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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은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난다. 몸이 휘청거리고 하마터면 의자에서 떨어질 뻔도 했다. 문 위에 걸린 시계가 째깍거린다. 한 시간, 두 시간, 란의 임금에서 공제될 시간들. 월말이 되면 얼마나 남아 있게 될까? 란이 날마다 받는 57만동(베트남 화폐단위)이란 돈은 생계비로도 빠듯하다. 그리고 란과 이곳의 다른 사람들 대부분처럼 부모와 형제자매에게 돈을 보태기까지 하는 경우라면, 단 한 동의 손실도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 <메이드 인 베트남> 중에서

 

<메이드 인 베트남>(검둥소 펴냄)의 배경은 베트남의 어느 신발 공장이다. 란은 신발 밑창을 붙이는 부서에서 일한다. 소설은 병든 아버지와 고엽제의 후유증으로 고통 받는 큰아버지와 그의 사촌들 때문에 의사의 꿈을 접은 란이 작업 중 깜박 졸고, 작업감독에게 걸려 벌을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발각되자마자 작업감독은 성냥개비를 반으로 잘라 자꾸만 무겁게 내려앉는 란의 눈꺼풀 사이에 끼운 후 의자 위에 두 시간 넘게 서 있게 한다. 졸면 란처럼 벌을 받는다는 것을 다른 노동자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다. 심지어 작업 반장 찌중은 어느날 1미터가 넘는 뱀을 가져와 졸다 걸린 소녀의 목에 두르게 하는 것으로 경고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노동자들이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어쩌지 못하고 잔인한 작업반장 찌중에게 걸려 란처럼 벌을 받곤 한다. 하루 12시간이 넘는 노동을 일요일도 없이 몇 주씩 강행하기 예사라 늘 잠에 쫓기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작업장에서 침대로, 침대에서 바로 작업장으로 가야 할 때도 많은 이들이다.

 

작업장에 있는 노동자 대부분은 소녀들과 젊은 여자들이다. 공식적으로 모두 열네 살 이상이지만, 고용 때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아도 되므로-대부분은 갖고 있지도 않다-더 어린 이들도 많이 끼어 있다. 요즘 들어선 어린 쪽이 선호되는데, 임금이 더 싸고 무슨 일이든 참고 견디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숨길 것이 있고 돈이 절박하게 필요한 사람들이다.

 

날마다 열두 시간씩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받으며 2주 동안 일하고 난 뒤, 마침내 쉬는 일요일일 온다. 법률에 따르면 원래 엿새를 근무하고 나면 하루를 쉴 권리가 있지만, 그런 것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그래서 주문이 하나 완료되고 새로운 주문은 아직 보이지 않을 때에만 쉬는 날이 생긴다. - <메이드 인 베트남>

 

<메이드 인 베트남>은 아동 노동착취를 고발한 소설이다. 주인공 '란'은 14살 소녀다. 규정상 14살 이하 어린이는 채용해선 안 된다. 하지만 이 공장에는 란보다 어린 아이들도 많다. 이들이 일요일도 없이 하루 12시간 넘게 일해 받는 한 달 임금은 57만동(1000동은 우리 돈 80~90원 가량), 1년 넘게 일한 란의 경우이다. 어린만큼 적게 지불하기 때문이다.

 

노동 조건은 두말할 것도 없다. 신발창을 붙이자면 화공약품을 쓸 수밖에 없건만 공장에는 환풍기 하나 가동되지 않는 찜통 속이다. 환풍기들은 사무실 한쪽에 치워져 있다가 감사 같은 것이 있을 때만 잠시 걸렸다가 감사를 나온 사람들이 작업장을 나가는 순간 철거되곤 한다. 잦은 화장실 출입도 해고 대상이다. 그러나 아무도 불만을 말할 수 없다. 란처럼 가족들의 생계가 이들이 이처럼 학대받으며 받는 적은 돈에 걸렸기 때문이다.

 

주문 일정 때문에 2주 동안 매일 12시간을 일한 후 기적적으로 주어진 쉬는 일요일에 3시간을 겨우 자고 난 란은 잠든 소녀들을 뒤로하고 공장을 나선다. 걸어서 3시간 거리에 있는 집에 가기 위해서다. 오늘 가지 않으면 앞으로 몇 달 후에 가게 될지,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집이다. 공장에는 1년 넘게 집에 가지 못한 사람들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오두막 앞에는 큰아버지의 세 아이들이 앉아 있다. 남자 아이 둘과 여자 아이 하나로, 열여섯, 열다섯, 열세 살이다. 란 자매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들의 얼굴이 온통 환해진다. 그들이 란 쪽으로 얼굴을 돌린다. 란은 그들이 손을 더듬어 찾을 수 있도록 몸을 숙여준다. 타오도 땅바닥에 쪼그려 앉는다. 두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의 민첩한 손이 란과 타오의 얼굴을 훑는다. 그들은 웃으며 기뻐한다. 란과 타오를 보지는 못한다. 남들은 눈이 있는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두개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절망한 부모들이 호찌민 시 병원의 의사들에게 문의해 본 결과 유전자 결함으로 밝혀졌다. - <메이드 인 베트남>중에서

 

<메이드 인 베트남>의 배경은 란과 같은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꿈이 꺾인 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하는 노동 착취 현장이지만, 베트남의 역사적 배경이 이처럼 맞물려 있다.

 

3시간 걸어 도착한 집이건만, 가족은 유일한 생계수단인 물소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다. 미국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고엽제 피해 보상)가 기각됨으로써 병원비와 변호사비 등을 부담해야 하기에. 란은 언니를 따라 공장에 가지 않겠다고 울고불고 하는 타오를 데리고 베트남전 때 미국이 살포한 고엽제 때문에 두 눈 없이 태어난 사촌들에게 간다.

 

큰아버지 뚜는 그 시절에 강에서 물을 마셨고 독이 뿌려진 과일을 먹었다. 그 시절엔 하늘에서 떨어지는 노란 비가 어떤 짓을 저지르는지 아무도 몰랐다. 큰아버지 자신은 뚜렷한 병세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한참 지나서 아이들이 장애를 안은 채 태어났다. 눈 없이, 아이들 셋 모두 기형으로. 처음에 부모는 나쁜 귀신들 짓이라 믿었지만, 그러다가 처지가 비슷한 다른 가족들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독을 접했고 곳곳에서 기형인 아이들이 태어났다. 팔이 셋 달린 아이들, 얼굴에서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 구멍이 난 아이들, 다리가 없어 평생 뱀처럼 땅 위를 기어 다녀야 하는 아이들.

 

"폭격으로 공산주의자들을 석기 시대로 돌려놓겠다!" 미국 대통령은 그 시절에 이렇게 말했다. 미군들이 그렇게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투하된 독은 전쟁터에서 그것과 접촉한 사람들에게 암을 발병시켰고, 그들의 아이들과 손자들에게 심각한 기형을 일으켰다. 쌀과 채소가 자라는 땅이 여전히 오염되어 있는 것이다. - <메이드 인 베트남> 중에서

 

여기까지는 이 소설의 4분의 1. 소설은 이처럼 베트남을 황폐하게 만든 미국과, 당시 베트남 정신으로 똘똘 뭉쳐 미국과 싸운 사람들이 란과 같은 어린 아이들을 착취하여 자신들의 배만 불리는 것을 소설 전반에 맞물려 놓음으로써 독자들이 훨씬 맛깔스럽고 진지하게 읽을 수 있게 한다.

 

와중에 사장(공장)은 우수업체에 주어지는 인증마크를 받게 되고 란과 민은 이를 저지할 궁리를 한다. 소설의 나머지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박 레와 란의 만남, 란과 민이 중심이 되어 공장과 싸우는 과정, 투쟁을 함께 결심했지만 해고될까 봐 막상 발을 빼고 마는 노동자들의 절박한 상황 등이 자세히 그려진다.

 

"넌 신발 안을 들여다봐야 해. 신발창의 층들 사이나 안쪽을 말이야. 아주 깊숙이, 가죽 속에 파묻혀, 우리의 피곤한 눈과, 우리의 두려움과, 우리의 분노가 들어 있어. 이 신발을 신는 사람은 누구나 우리의 고난을 밟으며 거니는 거야." - <메이드 인 베트남>중에서

 

뜨끔하게 읽은 부분이다. '메이드 인 베트남'은 '메이드 인 차이나'에 이어 우리에게 낯익다. 약간의 돈만 지불하면 언제든지 손쉽게 살 수 있는 수많은 물건 중 일부일 뿐이요, 적당하게 쓰다가 버리면 그만인 그런 물건들이다. 하지만 이처럼 메이드 인 베트남 속에는 어른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란과 같은 수많은 아동들의 꿈과 고난이 스며있다.

 

작가 '카롤린 필립스'는

작가 '카롤린 필립스'는 독일에서 태어나 영문학과 역사학을 전공,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작품을 주로 쓰고 있다. 해외 입양아, 노숙자, 장애인, 에이즈 환자, 문맹자, 외국인 노동자, 아동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커피우유와 소보루빵>으로 유네스코 '평화와 관용의 상'을 받았다. 이밖에 <황하에 떨어진 꽃잎>과 <눈물나무> 등이 국내 번역됐다. 

 

우리가 신는 운동화, 우리가 사용하는 축구공, 우리가 먹고 마시는 커피와 초콜릿 등 많은 것들이 이처럼 부당하게 생산된 것일 수도 있으며, 따라서 이런 문제를 외면한다면 우리도 아동 노동 착취를 거드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쉽게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가 소비하는 물건들이 어떻게 생산되는 것인지 관심을 갖고서 그런 물건들이 올바른 방식으로 생산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태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책 속에서 독일 소녀 빕케가 자신이 별 생각 없이 신던 브랜드 운동화가 어떻게 생산된 것인지 깨닫고서 공장의 상황을 변화시키려 시도했듯이 말입니다. 아무쪼록 늘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 타인에 조금 더 관심을 갖기를 바라는 작가의 바람이 이 책을 통해서도 조금이나마 이루어지길 기원합니다.

-<메이드 인 베트남> 옮긴이의 말에서

덧붙이자면, <메이드 인 베트남>은 청소년을 주요 독자로 출간됐다. 소설은 주제인 '아동 노동 착취의 실태' 외에 청소년들에게 많은 것들을 알려주리라. 우리도 참전했던 베트남전의 진실과 자신이 처한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 등을 말이다.

 

2010년은 전태일 열사 추모 40주년의 해이다. 소설 속 이야기는 40여 년 전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말 40년 전의 이야기에 불과할까?

 

몇 달 동안 일한 것을 받지 못하고 쫒겨났다는 어떤 가출 소녀, 주인이 술주정을 시도 때도 없이 해도 등록금을 벌려면 어쩔 수 없이 참아야만 한다는 어떤 대학생의 하소연이 소설을 읽는 동안 자꾸 떠올랐다면?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언젠가는 저마다 사정에 맞는 노동을 하면서 살아갈, 혹은 고용주가 될 우리 아이들과 책을 통해 노동을 둘러싼 것들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징검다리 같은 책이 될 수 있으리라.

덧붙이는 글 | <메이드 인 베트남>|카롤린 필립스 (지은이)| 정지현(옮긴이)| 검둥소|2010-06-12|정가 : 9,500원


메이드 인 베트남

카롤린 필립스 지음, 정지현 옮김, 검둥소(2010)


태그:#베트남, #아동노동착취, #1318, #전태일 추모 40, #고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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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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