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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스님과의 인연

 일지암(왼쪽 초가)과 자우홍련사(오른쪽 기와)
 일지암(왼쪽 초가)과 자우홍련사(오른쪽 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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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박물관을 보고 나서 나는 종무소로 간다. 오늘 예약한 대흥사 템플스테이에 등록하기 위해서다. 일반적으로 템플스테이는 오후 2시에 등록을 하고 오후 3시에 입재를 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서산대제 관계로 오후 4시에 등록을 받는단다. 시간이 있어 아내와 나는 일지암까지 갔다 오기로 했다.

표충사에서 일지암까지는 800m쯤 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처음 길은 만일재 방향의 골짜기로 이어진다. 천천히 한발 한발 걷는데 RV차가 한 대 올라간다. 보니 스님이 타고 있다. 아니, 도대체 어디를 가는데 차를 타고 가는 거지? 약 400m쯤 올라갔을까, 북미륵암 가는 길과 일지암 가는 길이 갈라진다. 일지암으로 가려면 오른쪽 길로 들어서야 한다.

다시 400m쯤 좀 더 가파른 길을 올라가니 앞이 확 트인 공간에 이른다. 그리고 이곳에서부터는 계단이 있어 일지암으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계단은 돌로 만들었으며 계단 옆과 위로 기와집이 보인다. 계단을 올라가니 요사채와 대웅전이 나타난다. 우리가 이곳에 올라온 목적이 일지암이기 때문에 아내와 나는 먼저 일지암을 찾는다. 일지암은 암자 전체의 이름이기도 하고, 이 암자에 있는 초막 한 채의 이름이기도 하다.

 요사채인 호림당 안의 다실
 요사채인 호림당 안의 다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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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막 형태를 취한 일지암은 절의 왼쪽 끝에 있다. 그런데 스님 같은 분이 마루에 나와 윗옷을 벗는다. 그리고는 몸을 득득 긁는다. 아니 요즘에는 절에 빈대나 이가 없는 것으로 아는데. 그 모습을 보기가 조금 민망하여 나는 잠시 대웅전으로 가 참배를 한다. 대웅전을 참배하고 나오는데 매꼬자를 쓴 스님이 한 분 들어온다. 가볍게 인사를 했더니 요사채로 들어가서 차나 한 잔 마시자고 한다.

일지암에 와서 차를 얻어 마시게 되다니. 이건 정말 대단한 행운이다. 요사채 방문 위에는 호림당(護林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수풀을 보호하는 집이라. 글자 그대로 해석하기에는 뭔가 아쉽고, 너무 심오하게 생각하면 선문답이 될 수 있으니 그 정도에서 생각을 멈추고 방으로 들어간다. 방 한쪽으로 다기가 갖춰져 있고, 벽에는 일지암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다. 그림 옆에는 '밝은 달을 촛불과 벗을 삼다'라는 초의 스님의 글귀가 적혀 있다. 원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밝은 달을 촛불과 벗으로 삼고                         明月爲燭爲友
흰 구름으로 자리 깔고 병풍을 만든다.              白雲鋪度因作屛
댓잎 소리 솔잎 소리 한 가지로 소슬하고           竹籟松濤俱蕭凉
뼈에 사무치는 맑고 찬 기운에 마음도 깨어난다. 淸寒瑩骨心肝惺
오로지 흰 구름과 밝은 달을 두 손님으로 맞으니 唯許白雲明月爲二客
도인의 자리가 이보다 더 좋을 손가.                 道人座上此爲勝

 차맛을 좌우하는 유천수(乳泉水)
 차맛을 좌우하는 유천수(乳泉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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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면서 스님과의 대화가 시작된다. 한 잔 또 한 잔, 차 맛에 취한다. 물맛이 좋아서 그런가, 아니면 차가 좋아서 그런가, 그도 아니면 스님의 솜씨가 좋아서 그런가? 차 맛이 참 좋다. 스님에게 오늘 대흥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하기로 했다고 하니, 스님 자신이 템플스테이를 담당한다고 말한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루어져 나는 명함을 한 장 내민다. 그러자 스님도 명함을 한 장 주는데, 보니 대흥사 포교국장 무인(無因) 스님이다. 그동안 일지암 암주를 여연(如然) 스님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제는 무인스님이 암주가 된 것이다. 무인스님은 눈이 크고 볼살이 통통해서인지 아주 젊어 보인다. 목소리도 좋아 포교국장으로는 제격일 것 같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스님이 송광사 현봉스님의 상좌란다. 현자(玄字) 들어가는 스님들은 구산스님의 제자로 현재 송광 문중을 대표하는 스님들이다. 그렇다면 무인 스님은 구산스님의 손상좌에 해당하는 셈이다. 개인적으로 나도 과거 송광사 서울분원인 법련사의 '보조사상연구원'에 참여해 몇 년간 불교공부를 한 적이 있어 무인스님과 더 친근한 느낌이 든다. 당시 보조사상연구원 이사장은 처음에 법정스님이었다가, 나중에 현호스님으로 바뀌었다.

찻잎 따기 체험

 일지암의 차밭
 일지암의 차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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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담을 나누다 스님이 찻잎을 한 번 따 보겠느냐고 제안을 한다. 그것도 좋은 체험이 될 것 같아 아내와 나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밖으로 나와 보니 절 마당 밖으로 차밭이 조성되어 있다. 대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밭으로 가니 이 절에 기식하고 있는 보살과 처사님이 벌써 찻잎을 따고 있다. 아까 일지암에서 윗옷을 벗었던 분도 일지암에서 요양하고 있는 처사분이었다.

이 처사분은 말기암 환자로 병원에서 포기를 했는데, 이곳 일지암에 와 요양하면서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지금은 부인과 아들까지 이곳에 와 가족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분들에게 차 따는 법을 배웠다. 찻잎의 부드러운 끝부분을 손톱으로 똑 따면 된단다. 이 나무 저 나무에서 골고루 따면 된단다. 그런 정도의 설명을 듣고 찻잎을 따기 시작한다.

 찻잎을 고르는 무인스님
 찻잎을 고르는 무인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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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차를 따다 보니 양이 영 늘지를 않는다. 부드럽고 어린잎만 2~3㎝ 길이로 따기 때문이다. 가끔은 쌉쌀한 찻잎의 맛도 보면서, 함께 하는 사람과 대화도 나누면서 한 시간 정도 소위 울력을 한다. 밥값은 해야지 하는 심정으로. 그래도 평평한 바구니의 바닥은 덮을 정도로 찻잎을 땄다. 그것을 가지고 요사채로 가니, 스님이 바로 덖을 준비를 한다.

사실 차의 맛은 덖는데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어떤 곳에서는 일곱 번을 덖네 아홉 번을 덖네 하는데, 무인스님은 한 번만 덖는다고 한다. 그래도 제 맛을 낼 수 있느냐고 묻자, 바로 그게 기술이라고 대답한다. 그래, 기술이란 남과 다른 그 무엇을 말하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무인스님이 나름대로 덖는 비법을 개발한 게 틀림없다.

대흥사 저녁 공양

 늦은 오후의 대흥사
 늦은 오후의 대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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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찻잎을 덖는 모습을 보고 싶지만 대흥사 템플스테이 저녁공양 시간이 5시라 그 전까지는 대흥사로 내려가야 한다. 아내와 나는 내일 무인스님을 다시 보는 인연이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하면서 산을 내려간다. 왜냐하면 내일 오전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에 두륜산 산행이 있기 때문이다. 두륜산 산행에서 가장 선호되는 코스는 일지암과 북미륵암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대흥사 종무소로 내려와 템플스테이 숙소를 확인하니 심검당이다. 심검당에 들러 방을 정리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그런데 종무소에서 전화가 온다. 오늘 저녁 공양을 끝내고 기다리면 6시 30분 정도에 무인스님이 차를 가지고 우리를 데리러 온다는 것이다. 템플스테이가 심검당에서 일지암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초의선사가 머물렀던 일지암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다니 이건 더 큰 행운이다.

 대흥사 저녁 반찬
 대흥사 저녁 반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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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 30분쯤 아내와 나는 벌써 익숙해진 북원 쪽으로 간다. 그곳 후원에 식당이 있기 때문이다. 오전에 서산대제 때문에 복잡하던 절이 이제는 한가한 편이다. 천천히 침계루, 대웅전, 무량수각 등을 살펴본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석등도 보이고, 대웅전 앞 돌계단의 사자도 보인다. 이들을 지나 식당으로 가니 성보박물관 작업을 마친 인부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식사는 점심 때와는 달리 자신이 반찬을 선택해 먹는 방식이다. 김치, 깍두기, 생채, 가지, 고사리 나물을 먹을 만큼 가져가 밥과 국과 함께 먹도록 되어 있다. 점심 때보다는 선택의 폭이 넓은 편이다. 절 음식 치고는 다양하고 맛도 좋아 보인다. 주방에는 공양주로 보이는 스님들이 봉사를 하고 있다.

일몰을 보고 밤늦게 까지 이어진 차 공양과 다담

 현월당 스님의 인연
 현월당 스님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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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공양을 마치고 밥값은 해야 할 것 같아 대웅보전에 잠깐 들러 예불을 드린다. 예불이라고 해야 흉내 내는 정도 밖에는 안 된다. 또 6시 반까지는 숙소에 가 무인스님을 기다려야 하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예불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이도 닦고 가지고 갈 물건도 다시 정리한다.

그래도 시간이 좀 남아 벽에 걸린 시도 보고 <서산대사 선양사업의 당위성>이라는 책도 본다. 대흥사 현월당 스님이 쓴 '인연'이라는 시가 참 좋다. '우리 서로 인연하여 살고, 거리를 두고 살고, 잊으며 살자'는 내용이다. 너무 가까운 인연도 안 되고 너무 먼 인연도 안 되고, 고독한 나그네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염원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잠시 후 스님이 차를 가지고 왔다. 우리를 태우더니 서둘러 산으로 오른다. 일지암까지는 찻길로 연결된다. 스님은 저녁나절 분위기에 매료되어 노래를 부른다. 자신이 대학교 다닐 때 보컬로 활동했다고 하면서. 들어보니 고음에 음역이 상당히 넓다. 그러면서 찬불가가 서양악기가 아닌 전통악기에 맞춰 작곡되고 불려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무인스님은 차만이 아니라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분인 것 같다. 그뿐 아니라 키르기스탄에서 전화가 올 정도로 국제적인 분이다.

 일지암 낙조
 일지암 낙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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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일지암에 도착하니 이미 해가 서쪽으로 떨어지고 있다. 서쪽은 진도와 다도해가 있는 서해바다로 이곳의 낙조가 정말 아름답다고 한다. 우리는 해가 떨어지는 마지막 장면을 조금 볼 수 있었다. 조금 일찍 몰라오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잠시 각자 방으로 가 짐을 정리하고 8시쯤 자우홍련사로 모인다.

자우홍련사는 초의선사가 거처하던 공간으로, 1979년 여수의 고가 목재를 사용하여 다시 지었다고 한다. 별빛 쏟아지는 밤, 일지암 식구들이 자우홍련사 툇마루에 모여 앉았다. 거기다 하룻밤 묵어가는 객인 우리 두 식구를 합하니 모두 일곱이다. 일곱 사람이 일지암을 마주보는 툇마루에 앉아 차공양을 나눈다. 물론 공양주는 무인스님이다.

 어둠이 깊어가는 일지암
 어둠이 깊어가는 일지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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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 또는 화두는 초의선사, 차 만드는 일, 일지암에서의 요양생활, 대흥사를 찾은 이유 등 다양하다. 이야기 중간 중간 툇마루 앞 연지에 사는 물고기들이 물탕을 튀긴다. 철썩이라고 할까 아니면 첨벙이라고 할까? 저것들도 우리 이야기에 끼어들고 싶어 그러는 모양이다. 시원한 저녁 공기와 함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일지암의 실루엣도 조금씩 변해 간다.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 속에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스님은 송광사 시절 이야기, 북미륵암 마애불 이야기, 차와 관련된 이야기, 사람들과의 인연 이야기를 풀어낸다. 우리도 각자가 걸어온 길, 절과의 인연, 차와 차문화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한다.

 어둠 속의 일지암
 어둠 속의 일지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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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1시가 넘어서야 내일 아침 일정을 논의하고 각자 방으로 돌아간다. 절의 템플스테이와는 완전 다른 일과표다. 일반적인 템플스테이는 오후 9시에 자고 오전 3시30분에 일어나야 하는데, 여기서는 11시가 넘어 자고 오전 6시쯤 일어나는 일정이다. 아침 공양도 7시30분으로 예정되어 있다. 가정에서의 생활패턴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좋다. 아내와 나는 자우홍련사의 한 방을 차지하고 산사의 고즈넉함 속으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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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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