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5월 23일 오전 7시. 원체 야행성이라 잠든 지도 얼마 안 된 나는 아빠의 성화에 들볶이며 눈을 떠야 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 1주기인 이날 아빠와 봉하마을에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오전 11시부터 노무현재단이 준비한 '민주 올레' 걷기 행사가 있고 오후 2시엔 추도식 겸 대통령 묘역 완공식이 있으니 서둘러야 한단다. 아빠가 이렇게 부지런한 모습을 보이는 건 드문 일이다. 노 대통령 추도식이라든지, 노 대통령 추모 콘서트라든지, 노 대통령… 뭐 그런 게 아니라면. (관련기사: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노무현 추모 콘서트' 다녀왔어요)

 

아빠와 딸, 두 번째 봉하마을 방문

 

간신히 세수만 하고 길을 나섰다. 나는 취재수첩과 카메라를 챙겼다. 아빠는 트레킹을 한다고 아예 등산 복장을 갖춰 입었다. 아침을 먹으러 들른 고속도로 휴게소에는 이른 시간에도 사람이 많았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다 봉하마을 가는 이들 같다. 어젯밤부터 내리는 비는 여전히 부슬부슬하다.

 

아빠와 봉하마을에 가는 건 두 번째다. 작년 여름에 시간을 내 한 번 왔었다. 생가와 사저를 둘러보고 공사중인 묘역에 절도 하고 봉화산에도 올라갔다. 아빠는 부엉이 바위 위에다가 담배 한 대를 불 붙여 올려두었다. 정토원에서 절밥을 얻어먹고 봉하빵 한 상자 사서 집에 돌아갔다. 그 때는 그냥 추모하러 온 거였고 오늘은 1주기니 더 의미가 있다.

 

오전 11시 경남 김해 진영읍에 있는 대창초등학교에 도착했다. 노 대통령의 모교라고 한다. 노란 우비를 입은 사람들이 족히 수백 명은 돼 보인다. 곧바로 봉하마을까지 약 1시간이 걸리는 5km의 '민주 올레' 걷기 행사가 시작됐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남녀노소가 함께 걸었다. 시민들은 간간이 '사랑해요 노무현'을 외쳤고,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타는 목마름으로' 같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행사는 차분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걷다가 스님 한 분이 눈에 띄어 말씀을 붙였다. 충북 청주 시민행동에서 오신 서운사의 진화 스님은 지난 2002년 노사모에 가입하셨다고 한다. "청주에서 노 대통령 추모행사를 하는데, 경찰이 상당히 통제를 하니까 쉽지는 않다. 그래도 그를 그리워하는 추모객들이 정말 많다"면서 지나친 경찰 통제에 대해 "지푸라기를 보고 뱀이라 겁낸다"고 비판했다.
 

아름다운 봉하, 일 년 사이 바뀐 모습
 
이윽고 봉하마을에 다다랐다. 작년과는 달라진 모습이 많이 보였다. 작년의 봉하가 그저 평화로운 농촌이었다면, 올해의 봉하는 그에 아름다움을 더했다. 노무현 재단과 재단법인 아름다운 봉하의 노력 그리고 시민, 자원봉사자들의 정성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움 가득한 봉하, 비인지 눈물인지 자꾸 흐르네

 

봉하마을 여기저기를 기웃대다가 행사장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공식 행사는 오후 2시부터지만, 1시경 이미 마을 곳곳은 추모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사람들은 봉화산에 오르거나 추모의 집을 구경하거나 묘역 앞에 헌화하거나 하고들 있었다. 2500석이 준비됐다던 의자는 이미 빈 것이 없었다.

 

30분 가량 추모 영상을 상영하고, 2시부터 공식 행사가 시작했다. 영상이 나올 때부터 사람들은 알아서들 우산을 접었다. 그리운 님의 모습과 목소리에 비인지 눈물인지 차고 뜨거운 것이 흘렀다. 사회를 맡은 김제동씨의 목소리는 날씨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비가 오는데도 피하지 않고 멀리 봉하까지 찾아주어 고맙다"고 했다(우리 모두가 상주인데, 누가 누구한테 고맙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반주 없이 부르는, 애끓는 애국가 그리고 임을 위한 행진곡. 이해찬 전 총리의 추도사와 도종환 시인의 편지 낭독이 이어졌다. 문성근, 명계남 두 배우의 애끓는 통곡에 객석은 울음바다가 됐다. 유족 대표로 노 대통령의 아들 노건호씨가 나와 봉하마을을 찾은, 그 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노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추모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노 대통령의 묘역은 시민들의 메시지를 새긴 1만 5000개의 박석으로 이루어졌다. 아주 작은 비석들인 셈이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묘역을 대통령께 헌정했다. 이어 권양숙 아름다운봉하 이사장과 노건호씨가 마지막 박석들을 제자리에 놓으면서 묘역이 완성됐다. 그리고 1004마리의 나비가 날아올랐다.

 

묘역에 깔린 박석들을 들여다보면 부모가 자녀의 이름을 적어넣은 경우가 상당히 많다. 우리 집의 경우처럼 누구네 가족, 하는 경우도 있고 삼대가 함께 사연을 적은 것도 많았다.
 
부녀가 함께, 삼대가 함께... 가족끼리 찾기 좋은 봉하마을
 
봉하마을을 찾은 추모객은 가족 단위인 경우가 가장 많아 보였다. 친구나 연인, 혹은 단체로 버스를 대절해 온 모임도 있었지만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이 가장 많이 눈에 띄었다.
 

마을회관 근처에서 다리쉼을 하던 가족은 부산에서 왔다고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아이들과 김해에 식사를 하러 왔다 들렀단다. 5학년, 4학년인 아이들은 사촌지간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니 어떤 것 같느냐는 질문에 어머니는 "TV로도 접하지만 직접 보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사진도 찍고, 추모 메시지도 한 마디씩 적어보니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이 된다"며 "오늘 일기 쓸 거리도 생겼다"고 웃었다.

 

봉하마을은 정말로 가족이 함께 찾기 좋은 곳이다. 온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볼거리, 느낄거리, 먹을거리가 두루 많다(이날 봉하빵은 인기폭발이어서 거의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살 수 있었다). 교육적으로도 훌륭하고 풍광이 아름다워 나들이 장소로도 그만이다.

 

묘역 참배 하고, 박석 찾아 인증샷 찍고, 추모의 집이랑 대통령 생가도 기웃거리고 한 시간 기다려 봉하빵 사니 저녁이 다 됐다. 아빠와 나는 발길을 돌렸다.

 

밥상머리에서 부모님과 정치얘기 해보셨나요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가 같이 봉하마을 오니까 좋지?"하니 아빠는 "혼자 오는 것보담 낫지" 한다. "내가 뉴라이트 학생연합 같은 데 들어가거나 했으면 어쩔 뻔했어!"하니 아빠는 "그랬어도 할 수 없지"하며 허허 웃는다.

 

나는 또, '이제 우리가 할게요'라는 슬로건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이제, 진짜, 우리가 해야 하는 거라고. 노무현 정신의 계승은 단순히 그를 그리워함에 있지 않다고, 봉하마을 자주 찾는 것도 좋지만 투표 꼭꼭 챙겨서 하고, 노무현재단 후원도 좋지만 정말 더 어려운 시민단체들도 많이 있다고.

 

나는 최근에 취재한 쌍용차 해고노동자들 그리고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 이야기를 했다.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고픈 우리가 그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지 노무현을 '소비'하는 '보통 사람'이 돼버리지 않겠느냐고. 백년의 백년 후에도 영원한 내 마음속 대통령 노무현은, 우리가 그를 닮을 때 우리 안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고.

 

정치에 관심 있는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어보면 보수적인 부모님 때문에 답답해 하는 경우가 많다. 모 신문을 신봉하는 부모님 때문에 자기는 집에서 '좌빨'로 찍혔다는 둥, 무심코 촛불집회 나갔던 얘기를 꺼냈다가 밥상머리에서 사단이 날 뻔했다는 둥 갖가지다. 게다가 정치 문제를 떠나서도, 그냥 나이를 먹다보니 점점 부모와 공감대가 없어 어색해지는 친구들도 있다. 그에 비해 다른 걸로 뚱하다가도 정치 얘기 하면서 의기투합하는 우리 부녀는, 이것도 복이지 싶다.

 

부모님과 어딘가 모르게 나눌 이야기가 없어 어색하다면, 좋은 봄날에 마땅한 가족 나들이 장소가 없어서 고민이라면, 그리고 아직도 그곳에 가보지 않았다면, 꼭 한 번 봉하에 들러보길 권한다. 사람사는 세상에.


태그:#봉하마을, #노무현, #노무현대통령, #박석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길이 없는 곳이라도 누군가 가면 길이 된다고 믿는 사람. 2011년 <청춘, 내일로>로 데뷔해 <교환학생 완전정복>, <다낭 홀리데이> 등을 몇 권의 여행서를 썼다. 2016년 탈-서울. 2021년 10월 아기 호두를 낳고 기르는 중.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