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무엇으로도 형언할 수 없는 내밀한 기쁨, 그것을 향해가는 각자의 여정
▲ 신선한 행복 무엇으로도 형언할 수 없는 내밀한 기쁨, 그것을 향해가는 각자의 여정
ⓒ 일러스트 - 조을영

관련사진보기


29.삐에로의 눈물

'빨간 하이힐'의 튀어나온 아랫배가 유난히 실룩거렸다. 아마도 이야기를 하느라 힘이 들었거나 옛날 자신의 모습을 영상으로 본다는 것에 대한 지극한 흥분이었거나 둘 중 하나다. 꼬맹이가 엄마에게라도 하듯이 탁자위의 주스 잔을 건네자 건너편에 앉은 안내원의 인상이 곧 찌푸려졌다.

그 뒷일이 어찌 됐는지는 모두들 궁금한 얼굴이었지만 주스 한 컵을 다 들이킬 때까지는 참고 기다리는 것 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 사이에 안내원은 곧 새침한 얼굴로 스타킹의 올이 나가지는 않았나를 보려고 카메라를 피해서 조심조심 자신의 다리를 두리번거렸고, 흰 갈매기는 여자가 신은 빨간 하이힐 위로 내리 비치는 천장의 조명등 불빛의 반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할머니만이 열심히 질문지를 작성하는 중이어서, 능동적으로 이 프로를 이끄는 주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애가 처음으로 열망 사냥꾼에게 물린 것은 여고 2학년 가을이 막 시작될 때라고 했어요. 자신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던 선생이 먼저 물려있던 참이었고, 그 독은 맹독성을 지닌 채 누군가를 향해서 전염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어느 날 오후 수업 시간에 극도로 강하면서 맹렬한 전파력으로 반 아이들 전체에게 옮아갔고요.

문제의 그날은 각자 집에서 보고 있는 문법서를 하나씩 가져오기로 한 날이었대요. 그래서 모두들 공부하지도 않는 '00영어'니, 뭐 그런 걸 가져와서는 자신들의 책상 위에 의기양양하게 디밀었죠. 헌데 그 애는 집에 있던 헌 책을 가져간 거예요. 남들과 같은 걸 갖고 가기가 싫어서 헌 서점에서 사다놓고 조금씩 공부하고 있던 그 책을 가져간 거죠.

그러자 영어 선생이 휘둥그레져서는 물어보는 거죠. 너가 혼자서 다 공부한 거냐고.. 하지만 솔직했던 그 애는 사실대로 다 말했지만 영어 선생은 믿지를 않죠. 너는 특별하구나 하면서 애들한테 자랑을 하는 거예요.

때마침 교무실 내에서 그 선생은 주변 다른 동료들과 비교되고 있던 중이었고, 자신의 자질에 한계를 느끼고 있던 그 선생은 가르치는 아이 중에 특별한 아이가 하나 있다는 기대감으로 상상에 상상을 더하게 되죠. 한마디로 자신의 괴로운 현실을 피하고자 누군가가 자신의 방패막이가 되어줬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그애한테로 꽂혀버린 거죠. 그리고 그 대상이 이 아이라고 여겨버리니 무거웠던 마음이 홀가분해진 거예요.

그 애는 부담스러워서 몇 번이나 변명을 해도 이미 기세가 등등해진 선생은 의미에 의미를 붙이며 환상의 세계로 정신없이 떠나가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며칠 뒤부터 영어 선생이 이 애를 괴롭혀요. 수시로 괴롭히는 거죠. 그 무렵 영어 선생이 가르치던 아이 중 한 명이 잘 모르는 부분이 있다면서 교무실에 들른 거예요. 그런데 담당 선생인 자신에게 오지 않고 안그래도 경쟁 상대인 옆 자리 선생에게 찾아왔더라는 거예요.

자신이 잠시 점심 먹으러 나간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단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맹렬하게 타오르는 분노를 견딜 수가 없게 된 거죠. 나름의 자존심으로 뭉쳐 있었고, 시골 학교에서 도시로 상경하여 허우대 멀쩡한 우리 아들이 공부도 잘한다며 떠받들어 키우던 노모에 의해 기고만장하게 자란 그에게 이런 치욕이란 있을수가 없었던 거죠. 더구나 그 선생에겐 한 가지 비밀이 있었거든요.

"기술을 익히는 고교를 나와서 사회생활을 하다가 대학을 들어갔다는 것이 그에겐 남다른 콤플렉스였던 거겠죠?"

한쪽에 앉아서 가만히 듣고 있던 흰갈매기가 한마디 거들었다. 다들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고, 카메라 역시 그의 얼굴을 확대 샷으로 비추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명문 사립여학교에서, 더구나 숨기고 싶은 자신의 비밀을 어떤 아이가 알게되어,'저 선생한테 배워봐야 남는거 없어' 하면서 이리저리 소문을 퍼뜨리고 다닐까봐 겁이 나기 시작한 거죠. 그리고 그 아이가 바로 이 애라고 생각하게 된 거고요."

그러자 피디는 의아스러운 얼굴로 한마디했다.

"어떻게 이 이야기를 아세요?"
"글쎄..뭐라고 답해야 할까.."

하며 흰갈매기가 머뭇대는 틈에 안내원이 재빨리 선수를 치고는,

"여학생들은 자신이 관심 있는 선생님한테 잘 보이려고 일부러 그 사람한테 찾아가서 공부 가르쳐 달라고도 해요. 그 고객님, 아니 교사 분께서 좀 경솔하시군요.더구나 숨길 일도 아닌듯 합니다. 고객님...아차"

안내원은 자신을 비추는 카메라를 발견하자 허리를 활짝 펴고 자세를 가다듬더니 말했다.

'빨간 하이힐'은 안내원을 슬쩍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확실하다 믿고 마구 애를 괴롭혀요. '너가 영어를 그렇게 잘한단 말이지? 얼마나 잘 하길래 선생인 나를 그렇게 깔아 뭉개냐?' 하는 심사로 애를 끝없이 괴롭히는 거죠. 하지만 생각해 봐요. 학창시절을 줄곧 그림만 그려온 애가 영어를 해 봤자 얼마나 잘 하겠어요?

그런데 그 선생은 이미 열망사냥꾼에게 포로가 되어있었죠. 슬리퍼 사이로는 구멍 난 양말이 아주 곱게 기워져서 '우리 주인은 가난하지만 깨끗함을 즐겨하고, 절대 주눅들지 않는 사람이다'는 듯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지요. 그리고 매일 아침 아내가 칼날이 서도록 깨끗하게 다려준 여름 와이셔츠는 그의 자존심이고 자랑이었는데 이제 그는 깨끗한 복장에 어울리지 않게 더럽고 추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버린 거죠."

'빨간 하이힐'은 숨을 가볍게 내쉬고는 옆에 있던 내 주스 잔을 들고는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다시 화면에선 그 다음 장면이 이어지고 있었다.

90년대 말의 평범한 교실이었고,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여학교 특유의 교실분위기에서 교단에 선 한 남자가 풀 샷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일기장에 나오는 선생이 아니란 것만은 분명해.'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찬찬히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영어 선생에게서 삐에로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어두운 과거는 현재에도 이어져서 그를 휘감았고, 눈앞에 놓인 현실은 가지각색의 모양으로 그를 혼란스럽게도 했고, 그 가운데 어렵고 어렵게 피어올린 무지개빛 희망이 미래의 영역으로 이여지고 있었지만 그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할 것 같은 서글픔에 눈물을 흘리고 마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 어디로도 발 딛을 수 없는 경계선 위에 핀 작은 희망과 눈물
▲ 삐에로의 눈물 과거, 현재, 미래 어디로도 발 딛을 수 없는 경계선 위에 핀 작은 희망과 눈물
ⓒ 일러스트 - 조을영

관련사진보기


<계속>


태그:#판타지소설, #장르문학, #중간문학, #청춘소설, #소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