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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알뿌리가 담겨진 술

 

버스에서 내리자 항구에는  끝없이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 저멀리 방죽을 따라서 클럽 멘도사가 노란 불빛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지난 번과 다른 공기만이 바다 저편에서 우리들 곁으로 다가왔다.

 

할머니는  먼저 가서 방송준비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하고  빨간 하이힐 역시도 그러하리라.

조제는 가만히 팔짱을 끼더니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추워?"

나는 메마른 목소리로 가만히 물었다.

"응, 조금 한기가 느껴지네."

 

"내 코트라도 벗어줄까? 방한 효과는 전혀 없지만..."

"너나 처입어라!"

 

기사 아저씨와 우리 두 사람이 클럽 멘도사에 도착했을 땐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어서 실내는 더운 공기로 휩싸여 있었다. 모두들 얼굴이 불그죽죽한 걸로 보아 한잔들 한 모습이었고, 우리를 발견한 인형웨이터가 부리나케 쫓아와서는 수선을 떨었다.

 

"우리 애기들 오느라 고생 많았쪄? 용케도 시간 맞춰 잘와서 너무 이쁜 거 있지? 여기 사람들은 날이 새면 일하러 가야 하니까 다음 주 방송은 생방으로 하기 곤란해용. 미리 촬영해서 다음주에 내보내야 하니까 우리 애기들 이리와서 앉아봐." 

우리는 인형웨이터가 권하는 탁자에 앉아서 가져다 준 차를 한잔 씩 마시고  한숨을 돌리며 촬영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드디어 피디가 탁자로 와서는 오늘 촬영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어제 방송 이후로 시청자들이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많이 올렸다고 그가 말했다. 그리고 안내원에게 설득당한 '빨간 하이힐'은 피디와 의논하여 알뿌리를 이곳으로 가져와서 멜레나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일단락지었다 한다. 대신 그 알뿌리의 한 조각을 모래흙에 묻어서 증식되도록 하는 선에서 둘의 팽팽한 신경전도 더불어서 중재되었단 거다. 그리고 오늘부터 보카에서 그 알뿌리를 넣은 분노의 술은 조금씩 성분이 변하고 있는 중이므로 계속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근데 있죠, 그 알뿌리가 대체 뭐길래 술의 성분을 변화시켜요? 갑자기 웬 꽃이며 알뿌리며 그 속에서 뭔가 의미 운운 하니까 좀 그렇네.우리가 무슨 히피 정신을 이어가자는 것도 아니고..."

 

조제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피디는 머리를 쓱 넘기면서

"우리 방송은 출연자에게 방송 내용을 귀띔하지 않아요. 삶이 각자에게 급작스럽게 다가온 많은 것이 응축되어 만들어지는 것 처럼 우리 방송은 연습 없는 당혹감을 통해서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기쁨을 주는 거죠."

 

"그런 의미로 보자면 누구의 인생이 성공이고 누구의 인생이 실패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 거란다. 다만 그 과정 안에서 당사자가 혹은 주위사람들이 어떤 울림을 느끼고 깨닫게 되는지가 중요한 거지."

어느새 할머니가 다가와서 한마디 거들었다. 나는 지그시 두 사람을 쳐다보며 그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러기에 세상에서 말하는 온갖 실패와 좌절을 겪고도 당당히 토크쇼에 나와서 자신의 인생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서사의 과정에서 불현듯이 새로운 힘도 생겨나는 것이군요.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생각의 고리를 새로운 방향으로 열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일이 시간의 세례를 거치면 새롭게 받아들여지는 것 역시도... 시간의 흐름이 주는 장점이겠지요?"

 

그러자 두 사람은 평온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곁에서 시큰둥하니 있는 조제를 향해서 할머니가 나직히 말했다.

 

"너는 보카의 시민이 되는 게 어때? 이미 너의 삶에서의 헤매는 기간은 끝낸 듯 하니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방안을 이곳에서 모색하며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지금의 너가 가진 의식은 단단하고 덤덤해. 하지만 섬세하게 너를 바라볼 연습은 되어있지 않은 것 같구나. 이곳 사람들은 모두 이주민이야. 2차 대전 후에 유럽에서 부자가 되고 싶어서 온 사람들도 있고 너처럼 현실에서 무언가를 이루고 싶지만 세상과의 타협점을 찾지 못해서 온 사람도 많아. 저 기사 아저씨 처럼 보카의 시민이면서 현실을 오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러자 조제는 버럭 고함을 지르며 일어섰다.

"할머니!"

"그렇게 성낼 것 없어요. 당신의 긍정성을 최대한 이끌어낼 수 있는 방안을 찾을 수도 있으니까요."

어느 틈에 페르도가 다가와서 말했다. 그의 손에는 진초록과 검은 빛이 섞인 듯한 액체가 담긴 술잔이 들려져 있었다.

 

알뿌리를 담가놨기에 색깔이 변해버린 분노의 술이 분명하리란 예감이 몰려왔다. 설마 그걸 마시는건 아니겠지 싶어서 나는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계속>

 

 

 

 
 


태그:#판타지소설, #장르문학, #중간문학, #청춘문학,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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