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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라 함은 보통 동네 주변으로 산천수목이 수려하고 개천이 흐르는 흙내음 나는 곳을 말하지만, 70, 80년대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에겐 고향은 조금 다른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동네길, 골목길따라 들어선 만화방, 동네서점, 떡방앗간, 목욕탕, 철물점, 구멍가게... 생각만 해도 아련하고 그때의 친구처럼 또렷한 기억으로 남는 것들이다. 

서울에 그것도 사대문안인 종로에 그런 동네가 아직 남아 있다고 하니 놀랍다. 서울시 종로구 계동이 그곳이다. 이웃 동네인 삼청동, 가회동, 안국동 등과 함께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에 있다해서 북촌이라고 불리는 동네다. 

인근 동네인 인사동이야 말할것도 없고, 화려한 카페들과 사람들로 가득한 삼청동과 고급스런 갤러리, 박물관이 많은 가회동 그리고 대기업 현대의 본사 사옥이 있는 도심속에 이런 동네가 남아 있다니 숨은 보석을 발견한 듯이 반갑고 기쁘다. 수도권 3호선 전철 안국역에 내려서 3번 출구로 나오면 계동길 이정표가 금세 보인다.

동네 들머리에 북촌문화센터가 있는데 전시장도 있고 쉬어갈 수 있는 마루와 작은 정자가 있어 앉아 이야기 나누기 좋다.
 동네 들머리에 북촌문화센터가 있는데 전시장도 있고 쉬어갈 수 있는 마루와 작은 정자가 있어 앉아 이야기 나누기 좋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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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동길을 걷다보면 내 고향으로 돌아간 듯한 향수에 젖는다.
 계동길을 걷다보면 내 고향으로 돌아간 듯한 향수에 젖는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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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온 듯 향수에 젖어 걷는 계동길

계동길에 들어서자 북촌마을답게 동네 들머리에 한옥문화센터가 있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실제 큰 한옥집처럼 마당도 여러개 있고 의외로 넓다. 이 집은 원래 조선말기 어떤 세도가의 집이었다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전시회를 하는 전시장도 있고 푹신한 마루와 작은 정자도 있어 사람들이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쉬고 있는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  

이어지는 차 한 대 지나갈 정도의 동네길을 걷다보니 주변의 풍경이 무언가 빠진 듯 다르다. 주택가임에도 이젠 서울에서 눈에 익숙한 아파트들이 안 보이는 것이다. 눈속 동공이 동네 멀리까지 조리개를 편다. 이웃동네들과 함께 북촌마을은 하늘을 가리고 시야를 근시로 만드는 아파트로 점령된 서울에서 유일하게 무사한(?) 곳이다.

예전에 책도 실컷 읽고 아르바이트도 할 수 있어 좋았던 책 대여점이 보여 반가운 마음으로 들어가 보았다. 말이 책 대여점이지 서고에 만화책이 가득한 만화방이다. 일본만화의 위세를 보여주듯 한국의 척박한 만화계를 알려주는듯 대부분이 일본만화다. 30년이 넘게 운영중이라는 문화당 서점 주인장 아저씨의 은빛 갈치 같이 반짝이는 흰머리가 눈이 부시고 왠지 친근하게 다가온다. 명색이 서점이지만 시대에 밀려 일반 책보다는 학생용 참고서나 교복등을 주로 판단다.

간판엔 철물점이라고 써있는 각종 생활용품들이 없는게 없는 만물상 철물점, 커피 한잔이라고 소박한 글씨로 써있는 수수한 카페마저도 내겐 어릴적 살던 고향에 온 것 마냥 향수에 젖게 하는 곳이다. 예술을 창조하고 전시하는 공방과 갤러리들도 동네 곳곳에 숨어서 찾아보라는 듯이 들어서 있다. 어떤 갤러리는 쫄깃쫄깃 맛난 떡을 만드는 방앗간과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으니 재미있다. 외지인에겐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게 하는 좋은 여행지이자 동네 사람들에겐 소중한 삶의 터전임이 느껴진다.

중앙탕은 계동의 오래된 명물이자 주민들의 사랑방이다.
 중앙탕은 계동의 오래된 명물이자 주민들의 사랑방이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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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이 누군지 골목의 평범한 벽을 멋스럽게도 꾸며 놓았다.
 집주인이 누군지 골목의 평범한 벽을 멋스럽게도 꾸며 놓았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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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동의 명물 중앙 목욕탕

옥상까지 있는 동네에서는 높은 건물이자 연륜이 느껴지는 목욕탕 건물이 나타난다. 이발소가 들어 있는 계동 중앙탕은 40여 년 된(1968년에 개업) 우리나라 최초의 목욕탕이라 해서 TV에도 종종 나오는 곳이다. 목욕탕의 오래된 외양은 한 눈에 봐도 동네의 역사가 엿보인다. 어느 일요일 아침이면 식구들과 몸을 빨갛게 불리고 때를 밀러 가곤 했던 목욕탕의 추억이 새롭다. 가히 계동의 명물이자 문화유산이라고 할 만하다.

서울에 아직도 이런 허름한 목욕탕이 떡하니 존재하다니 신기하기도 해서 입구에 들어가 조심스럽게 그 비결을 여쭤보았다. 20대에 시집와 목욕탕을 시작했다는 인상이 좋으신 내 어머니뻘의 여주인은 수지타산 따지며 목욕탕을 운영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고 하신다. 목욕하러 오는 손님들 대부분이 목욕비는 좀 올려도 되니 이 탕은 없애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니 단골들 등쌀(?)에 그럴 만도 하시겠다.   

주민들의 정과 주인 할머니의 인심이 느껴지는 중앙탕도 시대에 발맞추어 몸에 좋다는 육각수를 쓴다고 써있다. 몸이 으스스할 때 한 번 찾아와서 탕속에도 들어가보고, 묵은 때도 한 번 밀어볼겸 나도 '목간' 좀 하러 가야겠다.  

동네에 공방과 미술가들의 작업실이 많아서 그런지 평범한 골목과 벽들이 멋스럽고 운치있게 꾸며져 있어 구경하면서 걷는 맛이 쏠쏠하다.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는 골목길을 그냥 걷다보면 계동길만의 멋과 즐거움이 느껴진다. 100원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작은 장난감들이 나오는 기계 앞에서 동네 아이들이 딱지 치기를 하고, 숨바꼭질을 하면서 뭐가 그리 좋은지 새들처럼 지저귄다. 

이미 유명해진 이웃 동네들에 가면 주민들은 별로 안보이고 많은 사람들 대부분이 외지인이나 여행자들이지만 계동길에는 동네 주민들이 더 많다. 그들끼리 주고 받는 일상의 대화와 친근한 시선이 부럽다. 그래서인지 정겨운 한옥들과 골목길등의 사진을 찍기도, 귀여운 동네 꼬마 녀석들에게 장난삼아 말붙이기도 조심스럽다.

동네에 있던 한옥집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가 입구부터 정겹다.
 동네에 있던 한옥집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가 입구부터 정겹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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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드문 삽살개 한마리가 짖지도 않고 점잖게 사진포즈를 취해 주는데 한옥과 잘 어울린다.
 보기드문 삽살개 한마리가 짖지도 않고 점잖게 사진포즈를 취해 주는데 한옥과 잘 어울린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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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100년된 고등학교가 있네

동네 골목길에서 노는 모습이 내 어린시절과 똑같은 아이들, 내가 살던 집이 저기 어디에 있을 것만 같은 동네 분위기에 취해 걷다보니 문득 즐겨 들었던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The Alan Parsons Project) 의 노래 'Old and Wise'가 귓가에 맴돈다. 서울의 다른 동네들이 그랬던 것처럼 고향같은 계동길도 언젠가 아니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기에 조금은 애조띤 곡조가 맘속에 떠올랐나보다.     

북촌마을답게 골목골목에 오래된 한옥집과 리모델링한 새한옥들이 많이 남아있다. 계동에는 그런 한옥집들을 개조하여 만든 게스트 하우스들이 두 세군데 보인다. 골목길 끝에서 마주친 어떤 한옥집은 대문까지 이르는 입구의 길이 참 정답기도 해서 가까이 가보았더니  게스트 하우스다. 겉으로 봐선 평범한 우리네 옛 한옥집이다. 원래 있던 집을 개조한 곳으로 집 안팎으로 꽃과 풀이 자라나고 문열린 대문안으로 커다란 삽살개 한마리와 초로의 주인 아저씨가 맞아준다.

아담한 마당을 바라보며 마루에 앉아 있자니 한여름 같던 날씨가 별로 덥지 않게 느껴지는게 역시 한옥이다 싶다. 10년 넘게 이 동네에 살면서 민박집을 운영한다는 주인 아저씨의 호의로 순하고 선하게 생긴 삽살개를 쓰다듬어도 보고 난생 처음 삽살개와 사진도 찍어보았다. 계동의 게스트 하우스에는 외국인들이 주로 많이 오지만 방이 있으면 한국인도 투숙이 가능하다고 하니 특별한 날 한 번 묵어야겠다.

동네 제일 안쪽 언덕위에 자리한 오래된 중앙고등학교 건물이 고풍스럽고 낭만적이다.
 동네 제일 안쪽 언덕위에 자리한 오래된 중앙고등학교 건물이 고풍스럽고 낭만적이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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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의 제일 안쪽에 들어서 있는 중앙고등학교는 1908년에 설립한 100년이 넘은 역사적인 사적지이기도 하다. 일제시대인 1926년 순종황제의 장례식이 있던날인 6월 10일에 이 학교의 학생들이 6.10만세운동을 주도했다고 한다. 교정에 6.10만세 기념비와 인문학 박물관도 있다. 고풍스럽고 이국적인 건물이 지옥같은 입시교육으로 학생들이 시달리는 고등학교라는게 느껴지지 않게 낭만적이다. 뒤쪽으로 가면 현대식 고교 건물과 널찍한 운동장이 있고, 바로 옆 담장 너머를 무심코 쳐다보았더니 창덕궁이 훤히 보인다.

학교 앞 문구점들에 우리나라 스타 연예인들의 인물사진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다. 이 학교에서 드라마 '겨울연가'를 찍었는데 일본에서도 히트한 이 드라마를 보고 일본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수년 전 드라마가 히트할 당시엔 일본 관광객들이 매일 몰려와서 학교 교정 곳곳을 헤집고 다녀 수위 아저씨가 고생 좀 하셨다고 한다. 어쩐지 학교 앞에서 모여있던 사람들의 서성이는 폼이 관광객 같더라니 다 일본사람들이었다.

동네 여기저기를 걸어다니다보니 계동길에서는 차를 보기 힘들다. 비좁은 동네길에 과일과 채소를 싣고 다니며 주민들에게 시장 역할을 하는 용달차를 빼곤 사람들은 주로 걸어다니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같은 서울에 살지만 내가 어릴적 살았던 동네와 참 닮아서 정이 가는 동네 계동길, 계절마다 찾아와서 또 거닐고 싶다. 이웃동네의 창덕궁 전경, 가회동 박물관길, 삼청동 돌층계길 등 북촌 8경이 유명하다는데 계동길은 해당하지 않지만 내 마음속엔 북촌 9경으로 꾹 눌러 담은 그런 동네다.

덧붙이는 글 | - 6월 6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계동, #종로구 , #중앙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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