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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에 임진강 유역을 다녀왔다.

'노원도봉시민사회단체'는 주민들을 상대로 인문학강좌를 분기별로 개설한다. 그 과정 중에 역사기행이 있다. 이번에는 '한국사 속의 임진강유역'이라는 주제로 임진강 일대를 돌아보았다. 강의는 성인을 상대로 하지만 여행은 가족을 동반해도 되는 것이기에 초등생부터 연세 지긋한 분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움직였다. 거기다가 해설을 담당한 사람이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였기에 학생들도 함께 했다.

아침 9시 20분쯤에 창동역에서 출발한 역사기행 버스가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민통선 초소가 있는 곳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20분이었다. 목적지인 '미수 허목 묘역'은 민통선 안에 있다. 초소에 신고를 하고 신분확인을 받은 후에는 군인이 차량에 동승을 해서 함께 들어가야 한다.

버스로 10여분을 가니 강서5교 삼거리라는 이정표와 함께 묘역을 알리는 표지석도 보인다. 버스에서 내렸다. 태양은 우리를 태울 듯이 내려 쪼인다. 길가의 풀들도 졸듯이 고개를 숙였다. 너른 논에는 벼가 자라고, 곳곳에 인삼밭이 보이고, 간간히 논둑에는 콩이 나오기 시작했고...... 여느 농촌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곳을 언제쯤 마음 놓고 걸어볼 수 있게 될까?" 어른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했다. 5분쯤 들판을 걸어 들어가니 산비탈에 정갈해 보이는 묘역이 나타난다.

'미수 허목'의 묘 입구. 왼쪽에 신도비가 보이고, 오른쪽 산 중턱에 묘역이 있다.
 '미수 허목'의 묘 입구. 왼쪽에 신도비가 보이고, 오른쪽 산 중턱에 묘역이 있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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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 허목'은(1595~1682) 경기도 연천이 고향이다. 인조, 효종, 현종, 숙종시대를 거친 남인계열의 사람으로 서인의 송시열과 쌍벽을 이루는 인물이라고 한다. 예송(禮訟)논쟁으로 송시열과 첨예한 대립을 하게 된다. 유생이었던 시절인 인조 때 과거를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벌을 받게 되면서 산림(山林)으로 지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재야인사인 셈이란다.

산림으로 지내면서도 시대가 바뀔 때마다 정치에 들기도, 축출되기도 하면서 과거를 치르지 않고도 정승반열에 오른 인물이 되었다. 그러다 숙종 때 남인이 정치에서 대거 실각되는 경신환국을 맞는다. 그 후로 관작을 삭탈당하고 학문과 후진양성에만 몰두하게 된다. 관작 회복은 사후에(1688) 이루어진다.

'미수 허목' 묘역. 이곳에는 윗대의 묘도 함께 있었다.
 '미수 허목' 묘역. 이곳에는 윗대의 묘도 함께 있었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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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 선 '허목'이라는 분의 생애와 역사의 줄기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도 마음에 담기는 것은 주변 풍경이다. 민통선 안이라는 선입견 때문인가 유난히 조용한 느낌이다. 개미 숨소리까지도 들릴 것 같다. 사진을 찍되 먼 경치는 삼가고, 들의 풀들을 뽑아가지 말라는 당부가 있다. 그런 한낮의 정막을 깨고 잠시 허목 묘역이 사람들로 복작였다.

묘역 입구에는 그의 공덕을 추모하기 위해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데 성호 이익(1681~1763)의 글이란다. 신도비는 2품 이상의 품계에 해당되는 사람들에게만 세워준다고 한다. 성호는 허목의 사후사람이지만 그를 흠모해 학문체계를 이어나간 사숙관계다. 본인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못하지만 남겨진 저서 등을 통해 스승으로 받들고 배워 나가는 형태가 사숙이며, 공자와 맹자의 경우가 이에 속한다.

다음 행선지는 '숭의전'이다. 30여 분 달려서 숭의전(연천군 미산면 아미리)에 도착하니 벌써 점심시간이다. 많은 사람이 이동을 하고 설명도 자세하게 하니 예정된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밥부터 먹었다. 식사를 한 후에 자유롭게 숭의전 숲길로 들어갔다. 오른 쪽으로 임진강이 흐른다.

숭의전. 앞쪽에 임진강이 흐르고 있다.
 숭의전. 앞쪽에 임진강이 흐르고 있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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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의전은 고려의 종묘다. 새로운 왕조가 일어서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이전 왕조의 종묘를 파하고 자신들의 종묘를 세운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의 종묘는 조선 태조 6년에 세워진 것이다. 왕조가 새롭게 세워진다는 것은 전 왕조의 씨를 말리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씨 조선이 들어서면서 고려왕조의 '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도륙이 된다. 왕실 사람들뿐만 아니라 민들까지도 함께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왕'씨들은 성을 바꾸기도 하고 숨어 살았다. 태종 때까지도 '왕'씨 성을 가진 자가 있으면 신고토록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런 기록이 세종 때 가서야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더 이상 '왕'씨 왕조가 일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쯤에 피의 살육에 대한 미안함을 실어 사당이 세워진다.

처음에는 고려 태조 왕건만을 기리는 사당의 형태였고 정종 때는 8왕의 위패가 봉안이 된다. 세종 때 조선의 종묘에는 5왕을 제사 지내는데 고려조 사당에 8왕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해서 태조, 현종, 문종, 원종의 4왕의 위패만 봉안되었다. 그 후 문종(1451) 때에 와서 전대의 왕조를 예우한다는 의미로 '숭의전'이라 명하고, 고려조 충신 16명도 함께 배향토록 한다. 그리고 고려 현종의 먼 후손을 공주에서 어렵게 찾아내 토지와 노비를 내리고 제사토록 한다. 지금의 숭의전은 한국전쟁 중에 전소되었다가 1972년에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재건된 것이다.

숭의전 앞에는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들이 임진강의 절벽위에 울타리를 치듯 서있다.
 숭의전 앞에는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들이 임진강의 절벽위에 울타리를 치듯 서있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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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을 하지 않은 숭의전의 위용이 아미산 자락에서 당당해 보인다. 임진강이 흐르는 앞 쪽의 절벽은 세월의 무게를 견뎌낸 나무들이 저절로 우거져서 울타리가 되어 있다. 절벽 아래 강은 깊어 보인다. 숭의전을 오려면 전곡터미널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도 있다. 찻길에서 가깝다.

연천에 있는 '호로고루'(장남면 원당리)를 찾아 가는 길은 논둑길이었다. 대형버스가 지나가기에는 좁아 보인다. 혹시 논 밑으로 구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 슬며시 안전벨트에 손이 갔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3시 50분, 숭의전에서 약 30분 거리다.

호로고루는 임진강 북쪽에 위치해 있는 고구려 성이다. 생소한 이름의 호로고루의 어원은 부근의 지형이 표주박, 조롱박 같다 하여 생겼다는 설과 '고을'을 뜻하는 '홀'(호로)와 '성'을 뜻하는 '구루'의 합성어라는 설이 있다고 한다.

호로고루성. 오른쪽이 임진강이다.
 호로고루성. 오른쪽이 임진강이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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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으로 남쪽에 남아 있는 고구려의 중요한 유적에 속한단다. 수백 년간 방치되어 있다가 고구려 성으로 밝혀지기는 20년 정도다. 발굴되기 전까지는 추측으로만 여겼는데 유물출토를 통해 확실한 고구려 성으로 드러났다.

성으로 가는 뚝방의 흙길이 햇볕으로 반짝인다. 지천으로 피어 있는 보라색 엉겅퀴 꽃, 잔디처럼 깔린 토끼풀밭, 은빛의 임진강, 사람의 집을 멀리 놓고 이어져 있는 논밭들, 물놀이에 즐거운 사람들...... 이 모든 것을 아우를 듯이 품고 있는 푸른 산야는 호로고루의 솟은 언덕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이미 풍광에 마음이 뺏겨 길게 이어지는 설명은 강바람을 타고 귓등으로 스쳐 지난다.

호로고루성 위에서 임진강을 향해. 물놀이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석성 이전에 사용되었다는 목책이 강변을 두르고 있다.
 호로고루성 위에서 임진강을 향해. 물놀이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석성 이전에 사용되었다는 목책이 강변을 두르고 있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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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고루에서 고랑포가 있는 쪽. 엉겅퀴가 지천이다. 강바닥이 보일 정도로 깊지 않아서 배를 타지 않고도 건널 수 있는 곳이란다.
 호로고루에서 고랑포가 있는 쪽. 엉겅퀴가 지천이다. 강바닥이 보일 정도로 깊지 않아서 배를 타지 않고도 건널 수 있는 곳이란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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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지역에서 출발한 고구려군이 백제 수도인 한성으로 진격하기 위한 최단코스는 평양에서 개성을 거쳐 문산 방면으로 직접 가는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15㎞ 정도 우회하여 장단을 지나 호로고루 앞의 여울목을 건너 의정부 방면으로 진격하는 것이다. 따라서 호로고루가 있는 고랑포일대의 임진강은 <삼국사기>에도 여러 차례의 전투기사가 등장할 정도로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임을 강조한다.

임진강을 바라보고 왼쪽 멀리 감악산이 흐릿한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오른 쪽으로는 고랑포구다. 호로고루가 있는 고랑포 일대는 수심이 낮다. 갈수기 때면 배를 타지 않고도 건널 수 있을 정도란다. 성벽은 석성과 토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발굴하다 보니 그 전에 목책단계가 있었음이 확인 되었다고 한다. 그 목책은 지금 임진강변을 두르고 세워져 있다. 여전히 제 몫을 하고 있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신라 경순왕릉(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이다. 호로고루에서 약 10여분 거리에 있다. 예전에는 민통선 안에 있어서 왕래가 자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찔레꽃이 군데군데 뭉게구름처럼 하얗게 빛나는 길을 지나 산 속으로 들어가니 단촐해 보이는 능이 있었다. 사람들은 능 옆의 사초지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역사 속으로 잠시 빠져 든다.

신라 경순왕릉.
 신라 경순왕릉.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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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이다. 국운이 쇠하여 일어날 기미가 없어 보이자 고려 왕건에게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준다. 그의 아들은 금강산으로 들어가 평생 마 옷을 입고 초식으로 연명하다 일생을 마쳤다 해서 마의(麻衣)태자라는 이름을 후세에 남긴다. 귀부(歸附)한 왕은 태자의 지위인 정승공에 봉해지고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최초의 사심관이 된다. 또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을 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 개성에서 살던 경순왕이 승하하자 신라 유민들은 경주에 능을 쓰려고 임진강 고랑포로 운구해 나왔다.

그러나 고려 조정은 민심을 우려해 '왕릉은 개경(지금의 개성) 100리 밖에 쓸 수 없다'며 막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장단 고랑포 성거산에 능이 조성되었고, 신라왕릉으로는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임진왜란 등으로 실전되었다가 영조 때 발견되었으나 또 다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실전된 것을 1973년에 발견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세대 분별없이 어울려 한국사 속에 들어있는 문화재를 배우고 공유한 시간이었다. 하나의 문화재를 대할 때마다 초등생들은 부산하게, 학생들은 진지하게, 어른들은 회상하듯, 각자의 의미대로 새겨듣는 모습이다. 학생들과 함께 움직이다 보니 교수의 설명이 교실에서 듣는 강의 수준이다. 잠시도 가만히 있고 싶지 않은 초등생들과 나이든 사람들에게는 약간의 고문(?)인 셈이다. 그러나 임진강 유역의 아름다운 산야가 있어 지루함을 덜어주었다. 고랑포의 신라 경순왕릉에서 의정부를 거쳐 서울까지 들어오는데 한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옛 시간을 살다가 현실로 순간이동을 한 듯 잠깐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태그:#한국역사연구회, #허목 묘역, #연천 호로고루, #숭의전, #신라경순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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