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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드러난 상처
 
눈물이 볼을 타고 반짝 흘러내리자 영어선생은 표정을 새롭게 하여 힘주어 칠판에 필기체로 문법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화면이 바뀌고 하얀 여름 교복을 입은 학생 하나의 뒷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모두들 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 학생만은 자리에 선 채로 필기를 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선생은 필기를 하다말고 그 학생을 보며 어른답지 못하게 이글거리며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열망사냥꾼은 이미 그의 마음속을 지배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아무 미동없이 학생이 담담히 수업에 임하자 영어선생은 분이 덜 풀렸는지 갑자기 아이들에게 '선생님 감사의 노래'를 부르자고 제안을 했다. 애 한테 상처를 주고나니 자신이 한없이 나쁜 선생으로 낙인찍힐까봐 두려웠던 걸까? 그리곤 사뭇 근엄한 표정으로 노래를 복창하자면서 아이들을 이끌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다같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선채로 있던 여학생이 가만히 고개 숙이고 있는 뒷모습이 클로즈업 되었다.
 
'빨간 하이힐'은 나레이션이라도 하듯이 화면에 맞추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생은 노랫소리에 맞추어 아이들 사이를 배회하며 자신의 다친 열등감을 그 노래로서 치료 받기나 한 듯이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하죠. 그리고 그 애 곁으로 가서, 그 애가 입만 뻥긋하며 노래를 부르는 시늉만 하는건 아닌지 확인하러 가는 거죠. 한참을 그애를 아래 위로 훑어 보며 노랫소리를 듣는 거예요. 그리곤 그 아이에게만 들릴듯이 이렇게 말하죠."
 
"씨*년아, 큰 소리로 노래 불러. 이런 *지, 싸가지 없는 년."
아이들의 노랫소리에  묻혀서 아무도 못 들었을 거라고 여겼지만 이미 그 옆 짝이 그 말소리를 똑똑히 들어버린 뒤였고, 더욱 더럽고 추한 말을 하는 그 선생의 입에서 뱀이 튀어나오는 느낌을 받았다고 나중에 말을 하죠. 그리고 그 애를 향해서 손으로 욕을 하며 사라지는 그 놈의 더러운 짓거리를 보고야 말았다며 자신의 짝을 불쌍해 하면서 엉엉 우는거죠."
 
화면에서는 '빨간 하이힐'의 안내 대로 상황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들 한숨 쉬며 한탄을 했고, 안내원은 탁자를 쾅 하고 내리치며 씩씩 거렸고, 꼬맹이는 경악을 하며 할머니 품으로 파고 들었다. 흰갈매기는 턱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여러가지 희한한 수법으로 아이를 열심히 괴롭히는 거죠. 이를테면 영어로 책을 읽으라고 일부러 시간 마다 시켜요. 그러면 애가 일어나서 읽을때...."
 
화면에선 계속 영상이 나가고 있었다. 안내원은 분노에 찬 신음소리를 끙하고 내더니
"그러니까, 저 영상은 일부러 촬영한 게 아니고 현실이란 거군요. 지금부터 11년 전에 있었던 일이 그대로, 누구의 시선으로 편파적으로 가감된 거 없이, 그런거죠?"
"네."
 
'빨간 하이힐'이 대답을 하는 동안 화면에선 영어 선생이 애를 세워놓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발음이 그 따위냐? 우리 다같이 비웃어 주자.하하하. 야! 넌 서서 수업 받아!"
"너 방금 영어하는 척하며 욕했지? 그 따위로 교묘하게 욕하면 모를 줄 알고?책 읽으랬더니 왜 욕하고 난리야?"
하면서 되지도 않는 트집을 잡는다거나 수업시간의 90 프로를 그 애를 괴롭히는 데 사용하는 거죠. 게다가 진도는 못나가고 이유없이 애만 들들 볶으니까 그 애를 불쌍하게 여기던 반 아이들도 어느 순간에 짜증이 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미 열망사냥꾼에게 사로잡힌 양심은 '저 년을 학교에서 내보내지 않으면 내가 나가야 할 판이다. 절대 그럴 수는 없다' 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던 거죠. 게다가 애가 워낙에 심성이 약하고 그런 반면에 의지가 강한 애라서 쉽게 주눅들지를 않았거든요. 그런 의지를 꺾고 싶은 것이 그 선생의 목적이었죠. 그래야만 자신의 다친 마음을 회복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된거예요. 더군다나 그 가해자가 누구인지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멋대로 결단 지어버리곤 혼자서 열등감에 쩔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거죠. 그리곤 어느 순간 부턴 반 전체에 그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말게 되고요.
 
남들 같으면 부모라도 불러오고 울고불고 난동을 부리고 전학이라도 갈 판이었지만 이 애는 속으로 삭이고 삭이면서 언젠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거라는 희망으로 당당히 살아가는 성격이었거든요. 어찌 보면 참 좋은 성격이지만...열망사냥꾼에게 마음을 내준 비열한 선생에겐 그 끈기나 삶에 대한 애착심 조차도 눈에 가시요, 어떻게든 무너뜨리고 자신이 그 영역을 차지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은 유혹에 시달리게 된 거죠."
 
이제 반 아이들은 그 애를 벌레 취급하는 거예요. 점심 시간엔 같이 밥 먹을 친구 조차 없어진 거죠. 그 옆 짝 조차도 이미 전염이 되어서 이젠 그애를 상종하지 않는 거예요. 참 무서운 병이지요. 그런식으로 약 석달 간을 선생과 반 아이들이 합심하여 애를 괴롭히던 중, 그 짝이 집에서 대학생인 언니랑 이런저런 애기를 하던 중, 그 얘기가 나온 거예요. 그래서  그 언니가 기함을 하고 마구 흥분하며 동생을 엄청 나무라고 난리가 난거예요. 이러다가 애 하나 죽이겠다면서..반 애들이 또 그러면 너가 나서서 말려야지 뭐하는 거냐고 난리 치더니 당장 학교에 전화 걸어서 교장한테 얘길 한거예요.
 
그래서 학교 전체에 조금씩 그 사실이 알려지고 그 선생은 자신 납세 하는 기분으로 학년이 바뀔 때 까지 다른 선생과 반을 바꾸어서 수업을 하게 된 거죠. 그나마 일이 그정도였기에 다행이었죠. 하지만 그 애에겐 이미 상처가 꽤 깊어진 후였어요. 스스로가 아픈 내색을 하지 않고 아물기를 기다리는 것 뿐 이미 상처는 그 애를 썩어가게 만들고 있었답니다. 게다가 몇 년 뒤에 본격적으로 열망사냥꾼의 침범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던 거죠. "
 
그리고 다음 순간, 서서히 스튜디오의 모습으로 장면이 바뀌어갔다. 할머니는 근엄하지만 다소 자연스런 표정으로 책상에 앉아서 카메라를 보고 멘트를 이어갔다.
"방송 전에 소개해 드린 대로 여기 계시는  네 분은 방금 전 영상에서 보신 내용과 관련된 분들입니다. 각자 지난 삶을 잊고 열심히 현재를 살고 계신 분들이죠. 미리 말씀드린 대로, 열망사냥꾼과 관련한 특집 방송인 만큼 다음 주 까지 연장 방송을 실시하게 됨을 알려드립니다."
 
그리고는 '빨간 하이힐'을 향해서 인자한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그래도 정의감 있는 그 언니 덕분에 그 애가 잠시 잠깐이라도 숨통을 틔울 수가 있었겠군요. 인연이란 게 묘해서.. 그런 인연은 또 만나게 운명지어지나 봐요. 그래서 당신이랑 그 아가씨가 다시 만난건 아닐까 싶어요." 
 
그러자 '빨간 하이힐'은 얼굴이 수줍게 달아오르며 말했다.
"글쎄요..어떻든 저도 그 일 이후로 사람과의 인연이란 것이 그냥 만들어지진 않는다고 믿게 됐긴 했어요.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오신 분들도 그런 맥락.. 아닐까요?"
 
가만히 지켜보던 안내원은 빈정거리는 속을 겨우 삭이는 듯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러니까, 그 고객님, 아니 그 교사가 한 마디로 혼자 공상의 세계에서 한 아이를 전교 일등, 아니 어쩌면 영어의 도사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고 있었던 거군요. 시쳇말로 미술 하느라 공부할 겨를이 없어서 학교 수업은 그냥저냥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애 한테 말이죠?"
 
"애가 외모도 단정하고 조신해 보이고 , 게다가 혼자서 어려운 영어책을 한 권을 다 훑어 봤다고 생각하니 ' 이 정도 애라면 분명해, 내가 두려워 할 만한 실력 가지고 있을거야' 하면서 오해를 할 만 하지않겠어요? 그 영어 선생은 눈에 보이는 대로만 믿는 사람인지 누가 또 알겠소?"
한쪽 구석에서 흰갈매기가  꾸역꾸역 말을 했다.
 
"이..이봐요. 나 빼곤 우린 어느 누구도 그 애의 얼굴을 본 적이 없어요."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빨간 하이힐' 이 말했다. 그러자 흰갈매기는 얼른 자세를 고쳐 앚으며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그..그야, 뒷모습만 봐도 그렇단 말이지.뭐."
하고 얼버무렸다.
 
"난 그 언니가 10년 전에 보카에 왔을때 봤어."
꼬맹이는 제법 대단한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1부 방송을 마치자 우리는 광고가 나가는 동안 자리에서 일어서서 기지개를 켜거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피디는 안내원의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구석으로 내달음질 쳤고 그 김에 '빨간 하이힐'은 살집이 접힌 등쪽으로 올라가 있던 티셔츠를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그 육중한 몸매에도 불구하고 몸에 꽉 끼는 티셔츠를 입은 그 용기가 대단해 보일 뿐이었다.  아마도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는 그 피디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오늘 방송분은 인터넷 게시판의 시청자 상황을 봐가며 평가를 내릴 거예요. 작가랑 상의해서 다음 주 방송 방향을 짚어나갈 테니 오늘은 여기 까지 하죠."
 
내가 다가가자 피디는 입안 가득 도넛을 물고 말했다. 하얀 가루가 입가에 묻어있는 폼새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고, 좀 전에 뒤집어쓴 샐러드 소스가 말라가는 머리에선 뻣뻣한 헤어스타일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팍의 상처에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다 아물게 된단다'하는 엄마의 얘기 처럼 딱지가 앉고 있었다. 하지만 흉터가 남는건 어쩔 수가 없지 않은가!
 
"오늘은 광고 제공업체인 환상관광에서 대절한 버스로 댁으로 각각 모셔드릴테니 함께 타고 가시죠. 그리고 며칠 내로 불시에 이 스튜디오로 호출을 할 테니 준비들 하시고요."
 
시그널 음악이 한 번더 울리고 스튜디오에 있던 카메라는 책상에 앉아있는 할머니를 비추기 시작했다. 방송 시작 무렵에 울면서 전화하던 그 남자가 다시 전화를 해 온 것이었다. 방금 나간 화면 영상을 보면서 자신의 죄책감이 더욱 깊어졌다고 울먹였다. 어떻든 그 역시도 이 일과 관련된 사람이란 뜻도 되리라. 그는 훌쩍 거리면서 코를 푸는 듯 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박사님, 오늘 절에서 원각경을 공부 했거든요. 가슴이 찢어진다는 것이...참회의 눈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게 된것 같아요..엉엉..제가 저지른 죄를...그 죄를 ...무엇으로...그 무엇으로.. 무엇으로...
 
 

 
눈을 떠보았을때 나는 작업실 바닥에서 술병들과 함께 나뒹굴고 있었다. 샐러드 그릇은 엎어져 있었고 수화기는 옆에 던져진 채였다. 티비에는 심야에나 어울릴 법한 제법 수위가 높은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수술했다는 느낌이 물씬 드는 거대한 가슴 덩어리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동안 무심히 벽장을 뒤져서 남은 일기장을 모두 거두어서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내일 도서관에서 대출 연장을 해야 할 '아르헨티나 문화의 알짜 연구'가 가방 안에 들어있는지를 다시 확인했다.
 
창문을 열자 건너편 산에 핀 아카시아 꽃향이 미친듯이 코로 엄습했다. 그 청순한 향은 아무 가식없는 척 하지만 실상은 남자가 유혹의 길로 이끌어주길 바라는 되바라진 처녀처럼 작업실 안으로 소리없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본능의 향기는 '너도 네 마음을 바로 바라봐. 왜 그렇게 머리 싸매고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봐.' 하며 속삭이는 기분이었다. 알딸딸한 술기운은 한잠 자고 일어났음에도 회복되지가 않아서 잠시 잠깐의 꿈속 여행이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킨 기분이었다.
 
그리고 스물 두살의 이 늦봄에 나는 남의 인생을 배회하며 내 삶을 지탱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슬그머니 두려움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연습이 없는 인생이기에 모두들 누군가가 이미 지나간 길대로 답습하는것이 최고라고 여긴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그 길 로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발을 딛어야 하는지 조차도 알수가 없고, 나만의 길을 만들어 갈 용기는 더더욱 없는 것 같다. 그러기에 그 일기장에 묘한 설렘을 가지고, 그 안에서 나의 길을 찾아가려는 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스쳐갔다.
 
눈을 돌려 창가에 놓여진 딸기 모종 화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중 하나의 화분에서 빨갛게 딸기가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장난 삼아 멜레나의 짐 가방에 꾸겨 들어갔다가 얼결에 식물업자의 집까지 따라간 인형 웨이터 처럼 나는 대책없이 일련의 일들에 휘말려 있다. 그리고 그가 정원 물가에서 알뿌리 식물이 무더기로 꽃피운 것을 보면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생의 의지를 다졌던 것 처럼, 이제 나는 창가의 빨간 딸기를 보며 그와 같은 심정이 된다.
 
인간의 삶이란 새싹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지고, 그리고 그 생을 다하기 까지의 식물의 삶과 똑같을 것이다. 그 가운데 맞딱뜨리게 되는 병충해의 과정에서 어떤 방제책을 쓰느냐에 따라서 그 식물의 생이 다할 수도, 연장될 수도 있다.
 
지금, 딸기는 나의 무관심 속에서도 잘 자라서 열매를 맺어주었다. 하지만 그 어느 순간 자신의 운명, 혹은 생각지 못한 사고에 의해서 그 꿈의 열매가 꺾이어야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한없이 가여운 생각에 화분을 끌어안았다. 그건 내 삶에서 맞따뜨리게 될지도 모를 수 많은 돌발 상황과 그로 인한 의지의 꺾임에 대한 막연한 애처로움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 작은 생명체가 살아가는 동안 내가 성심껏 희생하리라는 결심이 서기 시작했다. 그건 모든 삶에 대한 강한 열정이었고, 내 삶에 대한 약속이기도 했다. 
 
어떻든 이 계절이 지나갈 쯤이면 나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의 내막이 하나씩 밝혀질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기대감도 더불어서 생겼다. 그리고 길의 방향을 몰라서 일상의 매너리즘으로 숨어버린 내게, 최근의 이 괴이한 일들이 가져올 어떤 기대에 기대서 하루 하루를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문득 스쳤다.
 
 

 

<계속>

 

 

 


태그:#판타지소설, #장르문학, #중간문학, #청춘소설,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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