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목덜미가 콕콕 바늘에 찔리는 듯하다. 건조한 로마의 여름은 후텁지근하진 않지만 따가울 정도로 뜨겁다. 오후 다섯 시가 가까워져도 햇빛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땡볕을 가르고 앞서가는 남편을 묵묵히 따라만 간다. 지도를 꺼내들고 찾아보기도 귀찮고, 얼마나 남았는지 물어보기도 귀찮다.

대체 '진실의 입'이라는 게 이렇게 더운 날씨에 찾아가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나 한건지 슬슬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손이 잘린 시늉을 하는 그레고리 펙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오드리 헵번의 '순진 내숭'을 꼭 재현해 볼 필요가 있는지 회의가 들 정도이다.

하지만 '진실의 입'이 있는 산타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에 도착하는 순간, 세기가 바뀌어도 예쁜 여배우의 내숭은 통하는구나, 싶었다. 그 입속에 손 한 번 넣어 보겠다고 줄을 느런히 선 걸 보니, 영화보다 현실이 더 유치하다, 싶어 웃음이 픽 나왔다.

게다가, 입구를 지척에 두고서 그 땡볕을 뚫고 교회 뒤로 삥 돌아온 걸 알게 된 순간, 그 억울함이란. 너무 뜨거운 태양을 감히 마주할 용기가 없어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남편 뒷발꿈치만 따라온 때문이다. 조금만 고개를 쳐들었더라면 길 건너편에 줄을 선 사람들이 보였을 텐데.

'진실의 입'아, 불어라 진실을!

그런데 정말 억울한 건 그 다음이다. 이까짓 게 뭔데 이렇게 줄을 섰지?, 어라, 돌아왔잖아? 이 더위에 억울해 억울해!, 삐죽거리고 투덜거리는 사이, 아뿔사! 내 코앞에서 바로 철커덩하며 창살문이 닫히고 만다. 그제야 마감시간이 적힌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억울할 수가. 마감시간이 있는 줄도 몰랐다. 해는 아직도 중천인데!(이탈리아 여름 낮은 어찌나 길고 긴지!) 난 적어도 마감시간 3, 4분 전에 도착했는데 딴전 피우다 문전박대 당했다. 문지기한테 따지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그 전에 왔는지 안 왔는지 진실의 입 속에 손이라도 집어 넣어보겠다고.

진실의 입아, 불어라 진실을. 난 이미 와 있었다고!

그러나 진실의 입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입이 아니라 깨무는 입이라서일까? 성근 쇠창살 사이로, 사람들이 트리톤의 입속으로 손을 넣는 모습을 구경할 수밖에. 희희낙락 사진 찍는 모습이 유치하다 싶었는데, 창살에 원숭이처럼 매달려 그 모습을 구경하는 우리 꼴은 더 우습다. 어린애 장난 같다고 얕보았다가 한방 먹은 기분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진실의 입을 찾는 이유가 꼭 <로마의 휴일>에 대한 추억 때문만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혹 진실에 대한 목마름 때문은 아닐는지. 저 '진실의 입'을 서울에 가져다 놓는다면, 지레 겁먹고 손조차 넣어 보기를 주저할 사람들이 여의도에는 많다. 거짓말을 하면 손목이 사정없이 잘린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을 두려워 할 만큼 겁먹을 자들이 많다.

사실 멀리서 가져올 것도 없이 우리 주위에는 진실의 입들이 많다. 그러나 진실의 입들은 진실을 말하지도, 거짓된 자의 손목을 깨물지도 못하고 있다. 재갈이 물리고 이빨이 뽑혀 버렸기에.

플루비우스(강의 신)의 얼굴이 새겨진 이 석판에 손을 넣고 거짓말을 하면 플루비우스가 손을 삼켜 버린다는 전설이 있었다.  실제로 중세의 악덕 영주들은, 자신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손을 넣게 하고는 뒤에서 몰래 손을 자르게 했다고.
▲ 진실의 입 Bocca della Verita 플루비우스(강의 신)의 얼굴이 새겨진 이 석판에 손을 넣고 거짓말을 하면 플루비우스가 손을 삼켜 버린다는 전설이 있었다. 실제로 중세의 악덕 영주들은, 자신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손을 넣게 하고는 뒤에서 몰래 손을 자르게 했다고.
ⓒ 박경

관련사진보기


'진실의 입'도 오랜 세월동안 이빨이 닳아 버렸는지, 창살에 매달려 구경하는 동안 손목이 잘려나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누구나 소소한 거짓말들은 하고 살겠지만 심판 받을 만큼 큰 거짓말은 안하고 사나 보다, 적어도 여기까지 달려와 당당히 검증을 받고자 하는 여행자라면. 아쉽다. 나도 팔 쑥 내밀고 이 엄마의 과거지사(이 엄마도 소싯적엔 공부 좀 했고, 바람 불면 스러질 듯 날씬했었다는)가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걸 딸 앞에서 당당히 검증받았어야 하는 건데.

트레비 광장에는 트레비 분수가 없다

생각해 보면 아쉬운 건 그 뿐이 아니다. 무더위 속에 물놀이 간다는 심정으로 트레비 분수를 찾았건만, 눈앞에 가득 펼쳐진 건 바글바글 모여 있는 사람, 사람들... 여름 성수기 해운대 저리 가라다.

고백하건대, 트레비 분수 바로 코 앞까지 가서 난, 트레비 분수를 보지도 못했다. 트레비 분수보다 더 놀라운 것이 내 눈에는 사람 떼였으니. 그도 그럴 것이 TV나 사진을 통해 본 건, 트레비 분수의 앞모습뿐이었다. 카메라 뒤에 숨어 있던 떼거지의 사람들과 생각보다 좁은 광장은 전혀 짐작도 못했으니.

게다가 나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인 곳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조금 과장하면 군중 공포증(ochlophobia) 수준이다. 그래서 주말이면 온 가족이 산책삼아 몰려가는 대형마트보다는 동네 구멍가게를 좋아하고, 바다보다는 산을, 유명한 곳보다는 덜 알려진 한적한 곳을 좋아한다. 사람이 많으면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후딱 빠져나가고 보겠다는 생각부터 든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내가 어찌 트레비 분수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겠는가. 경쾌하게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바라보면서 더위를 식히고, 등 뒤로 동전을 우아하게 날릴 각오를 하며 찾아갔건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동전이 물속에 퐁당 떨어지는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로마에 초대를 받는 행운아가 되리라, 했던 기대는 분수의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트레비 분수 주변은 발디딜 틈 없을 정도다. 이 많은 사람들에 치여 정작 트레비 분수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 트레비 분수 앞 트레비 분수 주변은 발디딜 틈 없을 정도다. 이 많은 사람들에 치여 정작 트레비 분수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 박경

관련사진보기


트레비 분수가 건물의 한쪽 면을 조각으로 장식한 명물이라는 것도, 대양을 상징한다는 전면의 거대한 수반도, 트리톤이 이끌고 있는 두 마리의 힘찬 말의 모습도 찬찬히 짚어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어깨 너머로 동전을 던진다는 일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설사 기억이 났다 해도 그 많은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갈 용기는 더더욱 없었을 터. 분수 앞 명당 자리에 걸터앉는 것만도 아마 한참을 줄을 서야했을 게 뻔했으니.

바로크 양식의 곡선이 살아 있어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수로 손꼽힌다.
▲ 트레비 분수 Fontana di Trevi 바로크 양식의 곡선이 살아 있어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수로 손꼽힌다.
ⓒ 박경

관련사진보기


하여, 로마를 다녀왔다고 재고 다니는 내게, 로마하면 트레비 분수를 첫 번째로 떠올리는 누군가가 내게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트레비 분수를 보았냐고, 정말 그렇게 낭만적이고 멋지더냐고, 동전은 던졌느냐고, 물어온다면 돌려줄 대답은 이것밖에 없다.

트레비 광장에는 트레비 분수가 없다!

덧붙이는 글 | 2009년 8월, 2주 동안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습니다.



태그:#로마, #이탈리아, #진실의 입, #트레비 분수, #로마의 휴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