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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라는 말이 다시 떠오른다. 남은 식량을 가지고 초여름 보리수확 때까지 견뎌야 했던 시절을 비유해 썼던 말이다. 햇보리가 나올 때까지의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이다. 묵은 곡식은 거의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농촌의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운 때를 가리켜 '보릿고개'라고 표현했다.

이때는 대개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끼니를 때우거나 걸식과 빚으로 연명했으며, 유랑민이 되어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와 8·15해방에 이르면서 1950년대까지만 해도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보릿고개' 때문에 농민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은 그 말이 일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해마다 이맘 때만 되면 대학가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보릿고개'가 존재한다. 아직도 '보릿고개'를 겪는 '시간강사'란 직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면 수입 없는 백수로 전락하고마는 전국 6만여 시간강사들은 변변치 않은 한 한기(4개월) 동안의 수입으로 방학(2~3개월)을 버텨야만 한다. 긴 방학 때는 아예 수입이 없기 때문에 '보릿고개'를 걱정하는 강사들이 대부분이다. 

교수사회의 음습한 뒷거래 풍토 상존... '유전교수 무전강사'

<교수신문>과 KBS <추적 60분>은 금품 요구와 논문 대필 문제 등 시간강사들이 겪고 있는 부당 요구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지난 6월 8일부터 15일까지 공동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교수신문>과 KBS <추적 60분>은 금품 요구와 논문 대필 문제 등 시간강사들이 겪고 있는 부당 요구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지난 6월 8일부터 15일까지 공동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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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이들에게 다음 학기 강의가 있다는 보장도 없다. 한 학기 강의가 끝났지만 다음 학기 강의가 있는지도 알 수 없고, 불경스러울까봐 먼저 학과 사무실에 물을 수도 없다. 조교에게 전화가 오지 않으면 해고된 것으로 알아야 한다. 대학교육의 절반을 담당하고 있는 이들은 전국 6만3000여 명의 시간강사들이다.

2010년 전국대학 평균 시간당 강사료는 3만6400원. 평균수업 시수인 4.2시간씩 한 달을 했을 경우 수입은 61만1520원이다. 시간강사의 평균연봉은 487만5000원으로 전임강사의 평균연봉 4394만9000원과 약 10배 차이가 난다. 강의실에서는 교수님이지만 밖에서는 일용직 노동자로 최 극빈층 대우를 받는 이들은 '나는 인간이 아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묵묵히 강단을 지킬 수 있는 건 그나마 한 가닥 희망 때문이다. 언젠가 교원자격을 부여 받아 마음 놓고 연구와 강의를 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꿈꾸며 살아가는 이들이기에 한 두 번의 보릿고개쯤은 다 겪었다. 그건 차라리 약과다. '보릿고개'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 바로 '유전교수 무전강사'다.

그 끔찍한 말이 사라지는가했더니 다시 유행하고 있다. 지난 5월 25일 조선대학교 서 아무개 강사의 자살사건 이후, 대학의 고질적인 병폐로 꼽혀온 교수임용시 금품요구와 논문대필 문제가 또 도마에 올랐다. <교수신문>과 KBS 2TV <추적60분>(6월 30일 방영)이 공동으로 실시한 '시간강사 처우 및 실태'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가 악몽을 되살렸다.

아직도 대학사회에 교수직 매매와 브로커가 활개를 치고 있으며, 각 대학별 시세까지 형성돼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특히 일부 시간강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응답을 내놓아 대학사회의 음습한 뒷거래 풍토가 상존하고 있음을 나타내 주었다.

시간강사 33명, "교수직 매매알선 브로커 제안 받아 본 경험 있다"

<교수신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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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과 KBS 2TV <추적 60분>은 금품 요구와 논문 대필 문제 등 시간강사들이 겪고 있는 부당 요구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지난 6월 8일부터 15일까지 공동 설문조사를 실시해 지난달 30일 발표했다.

석·박사 임용정보 웹사이트 <교수잡>(www.kyosujob.com) 이용자 가운데 시간강사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 조사에는 552명의 강사들이 응답했다.

이번 조사에서 "교수임용 지원시 금전적인 요구나 발전기금 기부를 요청받은 경험이 있습니까?"란 질문에 응답자의 84.6%(467명)은 "없다"고 응답했지만, 15.4%(85명)는 "있다"고 응답했다. 이는 <교수신문>이 지난 4월 교수임용에 지원한 경험이 있는 연구자를 대상으로 같은 질문을 했을 때 8.5%가 "돈을 요구받은 적이 있다"고 밝혔지만 이번 조사에선 거의 두 배 가까이 "돈 요구를 받은 적이 있다"고 응답해 약자의 처지에 있는 시간강사들에게 부당한 요구가 끊이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조사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은 '교수직 매매'를 알선하는 '브로커'의 존재가 드러났다는 점이다. 응답자 중 6.0%(33명)은 "'교수직 매매'를 알선하는 브로커의 제안을 받아 본 경험이 있다"고 밝혀 충격적이다. "브로커의 존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는 응답도 23.4%로 나타났다.

'교수직 매매'는 최근 서 아무개 강사의 자살 사건 이후 각 대학 비정규교수노조와 일부 강사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제기돼 온 문제다. 이번 설문조사에서도 그러한 유혹이 늘 도사리고 있음이 드러났다. 전체 응답자 중 "앞으로 전임 교수직에 대한 금전적인 요구를 받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란 질문에 49.8%는 "갈등할 것 같다"고 응답했다. 또 24.3%는 "상황에 따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견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응답자는 25.9%였다.

이에 대해 <교수신문>은 "교수가 되려는 박사들은 많고, 교수 자리는 한정돼 있기 때문에 기회가 온다면 돈을 내고 교수가 될 수도 있다는 고민을 드러낸 것"으로 분석했다. 그만큼 대학가에 '교수직 매매'가 횡행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2억원 이상 요구 받았다", 남성(7.1%)보다 여성(17.2%)이 훨씬 많아

KBS <추적 60분>은 <교수신문>과 공동으로 지난 6월 8일부터 15일까지 시간강사 실태문제에 대한 공동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KBS <추적 60분>은 <교수신문>과 공동으로 지난 6월 8일부터 15일까지 시간강사 실태문제에 대한 공동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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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들 시간강사들에게 돈을 요구한 금액은 얼마나 될까? 이번 설문조사 결과 '5000만 원~1억 원 미만'이 37.6%로 가장 많았고, '5000만원 미만'이 28.2%, '1억원~1억5000만원 미만'이 14.1%, '1억5000만원~2억원 미만' 9.4%, '2억원 이상'은 10.6%에 달했다. 참으로 가관이다. 이 가운데 2억 원 이상을 요구 받았다는 응답자 가운데는 남성(7.1%)보다 여성(17.2%)이 훨씬 많았다는 점이 시선을 끈다. 학문별로는 예체능 분야 강사가 28.6%로 가장 많았다.

논문대필도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강사 3명 중 1명(33.5%)이 "교수로부터 논문대필을 요구받은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논문대필을 요구받은 강사 중 74.1%는 "실제로 논문을 대신 작성했다"고 고백했고, 25.9%는 "대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했다.

대학사회의 고질병폐인 '종속관계'의 현실에 관한 응답에서도 시간강사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읽을 수 있다. 전체 응답자의 절반가량(46.2%)은 "교수로부터 논문 이외의 부당한 요구를 받아 본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들 중 49.8%는 "교수의 사적인 일 부탁이나 심부름"을 가장 많이 꼽았고, "교수의 대외 활동 지원 요구"(22.4%)나 "각종 금전적, 물리적 지원 요구"(15.3%) 순으로 밝혔다. 이유에 대해선 "교수들이 부당한 요구를 해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그렇지 않으면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답변이 주목을 끈다.

또한 "강사들이 교수의 요구가 부당한 줄 알면서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란 질문에 40.4%는 "향후 교수임용 등 진로 준비에 불이익을 받을까 우려스러워서"라고 응답했고, 29.0%는 "교수의 눈 밖에 나면 좋을 게 없기 때문에", 18.5%는 "당장 다음 학기 강의 배제가 두려워서"라고 응답했다.

"교과부대책, 대학 내 비정규직 문제 더욱 고착화 할 것"

이밖에 "시간강사를 하면서 '자살충동'을 느낄 정도로 심리적 불안이나 압박감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란 질문에 응답자의 39.9%는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로 심리적 불안이나 압박감을 느낀 적이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시간강사를 하면서 '경제적 문제'(27.2%)나 '교원이 아닌 신분문제'(24.1%) 보다는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함'(43.5%)이 가장 어려운 점이라고 응답했다. 이밖에 "교수로부터 받는 부당한 요구"(2.2%)와 "학교 재단이나 대학 측으로부터 받는 부당한 대우"(1.3%)를 그 다음으로 지적했다.

한편 교육과학기술부(이하 교과부)가 지난달 23일 시간강사 지원대책(안)을 발표했지만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시간강사의 법적인 교원 지위 회복문제는 전업시간강사 일부를 비정년 강의전담교수로 전환하면서 교원지위를 확보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지만 교과부의 강의전담교수 제도가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과 함께 자칫 혼란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과  대학강사교원지위회복과대학교육정상화투쟁본부 등은 이번 지원 대책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교과부가 발표한 강의전담교원제도는 결국 대학 내 비정규직 문제를 더욱 고착화 할 것"이라며 "강사들의 교원지위 회복만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태그:#교수신문, #시간강사, #교수매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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