많았다"고 전했다.

2009년 2월, 암은 재발하고 말았다. 그리고 7월에 연제욱씨는 세상을 떠났다. 2010년 1월, 회사를 통해 산업재해 신청을 했지만 3월에 불승인을 통보받았다. 이해할 수 없어 '반올림'을 통해 재심사를 청구하려 했더니 삼성쪽 사람들이 찾아왔다. 연씨는 눈물을 흘리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울고 있는 부모님 앞에서 돈 이야기만 했다. 2억이 안 되면 3억까지는 어떻게 안 되겠냐고, 사람 목숨을 가지고 흥정을 했다."

지금 연미정씨와 어머니 최술연씨(53)는 수면제를 먹어야만 잠이 들 수 있다. 우울증과 불면증 때문이다. 고향에서 운전 일을 하던 아버지는 연제욱씨가 투병할 때부터 일손을 놓고 간병을 하다가, 술과 담배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치료비로 빚도 늘었다. 연미정씨도 다니던 삼성 계열사인 에스원에서 퇴사했다. 자신의 가족이 목숨을 잃었는데, 또 다른 가족의 희생을 막을 수 없다는 '죄책감'때문이었다.


어머니 최술연씨는 "아무런 걱정이 없는 집이었다. 자랑도 많이 했다. 그런데 (지금은) 자랑한 게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하는 동안에도 최씨의 눈에선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이내 그는 "내가 왜 낳아서 이렇게 고생만 시키고 보내는지, 죄책감이 든다"며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초일류 기업이 어디 있나. 초하류 기업이 될 판인데…"라며 "(가정이) 완전 파탄 났다"고 말했다. 손수건은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한없이 눈물을 흘려 붉은 눈을 하고서도 두 사람 모두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동생 연씨는 "힘들다. 매일 오빠를 생각하면서 울지만, 우리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 어머니 최씨도 "지금까지 억울하고 분한 것을 생각하면 끝까지 싸워서 승리하고 싶다"고 말했다.

동생 연씨는 추모제 발언에서 "오빠의 고귀한 죽음이 헛되지 않게 꼭 진실을 밝히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녀가 손수 만든, 연제욱씨의 추모 동영상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왔다. "죽은 자에 대한 추모, 산 자에 대한 투쟁". 영상이 흘러나오는 내내, 촛불을 들고 광장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그저 영상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미나 기자는 오마이뉴스 12기 인턴기자입니다.



태그:#황민웅, #연제욱, #반올림, #삼성,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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