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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은 마라톤 애호가다. 전남의 한 군에서 마라톤동호회 회장을 맡고 있다. 매주 수요일이면 읍내 경기장에서 동호인들과 훈련을 한다. 마라톤대회가 있는 날이면 거의 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몇 해 전에는 100㎞ 울트라마라톤도 다녀왔다. 이 정도면 '마라톤광'이라고 표현해도 될 듯싶다. 이런 마라톤광이 운동과 친하지 않은 마누라를 집에서 그냥 쉬도록 놔뒀겠는가?

마라톤광 남편을 둔 나, 고달프다

<말아톤> 초원이 다리는  백만불짜리지만 당신 마누라는 아니거든. 마라톤광 남편 때문에 괴롭습니다.
 <말아톤> 초원이 다리는 백만불짜리지만 당신 마누라는 아니거든. 마라톤광 남편 때문에 괴롭습니다.
나를 마라토너로 만들기 위한 마라톤광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그 열정에 맞추기 위한 나의 도전과정도 결코 쉽지 않았다. 내 도전은 약 7년 전 무주마라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둘째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10㎞를 달린 적이 있다. 모유와 분유의 맛을 정확히 아는 4개월 된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어머니께 맡긴 채 말이다. 비상사태를 대비한 분유 한 병과 함께. 나의 의지는 결코 아니었다. 순전히 마라톤광의 강압에 못 이겨서였다.

8월 한여름의 햇볕은 뜨겁고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얼마쯤 가다가 걸어 버렸다. 마라톤주자 한 분이 그러신다. "아, 여자 1등이세요?" 이게 뭥미? 21.0975㎞ 하프보다 5분 늦게 출발했지만, 뛰지 못하고 걷다보니 어느새 하프에 묻혀 버린 것이다.

마침 내리막길이라 힘을 내어 달리고 있는데, 하프 1등으로 안 것이다. 아니라 할 수도 없고 맞다 할 수도 없고 참…. 나중에 그 분이 하프 1등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느낄 황당함을 뒤로 한 채 보폭을 최대한 넓혀 달렸다. 뒤에서 그런다.

"1등이라 그런지 잘 달리네."

마라톤 거리에 따라 접수번호가 구분되어 쉽게 알 수 있으련만, 하프인지 10㎞인지 구분을 못하는 그 분은 분명 마라톤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된 초보였나 보다. '그래, 이 모든 게 다 마라톤광 때문이야, 누가 달린다고 했냐고, 내가 다시는 달리기 하나 봐라'는 생각을 하면서 달린 기록은 1시간 30분. 마라톤광의 하프 1시간 32분과 별 차이가 없었다.

달리기와 친하게 지내지 않던 나는 '쌩' 땀을 흘려 생긴 두통과 움직이느라 고생한 근육통으로 며칠을 고생하며 끙끙 앓았다. 마라톤에 처음 입문하는 이에게 이러한 고통은 '달리기는 힘들다'라는 고정관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안 뛸 수는 없고, 뛰자니 괴롭고

그래도 명색이 마라톤 동호회 회장의 마누라니, "뛰라"는 그의 말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마라톤광 체면에 어느 정도 호응해 주고자 10㎞ 말고 5㎞를 달리면 어떻겠느냐고 절충안을 제시해 봤다. 마라톤광은 양보하지 않았다. 아직 아이들이 어리다는 핑계로 버티기 작전까지 들어가 보았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멈출 줄 몰랐다.

3년 전 도민체육대회. 친선을 목적으로 한 대회였다. 번호표만 달고 운동장만 돌아서 나가라는 마라톤광의 달콤한 유혹에 그러자고 했다. 대회 당일. 구령대에는 대회 진행자가 달리는 사람의 번호를 일일이 불러가며 즐거운 분위기를 유도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마라톤대회가 열리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각종 부스들. 달리지 않고 저 부스들을 순회하면 얼마나 좋을까나.
 마라톤대회가 열리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각종 부스들. 달리지 않고 저 부스들을 순회하면 얼마나 좋을까나.
ⓒ 박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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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상 달리다 보니, 도저히 운동장을 빠져나갈 자신이 없었다. '참가번호 00번. 꼴찌. 빨리 달리세요'라는 말을 들을까봐 운동장을 돌지 않고 구령대 아래 화장실로 들어가 번호표를 얼른 떼어 버렸다. 최소한 운동장 한 바퀴는 돌아가지 그랬느냐고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2년 전 도민체육대회. 마라톤광의 말처럼 있는 힘껏 달려 운동장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 그 기쁨도 잠시. 30여 분 동안 어떻게 달려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때 나의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는 해결책이 저만치 보였다. 오른쪽에는 자그마한 마을이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직진할 때, 나는 조용히 우회전해서 옆길로 새버렸다.

때는 10월 말 수확 철이라 감나무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눈이 즐거웠으니 입도 즐거우라고 감을 두 개나 따먹었다. 끈질긴 마라톤광을 위해 감을 따서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운동장으로 들어가서 감 하나를 내밀자 마라톤광 웃고 만다.

뛰었노라, 완주했노라, 계속 도전하노라

그 이후로도 마라톤광의 끈질긴 구애는 계속되었다. 마라톤광은 간간이 대행접수를 해댔다. 접수비만 얼마나 날렸는지 모른다. 달리기만큼 좋은 운동이 없다고 성화였다. 어디가 아프다라고 말할라치면 늘 대화의 끝은 달리기였다. 5㎞라도 달리라고 했다. 이런 마라톤광에게 나의 인내심도 결국은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올해 4월 함평마라톤 대회를 다녀왔다. 비록 달리지는 못하고 중간에 걷기도 했지만 5km의 첫 공식적인 데뷔였다. 그러다 5㎞ 완주라는 사고를 친 것은 올해 6월 영광마라톤대회였다.

가는 비가 계속 내려 달리는 데는 더없이 좋았다. 4㎞를 통과한 지점부터 마라톤광은 옆에서 같이 달려주었다. 드디어 결승라인에 도착. 마라톤광의 끈질긴 강압(?)과 관심이 나의 도전을 성공하게 했다. 물론 아침, 저녁으로 운동한 나의 노력도 있었지만.

완주했으니 끝이냐고? 천만에. 마라톤광은 호시탐탐 또 대행접수를 해댈 것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못 이기는 척, 접수비가 아깝다는 핑계로 한번 먼저 나서 볼까?


태그:#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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