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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여러 사람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입니다. 여러 사람이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어서 길에는 여러 사람들의 경험과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길은 단순히 공간이동을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길은 여러 사람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입니다
▲ 강촌 문배마을 가는 길 길은 여러 사람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입니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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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도(道)는 글자 그대로 길이며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걸으며 예전 사람들이 걸었던 발자국에 자신의 발자국을 더해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이 '길을 내는 것'이라면, 길에 담긴 여러 사람의 생각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 '도를 닦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길을 내는 것과 도를 닦는 것은 서로 통합니다.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소통이겠지요. 소통은 관계가 중요합니다. 길은 항상 있는 그대로 존재하지만 그 안에 담긴 생각과 경험은 변화무쌍하여 끊임없이 생각하고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소통하지 못하는 자는 도를 더 닦아야 합니다. 길의 존재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도를 닦는 것을 도로를 닦는 것 혹은 길을 내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무척 많은 것 같습니다. 이제는 길을 내기보다는 존재하고 있는 길과 관계를 더 많이 맺을 때입니다. 왕래가 없던 마을과 마을이 연결되었다면 여기에 이들 마을사람들의 생각을 담아야 합니다.      

걸어가며 생각하기 가장 좋은 길은 절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야말로 구도의 길이지요. 우리나라에서 아름답다고 하는 절은 그 길도 아름답습니다. 은행나무 길 부석사, 전나무 길 내소사, 돌계단 길 개심사, 쌍무지개 길 선암사, 바위틈 길 향일암 모두 아름다운 절이지요. 단순히 풍광만 이름다운 게 아닙니다. 많은 생각이 담겨 있고 그 생각을 담을 수 있어 아름답습니다. 도를 닦듯 이 길을 걸어가 봅니다. 

부석사 은행나무길

예전에는 부석사에 한번 가려면 큰 맘 먹고 가야 했습니다. 소백산을 넘어야 갈 수 있었죠. 어떤 때는 눈 때문에 소백산을 넘지 못하고 사과나무 눈꽃만 실컷 구경하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늦은 오후 부석사가 그리워 무작정 떠난 뒤 날이 너무 저물어 되돌아 오기도 했던 먼 곳입니다. 지금은 한결 나아졌다고는 하나 경상도 땅은 쉽게 가기 어렵지요.

살짝 굽어지고 비탈진 길이기에 생각할 여유가 있습니다. 약간 긴장이 되기도 합니다
▲ 부석사 은행나무 길 살짝 굽어지고 비탈진 길이기에 생각할 여유가 있습니다. 약간 긴장이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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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도착하여 급하게 생각할 틈도 없이 절 경내에 진입한다면 이처럼 허망할 일도 없을 겁니다. 다행히 부석사에는 은행나무 길이 있습니다. 살짝 굽어지고 비탈진 길이기에 생각할 여유가 있습니다. 나중에 맞이할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보는 정경을 맞이할 기대에 약간 긴장이 되기도 합니다. 이 길에 접어들면 이내 마음이 평온해지고 일상사 때문에 생긴 옹졸한 생각이 사라집니다.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생각이 넓어집니다.

개심사 돌계단길

'세심동(洗心洞), 개심사(開心寺)', 돌비석이 문 기둥 역할을 합니다. 소나무를 헤집고 사이사이 돌계단을 냈습니다. 애들 보고 세보라고 하니 186개라 하기도 하고 184개라기도 합니다. 잘 다듬어진 돌이 아니라 근처에 있는 돌을 모아 쌓은 듯합니다. 땅 모양대로 거기에 돌만 갖다 놓아 아주 자연스럽지요. 각지고 뽀얀 돌계단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쌓은 사람들의 공과 정성에 저절로 몸이 낮추어집니다
▲ 개심사 돌계단길 쌓은 사람들의 공과 정성에 저절로 몸이 낮추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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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은 사람들의 공과 정성에 저절로 몸이 낮추어집니다. 분노, 증오, 슬픔, 상처, 옹졸, 집착이라는 말을 이 돌계단에 내려놓습니다. 이 중에 몇 번이고 내려놓으려 해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나 봅니다. 1년에 3-4번은 오니까 앞으로 8-10번 정도 오면 사라질 겁니다.

내소사 전나무길

전나무는 젓나무라고도 합니다. 젓나무는 젖나무에서 온 것은 맞는데 어찌해서 젓나무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젖은 나무에서 나오는 하얀 액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절에서는 솟아나는 우물물을 두고 부처님젖(佛乳)이라 쓰기도 합니다. 조금 민망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표현 한번 절묘합니다.

부처님을 보러 가는 길에 있는 젓나무는 흡사 부처님 젖이 연상됩니다. 전나무는 얼마간은 햇볕을 향하기보다는 음지를 향하여 가지가 뻗습니다. 하찮은 것, 보잘 것 없는 것, 핍박받은 자들을 굽어 살피는 성인 같습니다. 그래서 내소사 전나무 숲은 불유나무 숲으로 불러도 좋을 듯합니다.

전나무길에 들어서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어 구도의 길이됩니다
▲ 내소사 전나무길 전나무길에 들어서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어 구도의 길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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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유는 부처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내소사 전나무길에 들어서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어 구도의 길이 됩니다. 전나무를 타고 불어오는 바람소리는 부처님 말씀처럼 들립니다. 나무사이로 비치는 햇빛은 나의 뺨에 따사롭게 비칩니다. 바람과 햇빛을 맞고 있는 나는 구원을 얻은 듯 무상무념, 행복해집니다.

선암사 쌍무지개 돌다리 길

선암사 길은 작은 무지개다리와 큰 무지개 다리인 승선교(昇仙橋), 바로 뒤따라 강선루(降仙樓)로 이어집니다. 선암사에 선, 승선교에 선, 강선루에 선이 들어가 있는 걸 보면 선암사는 선녀와 참 인연이 깊은 모양입니다.

선녀(仙女)들은 무지개를 타고 깊은 산속계곡에 목욕하러 지상으로 내려온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선녀들이 강선루에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목욕을 하고 승선교에서 무지개 타고 올라갑니다. 두 다리와 강선루 밑을 지나면서 속계(俗界)를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작은 무지개다리 밑에서 보면 쌍무지개가 뜬 것 같습니다
▲ 선암사 쌍무지개 돌다리 작은 무지개다리 밑에서 보면 쌍무지개가 뜬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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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로 모자라 쌍무지개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작은 다리 밑에서 보면 쌍무지개가 뜬 것 같습니다. 다리는 통로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경계를 허물어 트리는 소통의 길입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만들지 않았지요. 온갖 정성을 다했습니다.

 선녀들이 강선루에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목욕을 하고 승선교에서 무지개 타고 올라갑니다
▲ 선암사 강선루와 승선교 선녀들이 강선루에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목욕을 하고 승선교에서 무지개 타고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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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에 있는 바위는 살아 있는 생명체로 여겨 가급적 깨트리지 않습니다. 모난 바위가 있으면 다른 장소에 다리를 세울망정 다듬지 않습니다. 자연과의 소통을 중요시한 것이지요. 자연은 그저 머물러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항상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지요. 함부로 대하면 자연은 우리와 관계를 끊습니다. 천벌을 내리지요. 선인들은 이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향일암 배려의 길

향일암은 한 사람만 지날 수 있는 바위 길을 지나야 만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여서 배려가 필요한 길입니다. 서로 앞서가려고 하면 둘 모두 가지 못하는 길이어서 양보를 해야 하지요. 사소한 일이지만 이 길을 통해 배려의 마음을 배웁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여서 배려가 필요한 길입니다
▲ 향일암 배려의 길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여서 배려가 필요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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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좁아 뒷사람이 앞사람을 앞지를 수도 없습니다. 앞사람이 갈 때까지 뒷사람은 기다려야지요. 뒷사람이 앞지르는 것은 반칙입니다. 특권이 있을 수없습니다. 특권을 내세워 앞지르려 하면 주위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습니다. 특권과 반칙없이 배려의 마음을 갖고 오른 향일암은 앞 바다가 더욱 기분을 좋게 합니다. 속으로 소리를 질러 봅니다. "야! 기분 좋다"  

제주도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을 걸을 때 아무 생각없이 걷지는 않겠지요. 절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길을 맨 처음 낸 사람, 앞서 밟고 간 사람들의 생각을 떠올리기도 하고 절과 인연이 될 만한 사람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일상에서 오는 옹졸함과 집착, 욕망 등을 이 길에 내려놓습니다. 이런저런 많은 생각을 하면서 걷지요. 도를 닦듯이 말입니다.


태그:#길, #부석사, #개심사, #선암사, #내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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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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