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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개인이 새장 속에서 혈투들 벌이는 극단 백수광부의 연극 <안티고네>.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이 크레온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다.
▲ 안티고네 국가와 개인이 새장 속에서 혈투들 벌이는 극단 백수광부의 연극 <안티고네>.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이 크레온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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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라고 다 같은 연극은 아니다. 지난 7월 1일부터 18일까지 대학로 선돌극장에서 상연중인 극단 백수광부의 희랍연극 <안티고네>는 비록 100석 규모의 작은 극장에서 하고 있지만 웬만한 중극장 무대 공연보다 더 알찬 볼거리를 선사하고 있다.

새장을 닮기도 했고 마치 영화 속 격투기 경기장 같기도 한 정육면체 쇠철망 무대 속에서 펼쳐지는 외삼촌과 조카딸의 팽팽한 평행선 대결은 숨이 차듯 거친 고함 소리에 때론 폭력적이고 다시 잔잔해졌다가 어느 샌가 결국 파국으로까지 치달아간다.

국가와 개인의 대립을 주요 모티프로 한 이 연극은 무려 2500년 전쯤 에우리피데스, 아이스킬로스와 함께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3대 비극 작가로 일컬어지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 3부작 <오이디푸스 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 중 마지막 편이다.

▲ 연극 <안티고네> 극단 백수광부가 7월 1일부터 18일까지 선돌극장에서 상연중인 희랍 연극 <안티고네>는 국가와 개인이 법치와 인륜의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장면을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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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폴리스 국가중 하나인 테바이(테베)의 오이디푸스왕은 신탁으로 자기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동침한 후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스스로 두 눈을 찔러 실명한다. 그 후 두 딸인 안티고네, 이스메네와 함께 국외를 떠돌다 절명한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왕이 죽은 이후의 이야기다.

오이디푸스왕 이후 테바이는 그의 두 아들 에티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가 왕권을 두고 다투게 되고 두 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는 이들의 화해를 시도하지만  결국 둘 다 전장에서 죽는다. 결국 외삼촌 크레온이 왕이 되어 에티오클레스의 장례는 성대히 치르고 폴리네이케스는 반역자로 몰아 그 시체를 들판에 버려둔 채 들짐승과 날짐승의 먹이가 되도록 놓아둔다. 그리고 이를 거역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고 포고한다.

안티고네는 자신의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들판에 그대로 놓아둘 수 없다며 묻어주려 하다 발각되어 체포되고 만다. 국왕 크레온은 조카딸이자 이미 자신의 아들 하이몬과 장래를 약속한 사이기도 한 안티고네를 용서하고 이 일을 비밀에 부치려 한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이 같은 제안을 거절하며 자신을 풀어주면 다시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묻어주러 가겠다고 한다.

형제지만 둘 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다 죽게 되었지만 에티오클레스는 영웅으로, 폴리네이케스는 역적으로 만든 것 역시 크레온이 테바이의 최고 권력자로서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정치적 술책이었다. 그런데 안티고네가 친혈육의 인륜을 내세워 자신의 포고령을 어기려 하니 이 역시 국가의 권능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태.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입장은 끝까지 평행선을 달리며 파멸의 길로 치닫는다.

안티고네와 삼촌 크레온의 입장은 좁혀지지 않고 평행선을 달린다.
▲ 철창 속 삼촌과 조카딸의 대립 안티고네와 삼촌 크레온의 입장은 좁혀지지 않고 평행선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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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백수광부(대표 이성열)가 제작하고 김승철이 각색과 연출을 맡은 연극 <안티고네>는 극장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무대인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 무대인 마치 감옥같고 새장같은 정육면체 철창을 중간에 두고서 관객들은 거의 사방에서 이들의 연기를 지켜보게 되는데 실은 객석 이곳 저곳에도 배우들이 앉아 있거나 매달려 있다.

그야말로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없는 상태. 관객은 모두 테바이의 시민들인 셈이다. 입장과 동시에 테바이 국가 최고의회 의장인 크레온의 포고령이 적힌 종이를 받아들게 되며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이와 관련된 방송도 듣게 된다. 커다란 덩치에 장총을 든 근위병은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장내를 휘젓고 다닌다. 이건 마치 군사독재시절 비상계엄령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철창 안과 밖에서는 안티고네와 크레온이 한 치 양보도 없는 서로의 입장을 주장하면서 점점 더 상황을 극한으로 몰아간다. 거센 숨소리와 함께 뿜어져 나오는 배우들의 열정과 에너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내는듯 무척 뜨겁고 후끈하게 달아오른다. 배우들과 함께 마치 거센 폭풍우 속으로,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후욱하고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비록 예정된 각본에 의해 정해진 결말로 나아가지만 이 연극은 다른 일반적인 무대 연극과 달리 그날 그날 상황에 따라 배우가 취할 수 있는 애드리브와 리액션의 허용폭이 크다고 한다. 사전에 약속된 규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일 배우의 컨디션과 몰입도, 기분 상태에 따라 변화하는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배우와 배역이 온전히 하나로 일치하였을 때 가능한 일이다. 무대 예술만이 가진 즉흥성의 매력을 더욱 실감나게 만끽할 수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사방에 객석이 있기에 관객이 앉는 자리에 따라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시각이 크게 달라진다. 그래서 한쪽 편에 앉은 관객이 안티고네를 정면 쪽에서 볼 수 있다면 그 반대편 관객은 안티고네의 등 연기를 보고 있거나 크레온의 정면 또는 옆모습을 보게 된다. 다른쪽 시각이 궁금하다면 어쩔 수 없이 재관람해야만 한다.

극중 안티고네와 크레온이 아주 팽팽하게 맞서지만 이 둘의 입장차를 보는 관객의 판단은 각자 스스로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첫날 공연 후 있었던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는 크레온의 입장에 대해 오히려 더 이해가 된다는 관객들이 적지 않았다. 안티고네의 대사가 주로 감성적인 내용에 인륜적 당위를 주장하는 것에 비해 크레온은 더 많은 정보와 함께 상당히 논리적인 주장을 펼쳤기 때문이리라.

점차 극단의 대립으로 치닫는 크레온과 안티고네.
▲ 예정된 파국 점차 극단의 대립으로 치닫는 크레온과 안티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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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위정자들은 상당히 논리적이다. 다수의 시민들이 원하지 않는 사업을 위해 턱없는 궤변을 동원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궤변조차 이런 저런 이유를 갖다붙여 없는 논리를 다 만들어 낸다. 하지만 차분히 깊이있게 살펴보지 않으면 크레온의 논리에 설득당하고 말듯 지배자들의 통치 논리에 설복당하고 만다. 치밀하고도 논리적으로 전개되어지는 명분 뒤에 숨은 치자의 검은 욕망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연극 <안티고네>가 보여주려는 것은, 명분으로는 국가와 사회의 존속과 안녕을 위해 '법대로'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한낮 권력의 자기유지와 방어를 위한 속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것을 위해 온갖 치졸한 암수를 써놓고도 그 고상한 법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합리화하는 힘있는 자들의 허위와 위선의 가면을 드러내는 데 있다고 본다.

배우들은 각자 맡은 역할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고, 이 연극이 사회의 여러가지 갈등과 대립에 있어 서로의 입장은 다르더라도 좀 더 서로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냐는 생각들을 갖고 있었다.

맞는 말이다. 국가나 단체를 통치하거나 주도하는 입장에서는 질서가 중요하니 법을 내세우고, 그 속에 속한 개인들은 자율성과 법 그 이상의 상식과 가치를 말한다. 자칫 닭과 달걀 논쟁이 될 수도 있다.

실제 연극 <안티고네>에서 안티고네와 크레온은 둘 다 옳을 수도 있고 둘 다 틀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이 정녕 옳은지를 찾아가는 과정이 진실로 중요하다. 쉽게 양비론이나 양시론을 외쳐서는 진실을 찾아낼 수 없다. 연극 <안티고네>는 결국 예정된 파국으로 치닫지만 그 속에서 관객들이 찾아가야 할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태그:#연극 안티고네, #극단 백수광부, #선돌극장, #소포클레스 3부작, #희랍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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