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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길에서 중흥마을로 들어선다. 삼일동사무소가 있고, 중학교가 있지만 마을은 20여년 전 풍경을 그대로다.
 큰 길에서 중흥마을로 들어선다. 삼일동사무소가 있고, 중학교가 있지만 마을은 20여년 전 풍경을 그대로다.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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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번창하던 마을은 철거를 앞두고 있다

타려고 하는 시내버스가 눈앞에서 지나갈 때의 기분. 버스가 오는 것을 보고, 어! 어! 저 버스 타야 하는데…. 여수 흥국사 가는 52번 버스가 길 건너편으로 지나가 버린다. 아쉽지만 근처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가야겠다. 오늘(5.29)은 흥국사 돌담길 뒤로 옛길을 걸어서 바닷가 마을인 오천동까지 갈 생각이다.

묘도 가는 61번 버스를 타고 중흥삼거리에서 내렸다. 삼거리에는 버드나무가 한가하게 늘어지고 있다. 뒤로 이어진 도로는 시간이 20여 년 전에 멈춰진 풍경을 보여준다. 길 양 옆으로 오래된 선술집과 간판을 달고서 한 번도 정비하지 않은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여수산업단지 한 중심에 있는 중흥마을은 동사무소가 있고, 중학교가 있는 쾌 큰 마을이다. 60년대에 공단이 들어오면서 한창 번창하다가, 어느 순간 시간이 멈춰 버렸다. 근대화 물결 속에서 몸을 부대끼며 살았던 마을은 점점 그 역할을 잃어가고 사람들도 더 이상 찾아들지 않는다.

집집마다 철거를 예고하는 빨간 숫자를 달고 있다. 빨간장미가 아름다운 집.
 집집마다 철거를 예고하는 빨간 숫자를 달고 있다. 빨간장미가 아름다운 집.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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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가로질러 걸어가면 집집마다 번호가 쓰여 있다. 마치 불온한 집이라는 낙인처럼…. 최근 중흥마을 주민들은 공해 때문에 더 이상 살 수 없다며 이주를 결심했다. 인근에 살던 사람들이 대대로 살던 땅을 공장에 내어주고 새롭게 정착하려고 이주해왔는데, 석유화학공단의 하얀 연기는 또 다시 밀어내 버린다.

조선 중기 건축양식이 그대로 남아있는 호국사찰 흥국사

중흥마을을 벗어나서 저수지를 끼고 가다 홍교를 건넌다. 퉁방울 눈을 한 용머리는 물을 바라보며 오늘도 무심하게 하루를 보낸다. 다리를 건너 흥국사로 들어선다. 일주문 옆 부도탑들이이 일렬로 서있다. 부도탑 중에는 보조국사라 쓰인 부도도 있다. 흥국사는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했다고도 한다.

보물 제396호, 흥국사 대웅전. 대웅전 문고리만 만져도 최소한 삼악도(三惡道-지옥, 아귀, 축생)는 면한다고도 하고, 커다란 손잡이를 잡고 소원을 빌면 한 가지는 들어준다는 전설이 있다.
 보물 제396호, 흥국사 대웅전. 대웅전 문고리만 만져도 최소한 삼악도(三惡道-지옥, 아귀, 축생)는 면한다고도 하고, 커다란 손잡이를 잡고 소원을 빌면 한 가지는 들어준다는 전설이 있다.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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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로 들어가는 길이 싱그럽다. 길옆으로 벚나무 고목이 둥치를 쩍쩍 벌린 채 힘겹게 서있다. 천왕문, 봉황루, 법왕문을 지나 반야용선인 대웅전과 만난다. 언제보아도 아름다운 절집이다. 넓지 않은 터에 절집구조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흥국사는 임진왜란 때 승군이 머물던 호국사찰로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고, 1624년(인조2년)에 계특대사가 중건하여, 한국전쟁 때 화마를 피한 몇 안 되는 절집이다. 그러다 보니 모든 건물들이 조선중기 건축 양식 그대로다. 단청도 아름답지만 벽화가 일부분 남아있어 숨은 그림 찾기 하듯 둘러보는 재미도 있다.

어른들은 장보러 가고, 아이들은 학교 가던 길

흥국사를 나와 산길로 들어선다. 요사채 옆 돌담을 따라간다.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귀를 맑게 한다. 계곡은 여기저기 작은 폭포를 만들며 흘러내린다. 시원한 물소리를 음악 삼아 걷는다. 물소리가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지고, 적막한 숲속과 잘 어울린다.

산길은 계곡을 따라가고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다.
 산길은 계곡을 따라가고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다.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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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녹음으로 깊어간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넘어 다니던 길이다. 여수시내로 장보러 가던 길이고, 애들이 도란도란 학교로 가던 길이다. 그러나 지금은 교통이 발달해서 더 이상 산길을 걷지 않는다. 숲이 우거지고 싸리나무는 자꾸만 옷깃을 잡아챈다.

계곡을 징검다리삼아 두 번 건넌다. 숲길은 다시 넓어지더니 시멘트포장길과 만난다. 숲을 벗어나니 산골 다랑이논들이 펼쳐진다. 요란한 기계음이 산골을 뒤흔든다. 길가에는 새참이 놓이고 논에는 이양기와 트랙터가 열심히 돌아다닌다. 마을 사람들이 다 나와서 이양기를 따라다니며 모내기를 하고 있다.

산길에는 찔레꽃이 하얗게 피었다. 여름이다.
 산길에는 찔레꽃이 하얗게 피었다. 여름이다.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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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다랑이논. 작은 논에는 물을 가득 담고서 이양기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산골 다랑이논. 작은 논에는 물을 가득 담고서 이양기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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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들은 거울같이 물을 담고서 구불구불 경계를 짓고 있다. 산골에 삿갓배미라는 말이 있는데 참 논이 작기도 하다. 산골을 살아가는 절실한 마음이 그대로 배어있다. 물이 채워진 논들은 생기가 넘치고 풍요롭다. 그 안에서 올챙이들이 한가롭게 여유를 즐긴다. 조금 있으면 난리가 날줄 모르고….

조용한 산자락 마을 자내리를 지나

시멘트 포장된 농로를 따라 재로 오른다. 커다란 느티나무를 옆에 끼고 내려서니 집들이 십여 채 모여 있다. 자내리 마을이다. 마을 지형이 지네처럼 생겼다 해서 지네리라 부르다가 자내리가 되었다는데…. 얼기설기 쌓은 돌담 안에 아담한 집들이 햇볕바라기를 하고 있다. 조용한 마을에 낮선 불청객을 보고 개들이 짖는다. 돌담 위로 빨간 앵두가 익어간다.

내리 시골집. 담장에는 앵두가 익어가고 집을 지키던 개는 낮잠을 깨웠는지 짖어대기만 한다.
 내리 시골집. 담장에는 앵두가 익어가고 집을 지키던 개는 낮잠을 깨웠는지 짖어대기만 한다.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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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을 내려가니 본 마을이 나오고, 작은 개천을 만난다. 좁은 천변을 따라 걷는다. 가끔 길이 끊어지기도 하지만 이리저리 고민하면 길은 다시 이어진다. 천에는 고마리가 수로 주변으로 가득 자라고 있다. 하천 주변 논들도 모내기가 한창이다. 산골마을과는 달리 가족들이 논 마다 나와서 모내기를 한다. "여! 모 가져와!"

천을 따라 걸어가다 하천 바닥에 돌을 긁고 있는 포크레인을 만난다. 하천정비. 누구를 위한 건지 모르겠지만 천마다 반듯한 직벽으로 둑을 쌓았다. 그 둑은 얼마 못가 무너진다. 다시 쌓는다. 천을 정비하지 않으면 무너지지 않을 건데. 자연스럽게 흐르는 하천을 인위적으로 정비하다 보니 하천이 넓어지고 비가 많이 내리면 둑이 무너지기를 반복한다. 누구를 위한 하천 정비인지….

호명마을 아름다운 방풍림과 소박한 정자

멀리 호명마을 방풍림이 보인다. 햇살 가득 받은 길을 벗어나 방풍림으로 들어서니 서늘하다. 시원한 기분이 아니라 추위를 느낄 정도다. 나무의 고마움. 바람을 막아주기도 하지만 바람이 지나가게도 한다. 마을의 전설에 따르면 호명마을의 형국이 호랑이상이지만 꼬리가 없다하여 그 비보책으로 400여 년 전에 주민들이 지형을 따라 호랑이 꼬리 모양으로 길다랗게 심었다고 한다.

여수 호명의 방재수림대(전라남도 기념물 제165호). 수령이 대개 100년에서 500년 정도로 추정되는 나무 84그루가 450m 길이로 심어져 있다.
 여수 호명의 방재수림대(전라남도 기념물 제165호). 수령이 대개 100년에서 500년 정도로 추정되는 나무 84그루가 450m 길이로 심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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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명마을 정자 호림정. 쇠파이프 기둥에 함석지붕. 마루는 평상
 호명마을 정자 호림정. 쇠파이프 기둥에 함석지붕. 마루는 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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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을 따라 호명마을까지 간다. 숲길 끝에 정말 꾸밈없는 정자가 있다. 호림정(虎林亭). 기둥은 쇠파이프, 지붕은 함석이다. 마루는 평상 몇 개 넣어 놓으니 아름다운 정자가 되었다. 정자 안에는 호명8경이라고 적어 놓아 멋까지 부렸다. 작은 마을에 8경을 선정할 정도로 풍류를 아는 사람들이 사는 곳.

부녀회가 운영하는 마을 슈퍼에서 캔커피와 과자를 샀다. 정자에 앉아서 쉰다. 너무나 좋다. 농부들은 들에서 열심히 일하는데, 배짱이 같은 내 모습이 미안하게 느껴진다.

중흥삼거리에서 호명마을까지 7km 정도를 3시간 정도 걸었다. 공단으로 번창했던 마을이 쇠락해가는 풍경을 만나고, 아름다운 절집 흥국사도 만난다. 한 때 학생들의 웃음소리로 재잘거리던 산길은 인적이 드물어 한적하고, 산골로 가는 길에는 다랭이 논에 모내기가 한창이다. 얼기설기 쌓은 돌담으로 울을 친 소박한 마을을 지나, 작은 하천길을 따라가면 호명 방재수림이 나오고 아름다운 정자를 만난다. 정자에서 쉬다보니 그만 걷고 싶다.
 중흥삼거리에서 호명마을까지 7km 정도를 3시간 정도 걸었다. 공단으로 번창했던 마을이 쇠락해가는 풍경을 만나고, 아름다운 절집 흥국사도 만난다. 한 때 학생들의 웃음소리로 재잘거리던 산길은 인적이 드물어 한적하고, 산골로 가는 길에는 다랭이 논에 모내기가 한창이다. 얼기설기 쌓은 돌담으로 울을 친 소박한 마을을 지나, 작은 하천길을 따라가면 호명 방재수림이 나오고 아름다운 정자를 만난다. 정자에서 쉬다보니 그만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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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흥국사에서 오천동까지 12km정도의 길은 산길과 농로만 따라서 바다까지 걸어가는 아름다운 길이다. 이 짧은 길에는 산과 바다, 그리고 농촌 풍경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다. 걷다보면 들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조심스럽게 걸어가야 한다.

교통정보는
여수에서 삼일동 중흥삼거리까지 가는 버스는 20분에서 1시간 간격으로 다닌다. 흥국사가는 버스는 1시간 간격.
호명동은 국도 77호선이 지나가며, 시내버스는 수시로 다닌다.
길의 종점 오천동에는 40분간격으로 버스가 다니며, 자세한 내용은 여수시청 홈페이지 교통정보를 참조.



태그:#흥국사 옛길, #호명 방재수림, #다랭이논, #자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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