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38. 방어형 거짓말

 

카메라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내부를 비추었다. 입시학원의 내부였고 조용한 적막감 속에서 모두들 열심히 필기를 하는 모습이었다. 실직남은 제일 뒷자리에 앉아서 힘겨운 자기자신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30대 중후반으로 다가서고 있는 그에게 이미 많이 변해버린 입시제도는 지옥과 같았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수업 내용은  그를 유학생이나 다름없는 처지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실직녀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중간 쯤에 앉아서 재수없다는 표정으로 안경잡이 여강사를 노려보며 팔짱을 끼고 앉았다. 아이들 틈에 끼여 앉은 40대 아줌마는 쩔쩔 매면서도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 눈에 보였다.

 

20대 중반의 놈팽이들은 이날 따라 유달리 필기에 공을 들이는 듯이 보였다. 어느 누가 책상 위에 펜을 세게 내려놓는지 내기라도 하듯이 색색가지 펜을 열심히 골라가며 필기를 하고는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내려놓기 바빴고, 어느 순간에 그건 기싸움으로 번진듯이 수업의 집중상태가 아닌 펜 내려놓기 경쟁에 돌입하고 말았다.

 

"야, 무조건 최대한 펜 세게 내려놓고 열심히 휘갈겨 써. 수업 내용은 듣지도 말고 우리가 최고라는 걸 보여줘." 아가씨에게 다가와서 집적대던 놈이 옆자리의 패거리들에게 속닥거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제 강의실 안의 모든 인간들은 펜을 세게 내려놓기 경쟁자가 되어버렸다. 수업이라는 본질을 저 멀리 떠나 보내고 오직 자신의 자존심을 포장하기 위해서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뜻도 모를 '상대 기 꺾기 싸움'에 어리버리한 다른 나이든 수험생들 까지 자다가 깨서는 어리둥절하게 휘말린 듯했다.

 

그러자 안경잽이 여강사는 신나서 더욱 열심히 교재 내용을 읊어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는 순간에 카메라는 아가씨의 뒷모습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볍게 등을 떨며 힘겨운 듯이 주먹을 불끈 쥐며 겨우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멍하니 자신을 비운 채 교실의 몰골을 지켜보며 폐허 상태에 이르렀던 실직남은 이제 아가씨의 모습에 일종의 동질감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아가씨가 부르르 떨며 몸을 금방이라도 일으켜 세울듯이 괴로워하자 실직남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몇 발자국 앞으로 다가오기 까지 했다. 그 눈에는 자신과 동일한 한 나약한 인간이 거울속의 자신인 듯이 보인 것 같았다.

 

"우리 사회도 저렇게 돌아가잖아요!"

화면을 보던 중에 안내원이 입을 삐죽이 내밀며 말했다.

 

"자신이 모르는 것도 안다고 거짓말 하고, 남에게 약해 보이기 싫어서 비싼 옷에 외제 차에... 진정 강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마음을 잘 들여다 봐야지, 저 따위 겉치레가 왜 필요해.안그래?"

하며 그녀는 옆에 있던 멜레나의 무릎을 탁 내려쳤다.

 

"그래, 당신은 어떤 겉치레를 봤길래?"

멜레나는 안내원이 짚은 무릎을 손으로 탈탈 털어가며 아니꼽다는 말투로 물었다. 그러자 옆에서 조제가 한마디 거들었다.

 

"사람이 뭐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동물의 한 종속일 뿐이잖아요. 개나 고양이, 소나 다름없는 포유류! 다만 그네들 보단 조금 더 축복을 받았기 땜에 문화도 만들고 역사도 만드는 거죠. 그리고 그런 것들 때문에 전쟁도 일으키고, 경제권도 쥐려고 하는 거고."

 

말문이 터진 듯이 조제는 일사천리로 쉬지 않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동물들의 싸움 원인엔 먹을 것과 암컷을 차지 하기 위한 두 가지 원인 밖에 없지만, 인간은 갖가지 걸로 싸움을 만들죠. 시기, 질투, 음모, 모함... 저들이 왜 저 여자애를 미워하는 거죠? 이유가 하나 밖에 없잖아요. 오로지 자신들의 오해와 그로 인한 열등감이잖아요. 게다가 그 열등감이 자신을 더욱 옭죄고 있단 걸 모르고, 스스로 진흙탕을 만들고 그 안에서 허우적 대는 저 꼴을 우리도 일상에서 반복하고 살잖아요."

 

할머니는 지그시 조제를 바라보더니 눈길을 옆으로 옮겨서 한마디 했다.

" 그런데 '빨간 하이힐' 씨, 저 상황이 얼마나 계속 된 거죠?"

그러자 '빨간 하이힐'은 옆으로 터진 스커트 사이로 뻗어나온 다리를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그 패거리들의 독성은 그 학원 전체를 오염시키고 말았죠. 학원 안에서 모든 움직임이 그 놈들에 의해 좌우되게 된 거예요. 온갖 거짓말로 그 애를 궁지에 몰아넣고, 그게 진실인 듯이 어른들 앞에서 눈물 까지 글썽여가며 매도하는 거죠.

 

거짓으로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난동을 벌이고는 그 애한테 뒤집어 씌우고, 학원 안의 모든 강사들에게 '그 아이가 말하길 선생님 강의가 형편없대요,들어봐야 대학 떨어진대요'하고 미친듯이 거짓말을 해대고 심지어는 수위 아저씨 한테까지 '저 애는 바보인데, 왜 우리가 바보랑 공부를 해야하냐? 학원 이미지 떨어진다. 내일부턴 못들어오게 하라' 하면서 병균을 퍼뜨리고 다녀요.

 

그 애는 그래도 묵묵히 자신의 할 일만 하고, 모두들 그 애가 그럴 애가 아니란 걸 알지만 그 놈들이 어른을 이리저리 으름장 놓아가며 볶는 통에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하죠. '저 애만 없으면 좀 편할텐데 어쩌다가 이리 시끄러워졌나' 싶어서 미련한 그 여자애가 자꾸만 미워지기 시작하죠.

 

게다가 그 애는 어른의 말을 고분하게 듣는 애인데 이젠 그 어른들 조차도 애를 놀려먹는 재미에 광적으로 빠져버린 거죠. 할일도 없고 놈팽이로 근근히 학원 청소나 해가며 사는 청소부가 어쩌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그 애가 혼자 거기에 있다면, 미친 듯이 사방으로 벽을 두드리며 위협을 하죠. 벌레보다 못하게 살면서 그 학원에서 최하층 일을 담당하고 있는 자신도 누군가를 위협하고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는 쾌감에 들떠서요."

 

잠시 후 화면 위로는 성우의 내레이션으로 일기장이 낭독되어졌다.

 

1999년 4월 15일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일까?

오늘은 그 답을 찾아보고자 마음먹고 집을 나섰다. 몇 달째 그 어떤 대화도 나눌 사람이 없어서 나는 내면의 자아와 대화를 나눈다. 이어폰을 꽂은 채로 해안 언덕을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음악의 선율에 몸을 맡기며 떠오르는 이미지를 따라가 보았다.

 

 

 

<계속>


태그:#판타지 소설, #장르문학, #중간 문학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