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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서사(敍事)에 관하여
 
3일 간의 도서 대출 연장을 마치고 나오는 순간,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역시나 괴이한 그 발신 번호였다.
 
"나 없어도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거지?"
"대체 언제 올거야? 벌써 며칠 지났잖아."
 
"이제 막 지하 창고에서 일을 하나 해결했어. 우리의 신속 정확 안내원께서 드디어 알뿌리를 사수하셨거든. 그리고 메모를 보면서 잘못된 분노의 술을 회복할 방안도 찾아내고 있는 참이고."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야?나는 여기서 마구 헤매고 있는데!"
"어허, 왜그리 화를 내시나? 너, 일기장 주인공의 소원을 이뤄주고 싶지 않아? 오늘 보카에서 어제 방송의 2부가 진행 될 거야. 그것 알려주려고 전화한 거니까 화 풀어."
 
그는 여유 부리며 말을 이어갔다.
"피디가 하는 말이, 너는 꼭 참석해야 한대. 조제 그 여자는 자신의 의지대로 해도 상관없겠지만 말야. 아! 그 여자는 이제 여기 보카사람이 될 권리도 좀 생겼어. 자신이 스스로 마음을 조절할 줄 아는 것도 그 여자의 능력인 셈이지."
 
그가 말하는 중에 약간의 소음이 일더니 멜레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것 봐요, 당신이 적어논 대로 용액을 섞었는데 색깔이 변하고 있잖아. 어쩔 참이야!"
멜레나의 앙칼진 목소리가 사방팔방으로 메아리 치는 것 같아서 나는 오싹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자 그는 황급하지만 정확한 목소리로 다시 강조했다.
"여긴 며칠 째 비가 와. 그러니 올 땐 단단히 채비 해오고, 너가 오고 싶은 시간에 환상관광에 전화하면 기사아저씨가 데리러 갈 거야."
그리곤 전화가 딸깍하고 끊겼다.
 
나는 수화기를 들고 멍하니 있다가 계단을 천천히 내려와서는 학교 앞 연못가로 갔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책을 좀 읽어야겠다. 그리곤 대출 연장 해 온 책을 꺼내서 읽어봤지만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 김에 교문을 빠져나와선 부근의 수입품 가게에 들러서 이것저것 구경을 하다가 입구에 디스플레이 해놓은 보랏빛 레이스 우산과 로이 리히텐 슈타인의 그림이 프린트된 하늘색 레인부츠와 드레이핑감이 좋은 호피무늬 레인코트를 사버렸다. 제법 값이 나가는 것들이었지만 일러스트 아르바이트 대금을 받아놓은 것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았던 것을 이 참에 다 써버려도 상관 없을 것만 같았다.
 
'보카에 비가 많이 온다고했지?차라리 잘 됐네. 오늘 이걸로 인기 좀 끌어보는 거지 뭐'하며 제법 우쭐한 기분으로 조제네 가게로 갔다.
 
"그래서?또 가보려고?"
조제는 내가 시킨 레몬치킨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실쭉거렸다. 어쩐지 접시 위에서 오래 묵은 소스의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아서 역겨웠지만 그런 내색을 하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번 학기 내 공부는 보카에 대한 거야. 만약 다음 학기 까지 연장된다면 더 열심히 할 의향도 있고."
내가 역겨운 소스냄새를 참아가며 레몬 치킨을 한조각 입에 넣자 조제는 곁에 있던 술병을 따서 한잔 따라 주었다.
 
"그래, 시간이 남아도니까 온갖 짓거리 하며 그걸 공부라고 여기며 넘겨도 상관없겠지. 하지만 난 좀 달라졌어. 시간이 날때, 혹은 정말 지긋해서 미칠 지경일 때 컴퓨터 켜고 영화 한프로 다운 받아서 보는 그런 기분으로 이 사안을 대하고 싶다고."
 
"그럼 그렇게 해. 나는 괜찮으니까. 그치만 오늘은 어쩔거야?"
"몰라."
 
"육신과 영혼이 하나는 아니란 걸 요즘 여실히 느끼고 있어."
나는 접시에 잠긴 소스를 충분히 묻혀서 고기를 집어먹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조제는 멍한 얼굴로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몸이 자라고 , 그 다음엔 늙어가잖아... 그것처럼 마음도 몸과 별개로 어떤 방향으로 뻗어간다구. 그건 내 의지로 감당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럴만한 권리도 없는 것 같아. 내가 지배할 수 있는 내 정신의 일부분 외에 많은 범위가 나의 한계를 벗어나서 나를 떠밀고 어떤 서사(敍事)의 공간으로 데려다 놓는다고 해야겠지. 그건 하나의 삶의 과정, 혹은 미래에 대한 공상, 더 쉽게는 너와 이야기를 나누는 지금 이 시간 조차도 그 서사의 과정이 되는 것이고."
 
"점점 알수 없는 얘기만 하는구나."
조제는 샐쭉하니 차를 마시며 말했다.
 
"소풍 가서 너무너무 재미있게 놀다가 온 날 저녁에는 잠들기 전에 푸근하고 부품한 무엇인가가 마음에서 막 솟아오는 기분이 들잖아. 그게 뭘까 생각해 본적 있어? 그건 말야, 그날의 시간안에서 일렬로 배열된, 혹은 교차하고 엮여진 서사의 과정을 하나하나 충분히 음미한 것에 대한 만족감 아닐까 싶어.
 
물론 몸을 움직이면서 친구들이랑 뛰어놀고 갖가지 놀이를 통해서 폐부로 맑은 공기를 쐬니까 기분이 좋아지고, 뭐 그런 요소들도 작용해서 그날 하루가 재미있었던 것도 사실이겠지. 하지만 그 가운데는 시간의 흐름속에서 지나가는 일들의 과정이 자신의 눈에 쉽게 이해되고, 그 이해의 가운데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꼈기에 그 시간의 과정을 스스로가 충분히 따라가는 동안 느끼는 희열감이 아닐까 싶어.
 
너가 말한대로 영화를 보는 것도 하나의 서사 과정이야.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인생을 사는 것 역시도. 지금 너와 내가 대화를 나누는 이 과정까지도 우리가 서사의 동굴을 지나가는 증거가 되는 셈이지. 
 

그 과정에서 그냥 정신없이 시간만 보내고 나면 허무해질거야. 하지만 만약 너가 영화를 보면서'다음엔 주인공이 저 모퉁이에서 막 튀어나올거야'하면서 상상을 하며 본다든가,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지금에도 너의 마음속에서 수십 수천 개의 설득과 이해를 위한 단어를 꺼내고 있는 과정이 너에게는 생각의 여지를 만들어준단 거지.

 
죽지 않는 이상은 우린 평생을 이 서사의 과정을 반복하게 되는 거라고. 그리고 나는 지금 그 과정을 좀더 적극적이고 다각도로 임하고 싶다는 거지."
 
그러자 조제는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너 정말 어렵게 사는 구나. 그 따위 골치 아픈게 뭐가 필요해? 그냥 잘먹고 잘사는 방법 찾아서 돈을 벌거나 명예를 쥐려고 노력하거나 그렇게 사는게 인생이잖아. 너처럼 하나씩 의미 찾아가며 살다가는 머리 쥐나겠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느덧 창밖에는 노을이 내리고 있었고, 음악은 갖가지 색깔로 수십 가지 음악을 찻잔 곁에서 퍼부었다. 그리고 수많은 형상과 갖가지 색깔로 피어나는 이야기들이 그 찻잔 안에서 피어나오는 동안 그 찻잔을 기준으로 해서 시간의 대지가 저 멀리 지평선 끝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계속>


태그:#판타지 소설, #중간문학, #장르문학, #청춘소설,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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